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점령, 그 향방은?
1941년 6월 22일 시작된 소련 침공도 어느새 수개월이 지나고, 개전 초기 소련군의 대규모 붕괴는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듯했습니다. 독일군은 빠르게 진격해 나갔고, 주요 도시들의 저항은 분쇄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병사들의 분투와 애국심, 그리고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추워지는 기후가 침략자들을 둔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목표를 부여받았던 중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의 소련군 주력을 격멸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던 방향에서 유턴, 남쪽의 키예프 방면으로 내려가 격전을 치렀습니다. 중부집단군의 구데리안은 훗날 이때 모스크바로 그냥 바로 들어갔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회고하였지요. (상상은 자유!)
그럼에도 소련군은 저항을 계속했고, 이는 특히 모스크바 근교로 다가설수록 더욱더 격렬해졌습니다. 소련군의 입장에서도 모스크바는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는 수도였기 때문이었지요. 특히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모스크바에 남기로 결정되자, 이러한 모스크바 방위의 준비는 더욱 철저해졌습니다. 국민적 사기가 올라간 것은 당연했습니다.
1941년 10월이 되자, 독일군도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인 뱌즈마 등지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을 포위섬멸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으나, 소련군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소련군은 독일군이 벌이는 학살에 대해 알게 되면서, 개전 초기 무기력하게 포위당한 뒤 수십만 명 단위로 항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일 중부집단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독일군 수뇌부는 북부집단군의 제4기갑군을 중부집단군에게 배속, 증강시키면서 모스크바 함락을 위한 최후 공세 작전을 입안합니다. 작전명은 '태풍'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도 계속해서 전진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점차 독일군은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점차 날씨가 쌀쌀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기간을 약 10주 이내, 즉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낸다는 단기전 목표를 가지고 전쟁에 돌입한 나머지 병사들에게 지급할 동계 장비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11월 말에 접어들면서, 독일군은 더욱더 강해진 추위에 전투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습니다. 각종 장비와 차량의 윤활유가 얼어붙으면서 시동을 거는 것조차 어려웠고, 전투기들은 엔진을 녹이는 데에만 어마어마한 연료를 소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활유조차 겨울용 윤활유를 챙겨 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병장비였는데, 독일군의 절반이 넘는 인원들이 여름 피복을 입고 있었었습니다. 그래서 소련군 전사자를 발견하면 가장 먼저 한 행동이 그들이 입고 있던 겨울용 피복을 챙기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2월 5일, 독일 중부집단군에는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소련군의 계속되는 격렬한 저항과 추운 겨울날씨, 그리고 독일군의 부족한 보급체계가 함께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모스크바에서도 포성과 독일 공군의 폭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붉은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펼친 소련군 부대들은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었습니다. 게다가 소련의 스파이들이 제공한 첩보에 따르면, 일본은 12월 경 미국을 공격을 예정이며 소련과의 전쟁을 할 기미는 없었습니다. 소련은 이에 극동 지방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수십 개의 사단들을 제외하고는 유럽으로 전력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모스크바의 시민들이 동원되어 1941년 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독일군의 혹시 모를 진격을 막기 위해 도시의 주변에 대전차 장애물과 참호를 설치하는 작업이 실시되었습니다. 모스크바는 이제 최전선 도시로서의 방어 작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날카로운 초기 공세를 겨우 버텨내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벽에서 발끝으로 가까스로 버텨낸 승리였습니다. 이제 기후와 숫적우세를 바탕으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준비해야 할 때였습니다. 소련군의 1차적인 목표는 바로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출한 독일군 교두보를 모두 제거하고, 최대한 모스크바에서부터 멀리 떨쳐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장군은 반격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독일군이 진군을 멈춘 것을 호기로 포착한 주코프는, 소련군 부대에 일제히 반격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물론 소련군도 이때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추위가 계속되고 있었던 점 등의 한계점은 있었으나, 소련군은 그나마 윤활유나 피복, 장구류를 동계용을 가지고 있었기에 독일군과 비교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코프 장군의 지휘 아래,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잘 준비된 동계장비로 무장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틈새로 파고들면서 공세행동을 개시했고, 독일군은 치열하게 전선을 사수하면서 버텨냈습니다. 독일군은 계속해서 소련군에 비해 우세한 교환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독일군 1명이 전사할 때 소련군은 4명이 전사하는 비율을 유지한 것이지요.
그러나 독일군은 소모한 만큼의 보충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데 반해, 소련군은 소모한 것만큼, 혹은 소모한 것은 넘어서서 점차적으로 피해를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 수뇌부 프란츠 할더 장군이 말했던 "소련의 12개 사단을 전멸시키면, 그다음 주에 새로운 소련군 사단 12개가 전선에 나타난다"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숫적우세를 바탕으로, 광정면에서 독일군에게 동시에 접촉함으로써 독일군의 예비병력을 소모시키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독일군은 이제 거꾸로 소련군의 파상공세에 직면하게 되었고, 제대로 된 보급도 받지 못한 최일선의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에 각개격파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히틀러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히틀러를 설득한 독일군 지휘부는 150km나 후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련군도 아직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고, 독일군도 나름대로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고 했던가요, 독일 공군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항공작전을 통해 제공권을 확보함으로써 소련군의 전투력을 저하시켰고, 소련군도 많은 피해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전선조정을 완료한 독일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재반격을 시도하면서, 소련군의 공세도 차츰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소련군의 반격마저도 1월 중순 멈추면서, 모스크바 전선에는 일시적인 소강상태가 찾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 인근의 르제프에서는 독일군이 주둔한, 소련군 진지 쪽으로 튀어나간 돌출부가 형성되게 되었는데, 이는 소련군에게 두고두고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향후, 가장 유명한 방어 및 철수작전인 '들소 작전'의 주무대가 되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일단 지금은, 모스크바 앞에 남은 독일군의 마지막 교두보 정도라고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독일군과 소련군은 이제 서로 다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지점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광활한 소련의 대지에서, 어마어마한 길이의 전선에 수백만의 대군이 서로 대치한 상태가 유지되었습니다.
무작정 모스크바로 달려오면서 전력이 소모된 독일군과, 가까스로 모스크바를 지켜내면서 수많은 희생을 거둔 소련군 모두 더 이상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1월이 넘어가 계속되는 혹한도 양측의 행동을 멈추는 좋은 동기가 되기도 했구요.
이런 일시적인 소강상태에서도, 양측은 빠르게 다음 수를 준비합니다. 다시 날이 풀리는 봄이 오면 모든 도로가 진창이 되어버릴 테고, 그다음인 여름이 되면 다시 거대한 전쟁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독일군은 이제 모스크바 점령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단기전으로는 도저히 전쟁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독일군은 이제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남부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자원과 더불어 캅카스 지역의 유전 지대를 확보해야만 장기화되는 전쟁에서 유리할 테 였습니다. 소련군도 이에 맞서 독일군의 새로운 여름공세를 대비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독일군의 1942년 하계 공세가 다가올 차례였습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한 대신, 이제 방대한 자원이 기다리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지역으로 혈전의 전장이 옮겨간 것입니다.
(1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