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벌어진 혈전!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지던 영국 본토 항공전이 점차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갈 무렵, 독일의 동맹인 이탈리아를 둘러싼 지중해에서도 서서히 전운의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침공에서 재미를 본 독일을 보면서 부러워하던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남부 지역에 공격을 했다가 오히려 반격당하기 일쑤였고, 여기저기서 제대로 된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는 애물단지였습니다.
게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잠시나마 독일에게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는, 전쟁 이후 지중해와 중동 지역에서의 이권을 얻기 위해 다급하게 이집트 침공을 단행하게 됩니다. 물론 이탈리아군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고, 이탈리아 장군들도 이를 이유로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무솔리니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1940년 9월, 이탈리아의 25만 대군은 리비아 - 이집트 국경을 넘어 이집트를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를 탈취함으로써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함과 동시에 중동 지역에서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5만의 이탈리아군을 막기 위한 영국 제8군의 전력은 겨우 3만이 조금 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도된 이탈리아군의 침공은 영국군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집트로 조금이나마 진출했던 이탈리아군은 다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리비아까지 빼앗기면서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됩니다. 애초에 이집트를 공략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이젠 오히려 북아프리카 전부를 잃게 생긴 이탈리아는 다급하게 자신들의 큰 형님, 독일에게 기대기로 합니다.
독일군은 이런 막장상태의 이탈리아군을 구원하기 위해, 1941년 3월 2개의 기갑사단을 꾸려 '독일 아프리카 군단(Deutsches Afrikakorps)'을 창설하고,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을 군단장에 임명합니다. 그러나 영국이 제해권을 확보한 지중해를 뚫고서 보급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롬멜은 소규모의 부대만을 일단 이끈 채로, 북아프리카 트리폴리에 상륙하였습니다. 이렇게, 훗날 사막의 여우라고 불릴 롬멜의 전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롬멜은 '가짜 전차'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트럭과 자동차에 판자를 덧대어 만든 이 가짜전차를 본 영국군 첩자와 항공기들은, 어마어마한 독일군 기갑부대가 북아프리카로 넘어왔다는 첩보를 보고하였고, 영국군은 독일군을 과대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전설적인 후퇴속도(...)는 영국군이 너무 빠른 진격을 하게되는 빌미를 제공했고, 영국군은 아직 숨도 고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와중, 소규모 부대만을 이끌고 롬멜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롬멜이 부여받은 임무는 이탈리아군과의 공조를 통해서 트리폴리를 지켜냄으로써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잃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 와본 롬멜은 영국군이 정신 차리기 전에 공격해서 주도권을 빼앗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롬멜의 신출귀몰한 공격작전에 영국군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롬멜이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전격적인 진격 속도를 보였고, 영국군은 초장의 눈부신 승리에도 불구하고 패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영국군의 주요 고위 장성 중 하나였던 리처드 오코너(Richard O'Connor) 장군마저 이 초전(初戰)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힐 수준이었으니, 롬멜의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이었고 전격적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영국군 지휘관 아치볼드 웨이블 장군은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독일군의 예봉을 꺾어둔 뒤에 다시금 전선을 안정화시켜야 했습니다. 마침, 롬멜과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진격은 항구도시였던 토브룩() 요새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토브룩은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상태로도 굳건히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이는 항구였기 때문에 영국 해군에 의해 보급이 원활하게 진행되었고, 또 기동전이 아니라 요새지역에 대한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독일군에겐 매우 부담이 되는 전장환경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토브룩을 중심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 영국군은 지속적으로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영국군의 이런 공세는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그러나 롬멜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를 막아내었고, 독일군과 영국군 모두에게 큰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롬멜이 신출귀몰하게 등장하여 전선을 안정시키는 모습은 양측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침공이 시작되면서 북아프리카의 전장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북아프리카는 이탈리아의 폭망을 막기 위해 보낸 것이었는데, 롬멜의 공격으로 인해 전선이 너무 넓어진 측면도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롬멜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롬멜은 계속해서 본국에 추가보급을 건의하는 한 편, 공군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내었습니다. 연합군의 강력한 항공력으로 인해 최전선에서의 피해를 물론, 보급도 방해받고 있었던 실정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소련 침공은 차후에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고, 여기서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시점으로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공방을 주고받는 와중에서도, 롬멜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화려한 전술과 더불어, 식수가 떨어진 영국군의 야전병원에 백기를 단 장갑차를 보내어 식수를 선물했다는 미담이 퍼지면서 이러한 신화는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독일 본국에서는 롬멜의 독단(좋게 말하면 뚝심, 나쁘게 말하면 아집이 될 수 있겠네요)에 대한 반감, 특히 공군 쪽에서 매우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론도 생겨나게 됩니다.
