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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스토리 Apr 23. 2024

9부 : 300만 대군의 기습 - 소련침공, 시작되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1941년 6월 22일 새벽, 독일과 소련의 국경에는 무거운 공기가 어둠과 함께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최근, 독일군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첩보는 소련군 내부에서도 잘 알려진 소문이었습니다. 


  대규모 독일군의 이동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윽고 독일군의 모든 통신망이 조용해졌습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였습니다. 소련군은 이상징후를 눈치채고 경계령을 내렸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새벽 4시, 독일군의 중포가 적막을 깨고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수만여문의 야포가 소련군의 진지를 강타했고, 약 310만 여명의 대군이 일제히 독-소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자, 하늘엔 독일 공군의 항공기들이 하늘을 뒤덮었고, 소련군의 항공기들은 아주 운 좋은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지상에서 격파되고 말았습니다.  

소련군의 진지에 공격하기 바로 직전, 독일군 보병들이 쌍안경으로 소련군의 참호를 관측하고 있습니다. 1941년 7월 10일 촬영.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지상 단일작전인 소련침공,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이 개시되었습니다. 


300만이 넘는 독일군이 각각 북부 / 중부 / 남부집단군의 3개 덩어리로 나뉘어, 소련의 넓디 넓은 대지를 향해 돌격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4년간 벌어질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소련의 입장에서 독일군의 이러한 공격을 아예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전쟁 초기 완전히 무력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소련의 스탈린이 집무실에서 업무를 하는 모습을 찍은 선전사진. 스탈린은 그 특유의 편집증과 의심을 통해 1953년 사망할때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소련군에게 불어닥쳤던 대숙청이 남겼던 상흔이 아직도 소련군에게 심각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소련군 내부에서 종심작전 및 기동군 육성에 주안점을 두고 군 개혁을 주도하던 투하체프스키 원수 등, 유능한 장교단을 숙청함으로서 자신의 지도력을 유지,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숙청은 소련군 장교단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새로운 방식의 군대 개혁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소련군은 이러한 군 내부적 문제를 안은채로, 대규모 독일군의 침공을 받게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붉은 군대의 투하체프스키 원수. 그는 종심작전과 소련식 기동전의 개념을 창시하며 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하였으나, 스탈린의 견제로 인해 대숙청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스탈린의 편집증이 불러온 인지부조화적 행태가 보여준 인재(人災)였습니다. 소련이 세계 각지에 뿌려둔(...) 첩보망은 일관되게 '독일의 소련 침공'을 인지, 본국에 계속해서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치난 뮌헨협정에서 보여준 연합국의 미적지근함, 그리고 무슨이유에선지 버리지 못하는 독일에 대한 근거없는 믿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6월 22일 독일군이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 그 이후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인지부조화적인 이상행동을 보였습니다. 물론, 초기의 혼란이 지난 이후에 온갖 정치질(...)을 통해서 권좌에 복귀한 이후에는 그래도 조금 나아졌지만요. 

독일군 보병이 사망한 소련군의 시체를 살펴보러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뒤에는 소련군의 BT-7 경전차가 불타고 있습니다.

  세 번째, 히틀러의 도박사와도 같은 무책임한 벼랑끝 전술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독일은 지난 1차 대전에서 양면전쟁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르게 전선을 이중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스탈린의 희망사항은, 그렇게 심한 비약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벼랑끝전술은 이러한 소련의 분석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일과 소련의 전쟁, 즉 독-소 전쟁이 가지는 의미는, 이곳에서 모두 열거하기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여러가지 담론들은 차차 풀어가보도록하고, 이곳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절멸전쟁이라는 성격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히틀러는 줄창 레벤스라움(Lebensraum), 즉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을 줄곧 주장해왔습니다. 즉 동방에 있는 넓디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곳을 모두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으로 해서 민족의 생존을 도모해야한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의미에서 독-소 전쟁은 독일과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을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권에서 현재 삶을 영위하고 있는 슬라브 민족에 대한 절멸, 즉 종족의 멸종을 요구하기도 하는 매우 극단적 인종주의가 녹아져있는 담론입니다. 

독일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우측)으로부터 소련군의 전황을 보고받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중앙)의 모습. 1941년 8월 7일 촬영.

