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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휘찬 Apr 30. 2024

11부 :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다 - 진주만 기습

일본은 어떤 의도였는가?

  1941년 12월 7일, 아직 아침이 밝아오기 전의 어둑한 밤바다였습니다. 하와이로부터 불과 수십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공해상에, 널찍하게 기다린 함선들이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일본 함대를 이끄는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 제독은 공격제대를 나누고, 함교에서는 참모장교들이 저마다 바삐 움직이면서 항공기의 발진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일본 해군의 97식 함상폭격기가 항공모함 승조원들의 신호 아래 이륙하고 있습니다. 마스트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보아 쇼카쿠급 항공모함으로 추측됩니다. 

  일본 함대는 최고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하와이까지 그 정체를 들키지 않고 미 태평양 함대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본 해군은 함선에서 발생하는 연기를 줄이기 위해 연료를 경유로 바꾼 데다가, 시간차를 두고 소규모 함선을 차례차례 출항시키는 방법을 통해 함대가 출항하는 사실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했습니다. 1년 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작전보안이 완전 엉망이 돼버리기도 하지만요.


  사실 일본 정부는 고사하고, 일본 해군 스스로도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전쟁을 하려고 했던 걸까요?




  사실, 일본이 서양의 강대국과 전쟁을 벌였던 것은 아시다시피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러일전쟁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에 성공한 일본은, 부족한 경제력과 미약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서 러시아를 꺾고 승리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지요. 

  비록 육군이 뤼순 공방전 등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해군이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멸하면서 유리한 고지에서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러시아의 국내 사정이 복잡했다는 점과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이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지만, 쓰시마 해전의 승리 이후에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러일전쟁 도중, 포트 아서를 공격하기 위해 전개하는 일본군 포대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당시 일본 육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으면서 군 지휘부를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러일전쟁이 끝난 뒤 "왜 이겨놓고서도 전후 협상에서 러시아에게 더 많은 배상금을 안 받아와?"라는 불만이 일어나기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정도로 당시 일본 국민들은 러일전쟁 당시 국가가 선전한 "서구열강에 대한 승리"라는 프로파간다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고, 이러한 프로파간다에서 자라난 세대가 군부의 주요 세대가 되고 나서,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할 때 이 시기의 기억이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민중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실제로는 겨우겨우 이긴 러일전쟁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해서였지요. 

  즉, 서구열강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해전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승패를 결정짓고 유리한 조건에서 (승전과도 비슷한) 협정을 맺었던 이 기억의 연속선상에서, 일본은 다시 한번 미국과의 해상 결전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 태평양 함대를 불시에 기습하여 전력을 약화시키고, 러시아 발틱함대처럼 미국의 함대가 일본 근해로 공격해 올 시 점진적으로 이 전력을 야금야금 약화시키다가, 주요 지점에서 해상결전을 벌여 승리한다는 계획이 수립된 것입니다. 이를 점감요격작전이라고 합니다. 

쓰시마 해전 당시 모습을 그려낸 기록화. 일본은 어렵게 풀어가던 전쟁을 이 해전 한 번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이후 러시아는 국내문제 등의 이슈가 겹치면서 협상테이블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은 혁명전야의 러시아처럼 국내 정치가 불안정하지도 않았고, 경제력 부분에 있어서는 그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체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작전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나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던 것이죠. 물론 국가의 문제를 전쟁으로 해소한다는 그 판단 자체에서부터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요.


  어찌 되었던, 이런 기조에서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결행하였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12월 7일 미명, 일본군 항공모함에서 하나둘씩 항공기가 이륙하기 시작합니다. 진주만 상공에서의 제공권을 책임질 전투기들, 그리고 지상/해상에 있는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폭탄과 어뢰로 무장한 폭격기 / 뇌격기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들은 고요한 하와이의 바다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목표물을 향해 비행했고, 낙오되는 항공기 없이 일요일 아침의 진주만 상공에 도달하였습니다. 

12월 7일 아침, 일본 항공모함 '쇼카쿠'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일본군 항공기 부대의 모습. 이들의 목표는 미군의 주력함을 찾아 격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의 진주만은 매우 고요했습니다. 일본군 항공기 부대는 고요한 진주만 상공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함대에 '기습성공'이라는 무전을 날렸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습이었습니다. 물론 미군부대에서 이러한 일본군 항공기를 레이더로 식별하긴 했지만, 마침 같은 날 / 같은 방향에서 진입하기로 한 B-17 폭격기 부대로 착각하고 경보를 울리지 않았습니다. 불운이 겹친 결과였습니다.

