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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Oct 27. 2022

2022년 10월의 가을


지난 봄에 들인 꼭지윤노리가 앵두같이 귀여운 열매를 맺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꼭지 윤노리는 정말 귀여워서 미쳐버릴 것 같은 하얗고 어여쁜 얼굴에 사정없이 달콤한 향기를 가진 꽃이 아주 잠시동안 피는데 꽃이 지고나서 비어버린 꽃대를 어떻게 하나 인터넷에 찾아보니 꽃대를 잘라주라고 하길래 사정없이 다 잘라내 버렸다. 아뿔사. 그 자리에서 열매가 나는 것 일 줄이야. 분명히 내 꼭지 윤노리에도 열매가 맺힐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내년을 기약하며 거의 울것 같은 얼굴로 집에돌아와서 열매없이 빈 가지의 낙엽진 우리집 꼭지윤노리에게 주인이 무식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어려서는 어른들이 가을에 단풍을 찾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작년부터인가 나도 가을 남산을 보러 서울을 가야한다고 하질 않나, (물론 핑계였다만), 생전 가지도 않던 가을 산에 소풍을 가지를 않나, 일부러 가을을 찾아다녔다. 요즘은 아침에 운동을 가는 코스를 바꾸어 조금 더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는데 한참을 숨이 넘어가게 언덕을 오르다가 테라스가 있는 달맞이 스타벅스에 들러 한참 멍하게 건너편 나무들을 구경하다 온다. (사실 그럴거면 뭐하러 무겁게 킨들을 챙겨나가는지 모르겠는데 꼭 챙겨가서는 책은 오분만 읽고 한시간은 멍하니 있다 온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은 너무 무거웠고, 슬펐다. 올 해 방영한 우리들의 블루스는 좋아하는 배우들이 너무 많이 나와, 그리고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서 보았다. 크게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진행이었다. 굳이 보고싶지 않은, 듣고 싶지 않은 설정과 대사도 없진 않았다. 마지막 동석과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미 슬플 것이 예고된 이야기였고, 이미 보기 전 부터 너무 감정을 이입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방어적인 태도로 시청했다. 화면은 아름다웠고, 이미 훌륭한 줄 알고 있었던 배우들의 연기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이야기는 슬펐고, 최대한 그 이야기에 몰입하지 않으려고 인물과 서사 중심으로 드라마를 보지 않고 그 이야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만 보았다. 아들과 어머니는 끝내 시청자가 만족할만한 드라마식 서사 속의 완벽한 화해를 이루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다가가려는 아들의 애처러운 슬픔과 여전히 속을 다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쭈뼛거림 가득한 재회의 시간을 건너 마지막에 닿았다. 많은 시청자들은 동석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고, 동석의 어머니더러 전에 없이 정신 나간 어머니라 손가락질 했고 분노했다.


나도 동석의 어머니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이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동석의 어머니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 남편과 자식을 바다에 잃고 한순간에 세상에 내 던져진 여자의 삶은 이해의 대상이 되기에는 그 누구도 직접 겪어보지 않는다면 알 수 없을 인생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자식이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살아남아 아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하기에도 그 사람의 슬픔의 무게를 감히 가늠할 수 없어 그럴 수 없었다. 사실 그 인물을 다른 배우가 연기 했다면 지금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텅 빈눈 이라는 표현을 글로만 보았지 실제로 본 것은 자신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는 아들을 바라보는 화면속 옥동을 통해서 처음 이었다. 어머니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아는 것이,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동석에게도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 경우는 오히려 내가 기억하는 내 부모의 나이가 되어 이해할 수 있는 때가 되자 더욱이 내 부모와 공감할 수 없었으며 결코 같은 선택지를 고르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에 실망만 남을 뿐 이었다. 타자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정도의 어림잡은 이해를 할 수 있을 뿐인데, 그 이해를 해서 무엇 할 것인가. 동석의 어머니 옥동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를 알게되는 것은 이해관계의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호기심을 해결 해 줄 뿐 당사자의 마음에 위로를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도대체 왜 내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묻고자함은 그저 상대방에게 내가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랑을 확인받고 싶다 호소하는 것이지 전후관계를 설명을 해 내라는 것이 아니라고, 이유를 안다고해서 슬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알고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어림잡아 이해한다. 이해할 수 없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이해해서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이해와 사랑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더라도 멈출 수 없어 슬픈 것 이다.


