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갑부대의 '전격전'
1940년 5월 10일 새벽, 야음을 틈탄 다수의 그림자가 일제히 풀숲에서 나와 약속된 지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밤하늘을 가르는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그림자들은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나며 일제히 기동 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사실 독일군의 입장에서 2차 세계대전은 너무 이른 시점에 시작된 전쟁이었습니다. 독일군이 예상 / 준비한 개전시기는 약 1944년 정도였는데, 역시나 전쟁준비를 위한 예산 / 장비는 물론이고 부대의 편성과 훈련 등의 모든 문제에서 독일군의 자체적인 준비는 매우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기대를 걸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일이 새로이 착안한 침공작전 계획이었습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의 입안과, 기동 전의 대가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uan)의 동의가 만들어낸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을 통한 기동전이 그 내용이었지요.
물론 이 파격적인 작전 안은 보수적인 독일군 주요 수뇌부와 마찰을 일으켰지만, 더 자세한 내용은 별도로 차후에 설명드리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천천히 전쟁의 흐름을 익혀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지난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 그중에서도 서부전선의 전장은 매우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참혹하지 않은 전쟁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1차 세계대전은 서로의 참호를 뚫지 못하고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지옥도로 정면 돌격해야 하는 참혹한 현장이었습니다. 그 참호를 뚫기 위해 어마어마한 수준의 포병화력이 발달하고, 독가스와 전차가 전장에 등장하였습니다.
물론 포병의 강력한 화력으로 지원받는 보병이 적의 참호를 뚫어낸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보병의 전진속도는 너무 느렸습니다. 적의 제1참호를 돌파한 이후 아무리 빨리 다시 돌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적의 제2참호는 이미 완벽하게 구축된 뒤였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은 새로운 방법의 기동 전을 준비하기로 합니다. 보병의 발걸음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빠른 속력의 기갑부대를 양성해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 뒤에 빠른 속도를 이용, 적의 종심으로 깊숙이 계속해서 진격한다는 과감한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다른 국가도 전차를 다수 운용했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의 운용방식 ; 전차를 분산배치하여 보병의 참호 돌파를 지원하는 방식을 고수하였습니다. 독일은 이러한 전차들'만'으로 편제된, 전차를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방식을 새로이 고안해 낸 것이었습니다. 또한 전차의 빠른 속도에 발맞추어 화력지원을 하기 위해서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Ju 87)를 활용하는 합동작전(合同作戰)의 개념도 적용시킵니다.
연합군의 전선을 전체적으로 천천히 미는 것이 아닌, 어느 한 지점에서 전차를 집중운용하여 돌파구를 만들고, 그 돌파구에 계속해서 기동부대를 투입하여 쭉쭉 적의 중심부로 뚫고 나간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된다면 모든 전선에서 피를 흘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적이 아무리 전선을 튼튼히 방비한다고 해도, 적의 중심부를 타격하여 섬멸하면 만사형통이었으니까요.
독일군은, 이러한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을 통한 전선의 돌파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이러한 기갑부대를 매우 울창한 숲인 '아르덴' 산림지대를 이용하여 기습의 효과를 더하기로 했습니다. 마지노선과 연합군의 주력 사이의 울창한 숲지대인 아르덴 숲을 돌파하여 적을 양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대규모 전차부대가 출현할 수 없는 곳에 일부러 대량의 전차부대를 투입한다는, 허를 찌르는 작전이었지요.
그러나 이 '전격전'이 과연 있었는가, 그리고 독일군이 전격전을 만들어내어 혁신적인 방법으로 프랑스를 굴복시켰는데, 하는 것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 물론 독일군이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하는 기동 전을 중시한 것은 맞지만, 그 이외의 프랑스군의 심리적 붕괴 등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쳤다는 것이라는 거죠.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천천히 흐름을 보시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아~ 이런 전술도 있었구나! 하구요.
그렇다면, 프랑스의 방비는 어땠을까요? 향 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프랑스도 아르덴느 숲에 대한 방비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의견들이 "아르덴 숲은 천연의 대전차방어벽이다"라는 한 프랑스 장군의 의견을 따랐지만, 내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들 중 몇몇은 눈에 띄었습니다.
