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해군의 실낱같은 희망, 잠수함!
비스마르크 이야기를 한 김에,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저평가되고 있는 전장으로 떠나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서양이었는데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주요 전장이었음에도 주목받지 못하는 비운의 무대이기도 하지요. 지구 건너편의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함대전이 자주 벌어졌던 것에 비해, 대서양은 주요 함정 간의 대규모 해전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독일 해군이 매우 매우(...) 미약한 전력이었기 때문이 당연한 결과였지요.
그런데, 독일의 해군은 대체 왜 이렇게 미약했던 것일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실 독일은 지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에 뒤를 이은 '세계 2위'의 해군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2세는 강력한 해군의 건설을 통한 세계정책을 구상했고, 이는 영국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대양함대는 영국 해군과 유틀란트 해전 등 대규모 해상전을 벌이는 등, 2차 세계대전의 독일 해군에 비해서는 굉장히 강력했지요.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이후, 연합국들은 모두 독일이 남겨둔 이 전함을 보며 군침을 흘렸습니다. 영국의 경우 유틀란트 해전에서 잃은 전함을 보충함과 동시에 타국과의 해군전력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었고, 비교적 전함이 부족했던 프랑스는 이 독일 전함을 전쟁배상의 일환으로 받아 단숨에 영국 해군과 어깨를 겨루는 해군으로 성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독일 해군의 잔존함대는 영국 해군의 감시하에 영국의 군항, 스캐퍼 플로우(Scapa Flow)로 이동하였고, 거기에 정박한 채로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될지의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굴욕을 참을 수 없었던 독일 해군의 승조원들은 함대가 공중분해되기 전, 스스로 모든 함선을 침몰시켜 버리는 자침(自沈) 작전을 계획, 비밀리에 결행하고 맙니다.
성공적인 자침작전을 통해, 독일 해군의 거대한 전함들은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침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양해군의 허망한 최후였습니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의 수준은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아주 구식의 전노급(pre-dreadnought) 전함 4척만이 보유가능했지요.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빠르게 양성할 수 있고 또 적에게 은밀하게 접근해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잠수함'에 거의 올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전함으로 이뤄진 대함대를 마련하기엔 수년, 아니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결정은 의외로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선택지가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이 결정이 영국에게 유효타를 날렸다는 표현이 적합하겠네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하던 바로 그 시기에도 이미 대서양에는 독일의 유보트 다수가 위치해 있었습니다. 전쟁 이전에도 이미 잠수함들이 정찰 및 초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이후 해상에서 전쟁발발의 소식을 전해 들은 이들은 바로 연합국의 상선을 격침시키면서 길고 길었던 대서양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서양에서의 소규모 격침이 일어나자, 영국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효과적인 대잠전력을 구비하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독일도 아직은 전쟁 초반인지라, 많은 수의 유보트를 투입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이러한 전력 공백을 틈타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독일 해군이 자침 했던 역사적 장소인 스캐퍼 플로우의 어느 늦은 밤. 이곳에 정박되어 있던 영국 전함 HMS 로열 오크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습니다.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는 군항의 혼란과 불길 속에서, 유유히 빠져나가는 돌고래 같은 형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귄터 프린 소령이 지휘하는 유보트, U-47이 스캐퍼 플로우에 잠입, 단독으로 기습 공격을 취한 뒤 무사히 복귀까지 한 이 사건은 유보트의 위력을 여실히 알려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악몽은 지금부터였습니다.
대서양의 유보트들은, 이제 새로운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름은 늑대 떼(Wolf Pack) 전술이었습니다.
늑대 떼 전술을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잠수함대 사령부에서 각각의 유보트에게 '담당구역'을 하달합니다. 하달받은 구역에서 초계임무를 수행하던 유보트는, 영국으로 향하는 호송선단을 발견할 시 단독으로 공격하지 않고 사령부에 이를 보고합니다. 해당 호송선단을 보고받은 사령부는, 근처의 모든 유보트에게 해당 사실을 통보, 떼를 지어 공격하도록 명령합니다. 이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노리면서 달려드는 늑대 떼와 같은 모습을 보여 이런 명칭이 붙었습니다.
