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상공에서의 진검승부
프랑스가 항복하자,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더 큰 우위에 설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독일의 유보트들은 북해를 삥 돌지 않아도, 프랑스의 항구를 사용하여 즉각적으로 대서양 출격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독일 공군도 프랑스의 공항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작전반경이 기하흡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대서양의 유보트들이 영국으로 가는 수송선을 격침시키고, 또 독일 공군이 이러한 유보트의 작전을 보조하면서 영국을 경제적으로 굶겨죽일 수 있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또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영국의 식민지 군대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일도 어려워질테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독일의 행동들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냐는 질문에는 명확히 "아니다"라고 답변드릴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섬나라인 영국에게 항복을 받아내려면 지상군이 상륙해야 하고, 이는 1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계의 바다를 제패한 영국 해군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도 프랑스가 항복한 다음 달인 1940년 7월, 영국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lion)'의 준비를 명령했지만, 사실상 바닷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정복자체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쟁 중 가장 큰 주요국인 영국을 그냥 둘 수도 없었고, 상황은 진퇴양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공군의 존재가 점차 부각되었습니다. 강력한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로 날아가, 그들의 본토를 초토화하고, 해군 기지를 폭격함으로써 해군의 전투력을 저하시키고, 영국 국민의 사기를 꺾어 그들이 반전 여론으로 돌아오게 만든다면, 영국은 협상 테이블로 나와 앉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이제, 전쟁사 이래 최초로 항공력을 이용해서만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힘든 과업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양측 공군 간의 공중전은 도버 해협에서 시작하여, 점차 영국 본토로 옮겨갔습니다. 영국 공군은 분전했지만, 독일 공군의 물량공세에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양측은 전술적으로는 비등비등한 교전비를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체적인 숫자에서 부족한 영국 공군이 불리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점차 도버해협의 하늘에서, 영국의 하늘로 전장은 옮겨갔습니다.
독일 공군의 최초 목표는 당연하게도 영국 공군이 사용하는 군용 공항, 항공기 생산시설, 방공체계 등 영국의 항공전 수행 능력을 제거하기 위한 표적들이었습니다. 이곳을 폭격하기 위한 독일군 폭격기와 그것을 호위하는 독일군의 전투기가 영국에 진입하면,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달려 나온 영국 공군 전투기가 교전을 시작하는 방식의 전투가 진행될 것입니다.
독일 공군의 주요 전투기 '메서슈미트 109(bf 109)'는 이미 프랑스 전격전에서부터 하늘을 제압하면서 강력한 독일 공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날렵하고 강력한 이 기체는, 독일군의 번개 같은 진격속도에 발맞춘 신화와도 같았습니다. 또한 주력 쌍발전투기였던 Bf 110도 느리지만 강력한 화력으로 이들을 보조할 것입니다. 그러나, Bf 109와 Bf 110은 이제 새로운 적수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Spitfire)'는 매우 유려하게 생긴 우아한 기체로, 비록 무장이나 급강하 측면에서는 메서슈미트에게 밀렸으나 선회력 부분에서는 훨씬 더 유리했습니다. 이제, 이것을 운용하는 파일럿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공군 지휘관들의 역량이 모든 것을 좌우할 것입니다.
1940년 8월 13일, 독일 공군이 '독수리의 날(영 : Eagle day / 독 : Adlertag)'으로 결정한 이 날, 독일군의 대규모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 오전에 개시되었던 독일 공군의 폭격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으나, 오후에 개시된 공격에서는 영국 공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은 지난 화에서 점령했던 노르웨이에서도 폭격기 부대를 출격시켜 영국 런던 동북방을 타격하여 영국의 허를 찌르려 했으나, 영국 공군의 방공 레이더에 포착되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노르웨이에서의 공격은 전면적으로 취소되었지요.
남은 것은 결국 프랑스에서 날아오른 독일 공군 주력부대의 역할이었습니다. 양측은 모두 분투하였으나, 결국 '독수리의 날'은 영국 공군의 판정승이었습니다. 양측의 피해는 비등비등하거나 독일군이 약간 더 많았지만, 영국 본토라는 이점과 더불어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영국 공군의 판정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의 공격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40년 8월 15일, 무려 약 1,400여 대의 독일 공군 군용기가 날아올랐습니다. 독일 공군은 많은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계속해서 출격을 유지했지만,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영국 공군은 마치 독일군이 어디를 공격해 오던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이 운용하는 레이더 덕분이었습니다. 이 레이더는 독일군도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무기인 줄 몰랐던 것이지요.