프랑스의 한 장교가 올린 내부 보고서에는 '독일군 기갑부대가 아르덴 숲을 통과했다고 가정할 시, 70시간 만에 마스강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실제로 독일군이 68시간 만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 분석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산의 문제, 그리도 지형의 협소함 등의 이유가 발목을 잡으면서, 아르덴 숲 지역에는 제대로 된 방어선이 구축되기 어려웠습니다. 독일군이 돌파를 실시할 때에 아직도 공사 중인 프랑스군 벙커가 있었다고 한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게다가 이곳에 투입된 프랑스군 부대는 2 선급 부대로, 일선급 부대는 벨기에 영내로 진입하여 독일군과 맞붙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만약만약만약에, 독일군 기갑부대가 아르덴으로 온다고 치자. 우리가 항공정찰로 계속 관찰하다가, 아르덴 지역에 독일군 전차 1대라도 등장하면 바로 정예부대를 아르덴으로 보내면 되잖아?"라는 이유 등으로 결국 아르덴 지역은 우선순위에서 미뤄지게 됩니다. 게다가 실제로 이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매우 있어서, 누가 보아도 충분히 논리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울창한 숲에 대규모 전차부대를 집어넣으면, 당연히 어마어마한 소음은 물론이고 끔찍한 교통정체가 벌어질 테니까요.
또한, 프랑스군은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수많은 인명피해에 대한 끔찍한 PTSD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가 유일하게 믿고 기대던 것은 바로 포병화력이었습니다. 포병화력을 집중적으로 단기간에 쏟아부어 적 주력의 전투력을 저하시키고, 우수한 방어진지를 활용하여 적의 공세를 저지한다는 계획이었지요. 실제로 한 독일군의 전쟁 후 했었던 회고를 돌이켜보면, "전쟁 중 이 정도의 어마어마한 포병사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프랑스군의 화력만큼은 확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아르덴 숲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일제히 국경을 넘는 독일군의 대열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던 독일군의 공격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의 A집단군은 아르덴 숲으로, B집단군은 베네룩스(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역으로 일제히 박차고 나갔습니다. 독일군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A집단군, 그리고 그 선봉인 제19기갑군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아르덴 숲을 돌파해야, 프랑스군의 허리를 끊어놓으면서 그들을 일제히 포위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19기갑군단의 지휘관은 앞서 말씀드린 하인츠 구데리안으로, '전차의 엔진은 주포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기동 전에 목숨을 건 사나이(...)였습니다. 그가 이끄는 독일군 기갑사단은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빠르게 스당지역에서 마스(뫼즈) 강을 도하한 뒤, 계속해서 프랑스군의 후방으로 전진을 해나가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전진은 예상대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전혀 예상지도 못했던 강력한 적이 그들을 막아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군도, 영국군도, 벨기에군도 아니었습니다.
그 적은 바로 "교통체증"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전차 / 차량 이동대열이 길게 늘어서야 하는 기갑부대의 특성상, 좁은 산길과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아르덴 숲에 집중적으로 투입되다 보니 극심한 교통정체가 발생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기습의 효과를 달성해야 하는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만약 이 정체기간 동안 프랑스군 항공기가 단 한대라도 상공에 나타나 자신들을 발견한다면, 프랑스군 주력이 방향을 돌려 이쪽으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포탄세례와 공중폭격이 이어질 수도 있었구요.
그러나, 다행히 안개가 낀 기상상황과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독일군으로서는 최적의 시나리오가 그려지게 됩니다. 독일군은 아르덴 숲을 느리지만 착실하게 돌파하였고, 계속해서 프랑스군의 후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 제19기갑군단의 선봉인 제1 기갑사단이 스당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이들의 임무는 마스(뫼즈) 강을 도하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으로 더욱 깊숙이 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상대할 프랑스군은 제55 보병사단으로, 앞서 말씀드린 대로 2 선급의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제55보병사단의 목적은 '독일군의 격멸'이 아닌 '스당 지역의 방위'였고, 독일군의 발목을 잡고 끈질기게 버틴다면 주력부대가 올 때까지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1 기갑사단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독일군도 급히 달려오느라 도하작전을 위한 준비가 100% 다 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독일군은 누구보다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 군사작전에서 "완벽성"과 "적시성"은 서로 반비례 관계여서, 너무 완벽을 기하다 보면 시기를 놓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기는 법이지요. 이 두 가지의 간극을 줄여나가는 것이 바로 "지휘"구요.