아들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여두고 어머니는 아들이 들어올 문을 향해 누워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지나간 어머니의 삶을 아들에게도 시청자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변명 없이, 아들에 대한 미안함의 화해의 충분한 제스처 없이 어머니는 떠났다.

누군가는 마지막 장면이 어머니에 대한 용서라고 하는데 나는 자기 자신의 괴로움에 대한 인정과 수용으로 느꼈다.


사실 그 전 까지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 제목부터 너무 무거워서 들 엄두가 안나는 짐 같아 보고싶지 않았다. 동석의 어머니의 대사 한 줄에, 그리고 보통의 드라마처럼 구구절절 사과와 드라마 속에서만 존재하는 누구나 만족할만한 화해 없이 떠난 어머니가 아들이 먹을 밥상을 등지지 않고 숨을 거둔 것을 보면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고, 대사 한 줄, 한줄을 집중해서 본다는 것 인지 알 것 같았다.


가서 안 오는 거 보면 거기가 좋은 가 보지.


기독교, 천주교에서는 천국에서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떠난 사람은 좋은 곳에 갔다고 한다. 그 어떤 것도 말이 되지 않았고 사실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완전하게 소멸된 존재에 대한 억지스러운 설명이 나를 너무나 화나게 했다. 일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순간에, 할아버지가 내 곁을 떠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서야,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어디서도 얻을 수 없던 위로를 얻은 것 같았다. 아,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다. 할아버지 거기가서 안 오는거 보면 거기가 좋은가보다.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를 하고 다니는 나를 보고 이모는 너 그러면 안좋아, 할아버지 좋은데 갔어. 라고 설명했고 할머니는 쟤가 저래서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너무 슬퍼하면 안된다는 말에 나는 할머니가 죽고나면 할머니의 물건을 죄다 다 싸짊어들고 와서 내가 다 가질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사람은 죽으면 물리적으로는 어떤 것도 남지 않는다. 내가 믿지 않는 천국이나 내새에 기약을 걸 만큼 낭만적인 슬픔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극락왕생의 약속은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제까지 실재했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은 잔인하다. 정말로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기록으로 남아봐야 너무 아득해서 더 가슴이 아팠다. 할머니와 매일하는 통화를 몰래 녹음해서 기록하다가 그것을 그만둔것은 그래서였다.


가을이오고 낙엽이 질 때 잎 속의 산성도가 증가하면서 엽록소가 파괴되고, 엽록소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색소가 나타나면서 나뭇잎의 색이 변하게 된다. 어머니가 왜 내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는 왜 그런 존재였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원망과 아픔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 보통 사람의 삶이다. 마지막 순간에 나를 등지지 않은 어머니를 두고, 내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짐을 지고도, 내가 나를 망가뜨리지 않고, 닳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행복에 간혹 그 어려움을 잊어버린 듯한 착각에 취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이 아니던가. 그러다가 어느날 다 잊은 줄 알았던 그 슬픔이 그대로 감정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을 알게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고 없는데 슬픔은 죽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또 서러워서 인생이 무겁게만 느껴지다가 일상에 치이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운 순간에 취해 잠시 또 잊고, 나이가 들면서 얻는 여러가지 생각들은 나무가 낙엽이 들듯 새파랗게 아픈 감정을 파괴하고, 그 감정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낙엽이 지는것 처럼 버석해진 몸으로 애처롭게 빈 가지를 붙잡고 물들어간다.


아무것도 남은 것 같지 않지만 모든 것이 남아있어서 더욱 슬픈 것이다.

남아있는 모든 것 위에서, 푸르게 어리고 젊은 날의 기억들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생애라면, 그래도 떠난 사람이 그곳이 좋아 내 곁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어쩌면 그래도 무너지지말고 포기하지 말아라는 작품 소개 속 작가의 말이 기댈 곳 없이 아팠던 내 마음에 위로를 전할 때, 그래도 인생은 배워봄직 한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항상 함께하는 할아버지와 내 이름으로 만들어진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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