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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휘찬 May 07. 2024

13부 : 지옥도가 펼쳐진 도시 - 스탈린그라드 전투!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1942년 봄의 전황 : 라스푸티차, 그리고 르제프 공방전의 시작


  1941년에서 194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혹한은 독일과 소련 모두에게 가혹한 시기였습니다. 독일군은 6월부터 모스크바를 내달려왔음에도 추위와 소련군의 저항으로 인해 모스크바 함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소련군의 경우에도 모스크바를 사수하긴 했지만 수백 명의 인명피해와 국토의 망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양측 모두 상대방에게 결정타를 날리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러나 1942년의 봄이 찾아오자,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라스푸티차(rasputitsa), 러시아의 유명한 진흙탕이 생겨나면서 양측 모두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라스푸티차의 흔한 풍경. 진흙 뻘밭이 만들어낸 진창은 독일과 소련 모두에게 이동의 제약을 걸었습니다. 트럭의 뒤편에, 독일의 티거 I 전차도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모스크바의 코앞에 돌출되어 있는 독일군의 교두보, 르제프를 둘러싼 르제프 공방전(Battles of Rzhev)이 백미였습니다. 소련은 이 돌출부를 제거해서 작게는 모스크바의 안전을, 크게는 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싶어 했습니다.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소련도 이미 많이 지쳤으나, 많은 수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공세를 시작했고, 이 지역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독일군도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르제프 전투의 상황도. 보라색 부분이 바로 소련군이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회복한 지역입니다. 좌측 상단, 르제프 지역에 툭 튀어나온 부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는 지도입니다

  독일군은 르제프 방어를 맡은 독일 제9군의 사령관을 발터 모델(Walter Model) 장군으로 교체하고, 참모장으로는 한스 크렙(Hans Krebs) 대령이 부임하였습니다. 모델 장군은 방어전의 사자(Abwehrlöwen)로 불릴 정도로 방어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고, 크렙스 대령은 그런 그를 보좌하는 인간적이며 헌신적인 장교였습니다. 여담으로 크렙스는 독일의 마지막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으니, 능력면에서는 확실했습니다.

 

최전선을 시찰하는 발터 모델 장군의 모습. 발터 모델은 불같은 성격의 현장지휘관으로, 항상 최전선을 시찰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매우 엄했지만, 최고의 방어전 지휘를 보였습니다.

  독일의 이런 인사명령은, 르제프 돌출부를 사수하기 위한 의지표명이었습니다. 소련군은 르제프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발터 모델의 뛰어난 방어전술과 독일군의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1942년 7월엔 르제프 남단으로 진출한 소련군 39군을 오히려 수세상황인 독일군이 포위섬멸하는 '자이들리츠 작전(Operation Seydlitz)'의 성공으로 인해 독일군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르제프 공방전 당시 경계를 서면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소련군 보병들의 모습. 이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기동전에서 독일군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중부의 판세가 이렇게 서로 카운터 펀치를 날린 채로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점차 무대는 우크라이나와 남부지대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6월 28일, 독일군의 하계 남부공세, 청색 상황(Case Blue)이 발령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르제프 공방전 당시의 독일군 보병들의 모습. 혹한이 끝나고, 러시아에서의 2년 차가 되었습니다. 끈질긴 방어전을 펼친 끝에, 이들은 르제프 돌출부를 지켜내는 데 성공합니다.




독일 남부집단군의 하계공세 : 청색 상황 발령


  1942년 독일군의 하계공세는 지난번과는 달리, 주요 공격목표를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남부와 캅카스 유전지대로 변경하였습니다. 이는 독일군이 단기전으로 소련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음과 더불어,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고도 승리하지 못했던 나폴레옹의 사례를 참고했다고도 보여집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와는 달리 당시 모스크바는 모든 열차운송 시스템과 경제 시스템의 중추였기 때문에, 점령했다는 또 어땠을지는 미지수였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캅카스의 자원, 특히 석유는 장기전을 대비해야 하는 독일군으로서는 반드시 탈취해야 하는 주요 목표였습니다.