  즉, 쉽게 말해 새로운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과 생존권을 확보하고, 이를 위해 동방영토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살고있는 열등민족인 슬라브 민족의 구축을 꾀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진 독-소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 군사적 행위를 넘어서서 인종의 절멸과 학살을 동반하는 인류역사상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종족 전쟁이 될 것이었습니다. 

독일군에 의해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들의 모습. 이들은 이제 최악의 처우를 받게될 것이었습니다. 1941년 7월 7일 촬영.

  그렇기 때문에 상호 양측 모두 포로에 대한 처우가 매우 열악했으며, 포로를 살해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독일이 진주한 소련 영토에서는 소련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성범죄가 극심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독일군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매우 소수였습니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이미 독일군 내부에도 자리잡았기 때문이지요.

목에 올가미를 쓴채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는 소련 민간인들의 모습. 독일군은 슬라브 인종에 대한 증오심을 바탕으로 많은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1941년 9월 스몰렌스크에서 촬영.

  이러한 배경들 속에서, 독일의 300만 대군은 소련 국경을 일제히 침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소련군의 초기 대비상태는 매우 부실했습니다.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의 중견/고위급 장교단은 박살난지 오래였고, 제대로 된 지휘체계는 물론이고 그것을 뒷받침할 장교단의 인적수준이 매우 저조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의 전격적인 기습에 마비된 일선부대는 우왕좌왕하다가 각개격파당하기 일쑤였고, 그마나 숫적으로는 우세했던 소련 공군마저 지상에서 대부분 파괴될정도로 사태는 심각해졌습니다.

소련 중남부, 드네프르와 크림반도 사이의 해안지역에서 목표물을 향해 비행중인 독일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의 모습. 1941년 11월 6일 촬영.

  스탈린은 이러한 독일의 침공을 처음 보고받은 이후에도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다가, 이윽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독일의 침공을 부정하던 자신의 실책이 불러올 권력의 약화를 걱정해서, 개전 이후 자신의 별장으로 홀연히 떠나버리는 정치적 쇼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국가 멸망의 사태속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최고지도자를 소련 정부와 군부가 붙잡았고, 스탈린은 자신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아.. 그렇게까지 붙잡으면 내가 나서긴 해볼께!" 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권력을 유지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전황이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절망하는 스탈린의 모습. 향간에는 독일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난 직후의 모습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독일군의 키예프 함락이 목전이라는 소식을 듣고 난 직후입니다. 

  1941년 6월 22일 공세를 개시한 독일군은, 그야말로 전쟁사에 길이남을 눈부신 승리를 거두면서 나아갔습니다. 수십만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으며, 독일군의 기갑부대는 속력을 높여 계속해서 러시아의 대평원을 가로질렀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겨울이 오기전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것과 같이, 독일군은 북부 / 중부 / 남부 집단군의 3갈래로 나뉘어 진격하였습니다. 가장 북쪽의 북부집단군은 발트 3국을 지나 북해를 따라 진격, 옛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불리었던 도시인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것이 1차적인 목표였습니다. 이 계획이 완성된다면 북해에서 소련의 영향권을 모두 없애고, 핀란드와 전선을 연결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습니다.

바르바로스 작전을 개략화해서 설명한 지도자료. 북부 / 중부 / 남부집단군의 모습. 3방향으로 거대하기 나뉜 300만 대군이 일제히 돌격해들어가면서, 소련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중부집단군스몰렌스크를 거쳐 르제프를 지나 모스크바로 공격해들어가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모스크바를 점령함으로써 소련의 정치/군사적인 의지를 저하시키고,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형성된 철도망을 차단, 그들의 전시경제를 마비시키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다음으로 남부집단군은 키예프 - 하르코프를 지나 우크라이나와 흑해 인근의 남부를 강타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소련군 주력을 격멸하고, 흑해 인근으로 진출, 나아가 코카서스 지방까지의 진출을 할것입니다. 

소련의 대평야를 가로지르는 독일군 전차부대의 모습. Sd.Kfz-250 반궤도 차량이 맨앞에서 선도하려는 모양입니다. 1941년 7월 21일 촬영.

  독일군은 초기의 눈부신 승리에도 불구하고, 점차 그 진격속도가 둔화되어갔습니다. 그 이유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바로 독일군 보급체계의 한계였습니다. <전격전의 전설>의 저자 칼 하인츠 프리저가 밝힌것처럼,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보급능력을 보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프랑스 전역은 계획하지 않았지만 성공했던 전격전이고, 소련 침공은 계획했지만 실패했던 전격전'이었던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인 키예프를 점령하기 위해 대기중인 독일군 보병들의 모습. 1941년 촬영.