진주만 공습 불과 두 달 전인 1941년 10월 경 촬영된 진주만의 항공사진. 얕은 수심에 좁은 수로의 지형적 특징을 가진 진주만은, 사실 항공기로 공격하기엔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당시 진주만의 미군은 이러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습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폭발이 계속되자 비로소 전열을 가다듬고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해군 항공기들이 낮게 비행하며 폭탄과 어뢰를 뿌려대자, "일요일 아침에 뭐 이렇게 훈련을 요란하게 하는 걸까?"라고 생존자들이 회고할 정도로 완벽한 기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미군 항공기는 지상에서 파괴되었습니다. 상공에 나타날 미군 수비대의 항공기들과 공중전을 벌여야 할 일본 해군 전투기 부대들도 할 일이 없어져 지상공격에 참가하였고, 미군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대공사격을 반복하면서 처절하게 대응했습니다.  

일본군 항공기에서 촬영한 공격 직후의 진주만의 사진. 저 멀리 물기둥이 솓아오르고 있고, 공격을 시도한 항공기가 현장을 이탈하고 있습니다. 전함들이 줄지어 정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예상과는 달랐던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 해군의 항공모함의 존재였습니다. 항공모함을 1순위로 공격하기로 했던 계획과는 달리 진주만 내에서 항공모함이 보이지 않자, 즉각 2순위 목표, 미 해군의 전함을 향해 폭탄의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공격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대폭발과 함께 거대한 전함이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USS 애리조나(Arizona)의 탄약고가 유폭 되어 어마어마한 대폭발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천 명이 넘는 승조원들이 순식간에 함 내에서 전사했습니다.

USS 애리조나는 구식전함이었지만, 어엿한 주력함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유폭으로 인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그래도 침몰하고 맙니다. 아직도 이 잔해는 진주만에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공격이 계속되었다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아마 공격을 모두 마친 일본군 항공기들이 무장과 연료의 문제로 되돌아간 모양이었습니다. 미군은 이때 사망자를 수습하고 화재를 진압하는 등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지만, 1시간 뒤 다시 하늘엔 일본군 항공기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2차 공격대가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USS 쇼어(Shaw)가 일본군의 공습으로 폭발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2차 공격대의 폭격 또한 1차에 못지않게 매우 위력적이었습니다. 

  2차 공격대 또한 파상공세를 펼치면서 미국 함대를 공격했고, 미 함대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으면서 궤멸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게 됩니다. 몇몇의 전함들은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도 함체를 움직여 좁은 수로를 통해 넓은 바다로 탈출하려고 했고, 이렇게 움직이는 전함을 향해 바다 위에 떠있는 생존자들도 환호성을 지르면서 응원하였습니다. 

불타고 있는 USS 웨스트 버지니아의 화재를 진압하는 미군의 모습. 이러한 전함들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의 수리를 거쳐 복수를 위해 다시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모든 공격이 끝났습니다. 미 태평양 함대의 본진인 진주만은 그야말로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전함 8척과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항공기 200여 대가 침몰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3,500여 명의 미군이 전사하면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12월 7일을 기억하라!"라고 외치고 있는 미국의 포스터. 진주만을 잊지 말자는 표어는, 태평양 전쟁 내내 미국의 슬로건이었습니다. 

  일본은 이 기습작전의 대성공에 환호했습니다. 미 태평양 함대를 거의 궤멸상태에 몰아넣은데 반해, 자신들은 약 50여 대의 항공기를 잃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성공적인 기습이었습니다.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참모장교들은 진주만의 항구시설과 유류 저장 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3차 공격대를 발진시킬 것을 건의하지만, 나구모 제독은 이를 일축합니다. 3차까지 가게 되면 미국이 정신을 차리고 대응할 텐데, 만약 이때 함대에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일본 해군 항공모함 쇼카쿠에서 항공기들의 발진을 바라보면서 지휘하는 일본 해군 지휘관의 모습. 1941년 12월 7일 공습 당일 아침에 촬영됨.

  실제로 미군은 진주만 기습 이후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던 유류 저장 시설과 항구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빠른 템포로 태평양 지역에 대한 해군력 투사를 가능하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원래 진주만에 입항하기로 하였다가 일정문제로 입항이 늦어지면서 천운으로 살아난 미 항공모함 USS 엔터프라이즈는 이제 미 태평양 함대의 상징이자 주력함으로 일본에 대한 반격을 주도할 것입니다. 

진주만 기습을 당한 이후,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루즈벨트 미 대통령의 모습. 이날의 연설은 치욕의 날 연설(the day of infamy speech)로 불리는 명 연설입니다.

  게다가 선전포고 없이(정확히는 있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뤄진 이 기습은 미국 내 여론을 참전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고, 이렇게 해서 잠자는 거대한 사자,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공식적으로 참전하였습니다. 동맹국인 일본이 선전포고를 받은 것에 대해, 독일의 히틀러는 뜬금없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이제 진정한 의미의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모스크바의 코앞까지 당도했고,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켰습니다. 


이제, 전쟁의 향방이 바뀌어야 할 1942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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