새로운 영국군 사령관 웨이벌 장군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처칠 수상의 공격 닦달에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 틈을 노려 독일군은 새로운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1942년 6월, 독일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항구요새 '토브룩'이 독일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훗날 영국의 처칠이 '가장 충격적인 사건들 중 하나였다'라고 회고했을 만큼, 이는 영국군에게 매우 심대한 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토브룩 함락의 결과로, 롬멜은 '원수(Generalfeldmarschall)'계급으로 진급하는 개인적인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독일군은 진격을 계속하였고, 리비아를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이집트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이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지역의 이름은 '엘 알라메인(El Alamein)'이었습니다.
엘 알라메인은 '콰타라' 분지라는 험난한 지형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병력이 좁은 길목에 모일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롬멜은 자신의 장기인 기습적인 기동전을 펼칠 수 없었고, 좁은 길목에서 영국군과의 전투를 피하고서는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수천 킬로미터나 늘어선 보급로는 독일군에게 적절한 보급을 해주기엔 너무 길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고 긴 보급선은 영국 공군과 해군의 방해로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영국군의 편이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영국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통해 원활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전투력도 더욱 보강될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독일군이었습니다. 전차도 부족하고, 연료는 더욱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감행해야 하는 것은 독일군이었습니다. 롬멜은 엘 알라메인에 대한 공세를 지시했지만, 독일군의 전투력 저하와 영국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이 시점에서 롬멜은 엘 알라메인에서의 공세행동을 멈추고, 방어로 전환하는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제, 독일군에게는 영국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영국군의 새로운 사령관이 부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롬멜의 적수로 유명한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였습니다.
몽고메리는 완벽주의자로, 부임한 이후 철저하게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수준의 전투력이 되기 전까지 롬멜의 도발에 절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고, 다급한 것은 롬멜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군을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 완성되자, 영국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23일 밤, 영국군 측에서 수백 문의 야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이들이 쏘아 올린 포탄은 독일군고 이탈리아군의 최전선 참호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수십 분의 공격준비사격이 끝난 이후, 전차를 동반한 영국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수십 킬로미터에 걸친 어마어마한 지뢰밭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롬멜이 만들어놓은 '악마의 정원'이라 불린 지뢰밭이었습니다.
이러한 영국군의 공세는 영국군으로서도 수천 명의 피해와 백여 대가 넘는 전차가 격파당하는 피해를 계속해서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는 준비되어 있는 전력을 모두 쏟아부었고, 독일 - 이탈리아군은 사력을 다해 이들을 막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공세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롬멜은 이 당시에 상황보고와 요양으로 인해 독일 본국에 돌아가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후임으로 와있던 슈툼메 중장은 영국군의 공세 첫날 사망하고, 롬멜이 부리나케 전장으로 복귀하였지만 전황은 여전히 암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진지를 고수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뒤였습니다.
롬멜은 이제 본국의 히틀러에게 후퇴를 건의하게 됩니다. 더 이상 진지를 고수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후방으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를 거부, 무조건 적인 현지고수를 명령합니다. 앞으로 전쟁 내내 보일, 후퇴에 대한 히틀러의 강박적인 대응의 전초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하들의 희생이 계속되자, 결국 1942년 11월 2일, 롬멜은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후퇴를 결정합니다. 독단으로 결행했던 공격이, 독단으로 결행하는 대규모 후퇴로 귀결된 것입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롬멜의 결정을 지지했지만,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히틀러와 다른 장군들의 관계에 대한 글로 나중에 한 번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어찌 되었건, 롬멜이 철수를 시작, 시작점이었던 리비아의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지로 이동합니다. 연합군은 이제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롬멜과 북아프리카 군단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튀니지에서의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해가 바뀐 1943년, 추축군은 장비와 인명을 모두 실어 이탈리아로 탈출시키기 위해 분투하였고 이때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이 공식참전한 미군과 첫 교전을 벌입니다. 카세린 협곡에서의 전투 등 미군에게 쓴맛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쟁의 판세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943년 5월 마지막 남은 추축군 병력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이렇게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했던 북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모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분수령이 되었던 엘 알라메인 전투가 영국군의 승리로 끝난 뒤, 처칠이 했던 연설을 끝으로 오늘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승리를 '전쟁의 끝', 혹은 '끝의 시작'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시작의 끝'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Now this is not the end. It is not even the beginning of the end. But it is, perhaps, the end of the beginning.)
(7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