8월 18일,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독일 공군은 지상에 있는 영국 공군의 항공기지와 활주로, 항공기 생산공장과 방공시설 등을 집중적으로 폭격했습니다. 영국 전투기들은 끊임없이 날아올라 독일군 폭격기에 끈질기게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달려드는 영국 전투기를 막기 위해, 폭격기를 호위하던 독일 전투기가 막아서면서 하늘에선 화려하고 정신없는 공중전이 지속되었습니다.
영국 공군은 교환비율로 봤을 때, 훨씬 더 많은 수의 독일 공군을 맞아 싸우면서도 눈부신 분투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국 공군이 하루, 또 하루 버텨낼 때마다 조급해지면서 점차 사기를 잃어가는 쪽은 독일이었습니다. 영국이 협정으로 나와야 하는데.. 대체 뭘 믿고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버티는 거지? 하는 의구심과 사기저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는 와중, 양측 파일럿들의 체력은 점점 고갈되어 갔습니다. 공격의 고삐를 절대 늦출 수 없었던 독일 공군의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막아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 창공으로 날아올라야 했던 영국 공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그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되었지요.
"인류의 분쟁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많은 빚을 진 적이 없다." (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was so much owed by so many to so few.)
이 일화에서 따와, 이후 "그 소수(The few)"는 영국 공군, 정확히는 그 파일럿들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말 그대로, 영국 공군은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내어 버티고 있었고, 다급해진 독일 공군도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독일 공군은 이제 영국 공군의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하였고, 여기에 어느 한 독일 폭격기가 실수로 런던을 폭격한 것에 대한 복수로 영국이 베를린을 2회에 걸쳐 폭격하자 공격의 목표가 "영국 공군"에서 "런던"으로 변경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런던을 공격한다면, 지금까지 수세인 영국 공군이 런던을 지키기 위해 박차고 나올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일일이 찾아내어 격멸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도 힘을 받았습니다.
9월 7일, 런던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던 영국의 주요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고, 순식간에 제국의 수도는 최전선 도시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독일 공군의 폭격은 계속되면서 영국군에게 많은 피해와 혼란을 가져다주었으나, 영국군도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공군은 집요하게 독일 공군의 약점을 물고 늘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항속거리'였습니다. 영국 공군의 경우, 공중전을 벌이다가 격추되거나 연료가 부족하면 바로 자국의 영토에 불시착한 뒤, 새로운 전투기를 배정받아 다시 날아오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경우는 불시착을 한다면 적지 한가운데에서 당장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었던 데다가, 프랑스에서부터 해협을 건너 날아와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특히 폭격기들을 호위해야 하는 독일 전투기들은, 런던에 도착한 이후 작전 가능시간이 5분에서 10분 남짓으로, 이 시간이 지나면 좋든 싫든 전장에서 이탈해 다시 프랑스로 귀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탈하는 이들의 뒤에는 항시 끈질긴 영국 전투기들이 마지막까지 그들을 방해했습니다.
영국의 항전은 계속되었고, 전투의 불씨는 더욱 거세게 타올랐습니다.
바다사자 작전의 작전개시일이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독일 공군은 영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지도, 영국 공군과 해군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독일 공군의 작전은 단순한 군사작전의 의미를 넘어서서, 자신들의 최고지도자인 히틀러의 진노를 느껴야 할지도 모르고, 향후 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급박함이, 많은 출혈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을 마지막까지 공격에 나서게 만다는 촉발제였습니다.
9월 15일, 독일 공군의 회심의 공격이 런던에서 이루어졌고, 영국 공군도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치열한 공중전이 계속되자, 처칠은 공군의 한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지금 출격대기를 하고 있는 전투기는 얼마나 됩니까?"
"단 한 대도 없습니다, 총리님."
그야말로, 양측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한 전투가 하루종일 계속되었고, 영국 공군이 이 날 독일군에게 자신들의 2배가 넘는 피해를 입히면서 영국 공군의 판정승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날이 바로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라고 불리는, 기념비적인 날이 되었지요.
이 날의 전투결과로 인해, 영국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영국 침공을 위한 바다사자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이제 전략적인 목표를 잃었고, 그저 자신의 독재자와 공군 최고사령관의 마지막 위신을 세워주기 위한 무의미한 소규모 야간 출격만을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영국을 굴복시키는 일이 불가능으로 돌아가자, 독일은 다시 새로운 목표물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영국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야 할 대상은 자명했습니다. 마지막 강대국, 소련을 굴복시킨다면 이제 세계무대에서 자신들에게 대항한다고 나서는 국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히틀러가 내내 말했던,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을 넓히는 아주 중요한 목표였지요.
독일은 이제 수십, 아니 수백만의 대군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사상 최대의 대규모 지상작전을 준비합니다.
이 작전이 시작되면, 세계는 숨을 죽일 것입니다.
(6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