이러한 늑대 떼 전술은, 호송선단을 발견한 잠수함이 단독으로 공격을 시도하던 기존의 방식에 비해 어마어마한 성공률과 효율성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늑대 떼 전술은 대서양에서의 영국 수송선단을 궤멸직전에 몰아넣었고, 이는 영국의 산업과 운수를 모두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국 공군의 영향력은 아직 유효했기에 독일의 수상함대 전체가 이러한 통상파괴전에 참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자, 북극해를 통과해 소련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이 편성됩니다. 이러한 수송선단을 차단하기 위해 이제 대서양 전투는 북극해까지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1941년 12월,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는 '북 치기 작전(Operation Drumbeat)', 즉 미국의 동부해안까지 유보트가 출몰하기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미국의 본토 바로 앞에서도 전쟁의 참상이 찾아왔습니다. 뉴욕 항구 바로 앞에서 불길에 타며 침몰하는 미국 상선이 발견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유보트는 이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영국의 항공기가 닿을 수 없는, 항속거리 밖의 구역은 '검은 구덩이(The Black Pit)'라고 불리는 유보트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호위 항공모함이 등장하기 이전, 이 구역의 유보트들은 연합군 항공기의 공습으로부터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유보트의 활약시기를 가리켜, 유보트 승조원들의 '즐거운 시간(Happy Time)'이라고 불렀습니다. 연합국, 특히 영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매우 어렵고 혹독한 시간이었을 테지만요.
그러나, 이러한 즐거운 시간도 곧 끝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첫 번째로는 연합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대잠전력과 항공전력을 대폭 강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연합군의 능력과 대응체계는 점차 발전해나가고 있는데 반해, 유보트는 잠수함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 벌어지는 격차였습니다. 그렇다고 유보트의 숫자가 연합군을 압도할 만큼 많지도 못했고요.
두 번째로는 연합국, 특히 미국의 거대한 산업력의 가동으로 인한 작전능력의 향상이었습니다. 미국의 조선산업은 이제 예열이 끝나(...) 그야말로 무수한 수송선과 구축함을 찍어내기 시작했고, 이밖에도 장거리 항공타격이 가능한 중형 항공기에 대한 생산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전쟁 초기의 강력한 항공력을 잃은 지 오래였고, 유보트 승조원들은 항상 공포에 질린 눈으로 대공감시를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마지막 세 번째로는, 독일 해군이 운영하던 암호기기인 '에니그마(Enigma)'의 암호해독을 이미 연합군이 완벽히 해내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유보트의 향후 작전장소에서부터, 현재 위치와 이동계획 등 모든 것들을 연합국이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이었지요. 그렇기에 독일군의 작전은 계속해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전쟁 말기로 갈수록, 유보트는 출격한다고 하더라도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엄청나게 참혹한 생존율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잠수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제독은 유보트의 출격을 지속시켰는데요,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출격을 멈출 시 대서양에 전개된 연합군의 수많은 자산들이 전부 독일로 향하게 될 것은 자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유보트는 전쟁 말기까지 출격을 지속했고, 히틀러가 죽음을 맞은 이후 후임 독일 대통령으로 임명된 카를 되니츠 제독은 해상에서 작전중인 모든 유보트에게 항복하라는 전문을 보내면서, 유보트의 길고 길었던 대서양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대격돌이 있었던, 치열했던 전투들이 즐비했던 2차 세계대전이었지만, 아마 대서양 전투처럼 그 중요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도 없을 것입니다. 종전 후 영국 수상 처칠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적은 유보트였다"라고 회고했다고 하니, 전쟁 초기 되니츠 제독이 말했던 '유보트 300척'의 계획이 완료되었다면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쩌다 보니 진행된 대서양 해전사 2부작이었습니다!
이제, 1941년 6월 22일로 다시 시계를 돌려서 지상 최대의 지상작전이자 절멸전쟁,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찾아오겠습니다.
(9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