청색 상황을 그린 지도의 모습. 독일군은 흑해와 캅카스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이 자원지대를 이용하여 장기화된 전쟁의 활용될 자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비록 겨울의 혹한으로 인해 주춤했지만, 재정비를 마친 독일군은 역시나 강력했습니다. 게다가 마침 소련군은 모스크바의 함락을 우려해 주요 부대들을 모스크바 쪽으로 보냈던 것과 맞아떨어져, 독일군은 엄청난 속도로 소련의 남부 대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처럼 어마어마한 속도의 독일군은 소련군을 강타했고, 이윽고 흑해를 끼고돌아 캅카스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가 캅카스 지역으로의 공세를 계속해서 독려했던 이유. 바쿠 지역의 유전지대 모습이었습니다. 항상 부족한 연료는 독일군을 전쟁 내내 괴롭히는 요소였습니다.

  독일군 A 집단군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이윽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옐브루스(Elbrus)에 나치의 깃발을 꽂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캅카스와 바쿠의 유전지대는 독일군의 손아귀에 떨어질 일만 남은 것처럼만 보였습니다. 저 옛날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 대가로 묶여 형벌을 받았다는 전설의 산을 정복한 독일군의 모습은 여러 선전매체에서 활용되었습니다.

유럽의 최고봉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꽂기 위해 이동하는 독일 산악부대원들의 모습. 이들의 사진은 캅카스 지역의 진출을 상징하는 선전용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러한 A집단군의 측면을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해, B집단군은 볼가강 유역의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볼가강 유역의 중요한 도시를 확보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하였고, 그 도시의 이름은 바로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였습니다.

A집단군(초록색)이 남쪽의 바쿠와 그로즈니까지 가기 위해서는 B집단군이 북쪽측면을 견고히 확보, 사수해주어야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하기 위해 공군의 폭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 덕분에 스탈린그라드는 폐허의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렇게 형성된 폐허는 방어자인 소련군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은신처를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소련군은 이런 시가지를 활용하여 끈질기게 독일군에게 저항했고, 독일군도 이에 질세라 더 많은 병력을 스탈린그라드에 투입하면서 전투는 점차 혈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폐허가 돼버린 도시로 진입하기 전, 독일군 보병들이 참호너머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모든 건물의 현관과 계단, 복도에서 소련군 병사와 마주칠 것입니다.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강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기갑부대와 공군의 합동작전, 그리고 뛰어난 장교단의 기동전 전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에서는 그러한 독일군의 강점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곳이 전장이었습니다. 계단, 지하철, 다락방, 아파트 복도, 기차역, 공장 등, 그저 소련군과 독일군이 1명의 인간으로서 싸워나가야 하는 지옥도가 펼쳐졌습니다. 

왼쪽의 독일군이 지닌 기관단총의 총신 윗부분이 뚫려있습니다. 오른쪽과는 다르게 말이지요. 이는 탄창을 다 비웠다는 뜻으로, 치열한 교전 중임을 알 수  있는 사진입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는 더 이상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원래라면 A집단군의 캅카스 지역 확보를 도우면서 볼가강 유역의 수운로를 확보하는 과정으로서 진격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스탈린그라드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름 자체가 '스탈린'이 들어갔기 때문에 양측 독재자들이 이를 의식했다고도 보입니다.