게다가 독일 공군의 화끈한 공중지원은 이러한 1 기갑사단의 전진에 더욱 크나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군 55 보병사단은 나름대로 항전을 이어나갔고, 1 기갑사단의 옆에 있던 2, 10 기갑사단의 공세는 지연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중앙이었던 1 기갑사단이 결국 돌파에 성공하면서 전선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후 2사단마저 돌파하는 데 성공하자 프랑스군의 방어전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도하를 마친 독일군 전차들은 잠깐의 재정비를 거친 뒤 프랑스군의 후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1차 세계대전처럼, 돌파한 부대가 포위될 걱정을 없애기 위해 인접부대가 자신의 진출선까지 같이 진출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프랑스군의 사령부가 위치한 곳으로 전차들이 내달리기 시작했고, 이와 발맞추어(?) 55 보병사단에는 "전차가 나타났다!"는 헛소문이 퍼지면서, 사단 차원에서의 제대로 된 역습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사단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훗날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령부 인근엔 아직 독일군 전차가 진출하기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프랑스군에게는 불운이었습니다. 55 보병사단은 황급히 아르덴 숲의 방어를 위해 조직된 예비 사단이기 때문에, 군대가 아니라 공사인부라고 자조 섞인 토로를 할 정도로 벙커공사에만 진심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헛소문에도 부대가 와해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전선은 돌파되었고 프랑스군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붕괴의 연쇄작용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독일군은 경이로운 전진속도를 보여주며 프랑스군의 종심 깊이 기동 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의 전차 속도가 너무 빨라 포병지원이 어려울 땐, 하늘의 포병인 슈투카가 날아와 적재적소에 정확한 CAS 폭격을 때렸습니다. 이들이 내는 굉음은 연합군 병사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어, 나중엔 소리만 듣고서도 혼비백산 도망쳐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다급히 도처에서 소규모 역습을 시도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지휘체계의 혼선과 현장의 혼란 등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프랑스군 전차는 보병과 보조를 맞추어 전진하는 "이동요새"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넓은 작전반경을 상정하고 설계된 독일 기갑부대의 속작전템포에 맞추어 대응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독일군의 전투능력과 더불어, 기갑부대가 보여준 경이로운 기동속도 또한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이러한 독일군 기갑부대의 전진은 대서양까지 계속되었고, 훗날 '사막의 여우'로 유명세를 타게 되는 제7기 갑사단장 에르빈 롬멜이 바다에 도착하면서 그들의 질주가 비로소 멈추게 됩니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이렇게 바다에 도착하게 되면서, 연합군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영국에서 프랑스를 돕기 위해 건너온 영국 원정군을 포함, 수십만의 영/프 연합군이 포위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거나, 혹은 모두 영불해협에 수장될 판이었습니다. 이렇게 포위된 각지의 패잔병들은 모두 바닷가로 모여 본국의 탈출용 함선을 기다리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덩케르크>가 되겠습니다. 덩케르크에 관한 내용은 차후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독일군이 갑자기 정지하는 바람에, 영국이 수십만에 달하는 이 병력을 안전하게 본국으로 후송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덩케르크 주변에서 수십만의 병력을 구하긴 했지만, 이들은 그야말로 모든 장비를 버리고 홀연히 몸 하나만 건사해서 돌아온 것이었기에 곧바로 다시 전장으로 투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군은 계속해서 전투를 지속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의 새로운 총리로 1차 대전의 영웅 "필리프 페텡(Philippe Pétain)"이 등장하였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는 독일에게 항복선언을 합니다. 이는 영웅이었던 그를 순식간에 조국의 배반자로 만드는 결정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페텡의 항복으로 인해, 독일군은 프랑스의 북부지역과 비스케이만 인근의 해안지역을 점령하고, 나머지 지중해 인근의 해안과 프랑스의 국토 절반 정도엔 괴뢰정부가 수립되는데, 이것이 바로 '비시 프랑스' 정부입니다. 이 비시 프랑스는 1944년 독일군이 모두 점령해 버릴 때까지 존속하게 되는, 약간은 복잡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연합국의 주요 열강이자 한 축이었던, 육군 강국 프랑스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페텡의 비시 정부가 독일과 맺은 항복조약을 인정할 수 없었던 프랑스군 드골 대령은 자신을 따르는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로 이동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계속하는데, 이들이 바로 '자유 프랑스'가 되겠습니다.
독일은 지난 전쟁에서 몇 년 동안이나 이기지 못했던 프랑스를 단 몇 주만에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독일군의 기갑부대 집중운용과 그로 인한 충격, 그리고 독일에게 유리했던 우연들이 겹치면서 만들어낸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영국은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를 잃었고, 독일은 이제 영국을 상대로 다음 작전을 준비합니다.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elöwe)'이라고 명명된 작전은, 독일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영국 침공 준비가 시작된 것입니다.
(5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