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의 대두와 폭주의 시작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지구 반대편인 태평양에서도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사실, 전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기보다는 먼저 전쟁 중인 것이 태평양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겠네요.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대륙침략을 가시화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독일이 프랑스를 항복시킨 1940년에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에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영향권을 동남아시아까지 확대하게 됩니다. 즉,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전부터 이미 일본의 팽창은 현재 진행형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폴란드 침공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습니다. 대신 중일전쟁을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는 거죠.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전쟁으로 나아갔는지, 그리고 그 배경들은 무엇인지를 다 설명하자면 메이지 유신부터 긴 설명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1930년대 일본 군부의 폭주에 대해서부터 다루면서 넘어가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천천히, 2차 세계대전]이라는 브런치 북의 이름대로 천천히 쉽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30년대 이전의 이야기는 별도의 짧은 글들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사실, 일본이 처음부터 이렇게 군부가 강력한 권한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청일전쟁 /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면서, 일본 국내정치에서의 정치적 위신이 올라간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긴 합니다. 그러나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로 유명한 일본의 민주주의 사회 기풍으로 인해 군부는 많은 견제를 받으면서 정부와 많은 마찰을 빚기도 했지요.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부는 점차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해군은 런던 군축 조약의 체결을 두고 정부와 많은 갈등을 빚어왔고, 심지어 야당세력과 결탁하면서 스스로를 정치적 이익 집단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 장교들이 총리공관에서 총리를 쏘아 죽이는 5.15 사건(五・一五事件) 등이 벌어지면서, 점차 군부의 발언권은 강력해지게 되었습니다.
1931년엔 만주의 관동군이 본국의 지시를 어기고 국경에서의 충돌사고를 일부러 키우면서 만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1936년에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 중심부에서 육군의 쿠데타인 2.26 사건(二・二六 事件)이 일어나면서 사회적 혼란은 더욱 가중됩니다. 물론 천황의 명령에 의해 진압되긴 했지만, 이미 일본의 정치세력에 뿌리깊이 박혀버린 군부의 권한을 모두 없애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육군을 중심으로 대륙에서의 전쟁을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1940년에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손에 넣으면서 동남아시아와 필리핀이 위협받게 되자, 미국과의 관계가 점차 험악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미국은 ABCD 포위망을 펼쳐 일본을 봉쇄하고자 했는데, 미국의 A, 영국의 B, 중국의 C, 네덜란드의 D의 앞글자를 딴 명칭이었습니다.
게다가 1941년 중순이 되면서 이러한 미-일 관계는 거의 파탄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는 미국과 일본이 각각 원하는 협상의 목표가 너무나도 달라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대륙에서의 철수와 적대행위의 중지를 원했고, 일본은 현재까지 얻은 영토의 유지를 원했습니다. 점차 평행선을 달리던 와중 미국은 결국 일본에 대해서 석유수출 금지와 미국 내 일본자산의 동결이라는 초강수로 대응하면서, 점차 불씨가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이 국가 전체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석유의 80%가 넘는 수량이 모두 미국으로부터 수입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일본에게 그야말로 사형선고와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대책마련을 위해 회의를 소집하는데, 문제는 일본 군부의 존재였습니다.
군부는 회의에서 "비축해 둔 석유가 모두 떨어지기 전 대미개전을 결행해야 조금이나마 승산이 있다"는 입장을 반복했고,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는 이러한 군부의 등쌀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실 군부가 정부를, 그것도 총리에 대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간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당시 일본의 군령권에 대한 조금의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보통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한 나라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통수권(統帥權)이 선출권력인 대통령이나 총리에게 일원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국군통수권자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요.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을 통해 군에 대한 군정과 군령권을 모두 행사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시스템일 것입니다. 여기서 군정(軍政)은 인사/보급 등 군에 대한 행정권한을, 군령(軍令)은 부대의 작전과 기동에 대한 작전권한을 뜻합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제국의 통수권은 뭔가 이상한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군정과 군령이 이원화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즉, 총리의 지휘를 받는 내각에 육군대신(=육군장관)과 해군대신(=해군장관)이 군정권을 행사하는데 반해, 군령권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천황의 직속으로 행사되었기 때문에, 군부의 세력 중에서도 이 군령부의 세력은 그야말로 '천황의 이름을 빌려' 정부도, 총리도 모두 무시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부의 불만이 폭주하기 시작하자, 군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정부는 새로운 총리대신 후보를 추천하는데, 그가 바로 육군 대장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였습니다. 그가 육군 내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활용하여 대미개전을 막아줄 것이라고 예상한 인사조치였지만, 도조 히데키가 이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의 중압감 등의 이유로 대미개전에 찬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본의 대미개전은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이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대미개전을 앞두고 벌어진 회의에서 해군 군령부 차장 이토 세이이치(伊藤 整一)는 외부대신(외교부 장관)을 향해 "개전이 결정되었으니, 앞으로 위장 외교를 통해 이를 들키지 마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개전에 반대하던 외부대신이 하다못해 "개전일이 언제인지라도 알려달라"라고 사정했지만, 군부는 "감히 천황폐하의 통수대권에 딴 말을?"이라는 반응으로 일갈했습니다.
이 회의의 결과, 12월 8일로 결정되었습니다. 회의가 종료되자마자 해군 군령부는 즉각 일본 연합함대의 항모기동부대에 전투명령을 하달합니다. 이제 함대는 극도의 보안을 유지한 상태로 미 태평양 함대의 심장부를 타격하기 위해 기동 하게 되었습니다. 무선침묵이 유지되는 극도의 보안유지 속에,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목표는 진주만이었습니다.
(11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