  독일군의 이미지와는 달리, 독일군은 대부분의 보급을 말을 통해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겨울이 오기 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프랑스 침공에서 보았던 '단기전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겨울용 물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실책까지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모스크바 인근까지 진격했지만, 겨울의 추위와 부족한 보급이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보급은 말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1941년 11월 촬영.

  두 번째는 소련의 광활한 영토와 무시무시한 기후, 지형이 독일군을 저지했습니다. 소련은 기존의 전장과는 달리 도로나 철도 등의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어있지 않아 독일군이 점령 지역을 제대로 활용하는데 문제가 있었고, 그 국토가 가지는 광활함은 그 독일군 부대들을 그야말로 흡수해버렸습니다. 점령한 지역이 넓어질수록 그 지역을 커버해야할 더 많은 부대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라스푸티차로 유명한 진창길도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땅이 녹으면서 여기저기가 모두 진창으로 변해버려 부대의 기동을 매우 저해시켰습니다. 라스푸티차를 이겨내기 위해 나무다리를 건설한 독일군의 모습. 1941년 10월

  마지막 세번째는, 소련군이 보여준 격렬하고도 비효율적인, 그러나 매우 효과적이었던 분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소련군의 지휘부와 편제가 대숙청으로 인해 제대로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병사 개개인의 투지마저 꺾을수는 없었습니다. 

레닌그라드 인근의 불타는 마을의 모습. 독일군은 초토화 정책의 일환으로, 진격하면서 이런 방화를 많이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는 많은 민간인들이 저항활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됩니다.

  마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도중 '보로디노 전투'에서 죽어가면서도 항복하지 않는 러시아 병사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는 이야기가 다시 재현되는 듯 했습니다. 소련군 병사들은 죽어가면서도 항복하지 않았고, 비록 전투에서 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버티면서 독일군에게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소련군의 분전은 한시라도 빠르게 전쟁을 끝내야하는 독일군의 발목을 붙잡아주는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독일군의 공격을 기다리며. 기관총을 조준하고 있는 붉은 군대의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의 모습. 붉은 군대는 물론 혼란스러웠지만, 병사들은 용맹했습니다. 

  독일군은 빠른 진격속도와 연전연승, 그리고 수많이 잡는 전쟁포로의 숫자에 즐거워했습니다. 폴란드가 그랬고, 노르웨이가 그랬고, 프랑스가 그랬듯이 초반에 전격적으로 승리를 거두면 알아서 무너져버릴 줄 알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키예프 인근에서 수십만명의 소련군 포로를 사로잡으면서, 전쟁의 승기는 이제 독일측으로 기우는 듯 했습니다.

독일로 향하는 소련군 포로들의 모습. 이들은 강제노역과 공장 노동자로 전환될것입니다. 수백만의 이런 포로들의 대다수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41년 10월 3일 촬영.

  그러나 한가지, 이러한 키예프 전투의 승리를 위해서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독일군 중부집단군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를 남하시켰고, 키예프 전투가 승리로 돌아간 뒤 모스크바로 다시 진격하게되면서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다는 점이 그마나 소련에게는 숨통이 트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시간 싸움이었습니다. 독일은 겨울이 오기전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것을, 소련은 겨울이 오기전까지 모스크바를 사수하는 것을 목표로 다시 혈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불타는 소련의 어느 한 마을에서, 장갑차의 보호 아래 마을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군 보병들이 뛰쳐나가고 있습니다. 1941년 6월 26일 촬영.



  독일군의 공세는 더욱 거세어졌습니다. 이제 모스크바는 바로 코앞에 있었습니다.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의 대도시, 스몰렌스크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독일군 보병의 모습. 1941년 8월 촬영.


  10월 하순, 어느 한 독일군 정찰부대는 자그마한 언덕에 서서 연신 지도를 확인했습니다. 나침반을 이용해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한 듯 그들은 이내 목에 건 쌍안경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관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쌍안경에는 아주 자그마하고 미세하게 보였습니다.


  성 바실리 대성당. 모스크바의 심장부였습니다.


(10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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