폐허가 된 시가지를 낮은 자세로 빠르게 통과하고 있는 소련군 보병들의 모습. 이들은 시가지를 최대로 활용하여 독일군을 상대로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소련군은 이러한 강약점을 잘 파악하였고, 분대 단위로 나누어 독일군과의 근접전을 벌였습니다. 소련군은 이를 '껴안기'라고 불렀는데, 독일군은 이러한 전술에 말려들어가 강점인 제병협동을 하지 못하고 그저 개인과 개인으로 결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도 이제 지지 않고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함으로써 점차 소련군은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최악의 시가전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상징과도 같은 중앙광장의 분수의 모습. 손에 손을 잡고 정겨워하는 동상들의 사이로 보이는 전쟁의 폐허가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1942년 10월 중순이 넘어가자, 독일 제6군이 승기를 잡았습니다. 소련 62군은 점차 볼가강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도시의 대부분은 독일군의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소련군은 계속해서 볼가강 너머의 스탈린그라드로 보급품과 보충병을 집어넣었지만, 이미 어마어마한 피해가 동반되어 계속된 작전을 수행하기에 어려웠습니다. 독일군은 거의 다가온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를 만끽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소련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압도적인 공군과 전차부대를 앞세우면서 도시지역에서 점령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전차도, 공군도 소용없는 하수구, 계단에선 여전히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은 더 큰 국면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뒤집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만 매몰되어 버린 독일군과는 달리, 그 큰 국면에서...




소련군의 포위 기동작전의 시작 : 천왕성 작전

  

  

소련군 천왕성 작전의 작전도. 스탈린그라드에만 집중하던 독일군의 허를 찔러, 스탈린그라드의 북쪽과 남쪽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쳐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는 계획이었습니다

  1942년 11월 19일, 스탈린그라드의 남쪽과 북쪽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포병 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약 100만의 소련군이 양측에서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고, 스탈린그라드의 인근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의 동맹군인 루마니아군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 집중하느라 주변의 독일군 부대 대부분을 스탈린그라드에 몰아넣은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작전개시 3일 뒤인 22일, 남단과 북단의 소련군이 만나면서 스탈린그라드 포위가 완성되었습니다.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포병전력의 핵심이었던 카츄샤 로켓의 발사모습. 그 발사소음과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는데, 그 때문인지 '스탈린의 오르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독일군은 이제 거대한 전환점에 섰습니다. 자신들이 소련군을 상대로 자주 써먹던 기동포위전술을, 조금은 서툴렀지만 소련군이 성공해냄으로서 한 방 먹은 것입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 장군은 서둘러 스탈린그라드를 중심으로 방어진을 형성하였고, 독일군은 포위당한 6군을 위한 항공수송작전을 수립하는 등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갔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포위를 완성한 소련군도 가만있지 않아, 계속해서 스탈린그라드와 독일군의 간격을 넓히면서 포위망을 두껍게 하는 시도를 계속했습니다.

독일군의 점령지를 포위하며 경계하고 있는 소련군 보병의 모습. 독일군과는 달리 월동장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풍부한 보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만일 방어전을 계속하다 가망이 없을 경우, 6군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지만, 히틀러는 이를 계속해서 무시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어떻게든 버텨내야만 했습니다. 항공수송도 힘에 부치게 되는 시점에서, 독일의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투수가 등장하였습니다.




만슈타인이 온다! : 독일군의 구출작전, 겨울폭풍 작전 개시!

브란덴부르거(좌측, 안경착용) 장군과 함께 대화중인 만슈타인(우측, 약모착용)의 모습. 기동전의 대가인 만슈타인의 구출작전만이 독일군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 침공에서 뛰어난 기동작전을 입안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구원투수를 등판시켰습니다.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부여받은 임무를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스탈린그라드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돈 집단군은 실제로 명칭만 집단군이지, 사실은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서 패주해온 부대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미약한 전력이었습니다. 

1942 - 43년 겨울 전역 도중 촬영된 독일군 4호 전차의 기동 모습. 겨울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그라드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은 빠르게 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유일한 희망은 만슈타인뿐이었습니다. 만슈타인은 즉각 공세작전을 입안하고,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기 전 구출하기 위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겨울폭풍작전(Unternehmen Wintergewitter)이 개시되었습니다.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기동하고 있는 독일군 전차부대의 모습. 겨울폭풍 작전의 주역은 단연코 독일군의 기갑부대였습니다.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은 돌파작전을 개시하였고, 독일군 제6 기갑사단은 소련군 제2 친위군의 중심부를 타격, 궤멸시켰고 뒤를 이어 17, 23 기갑사단이 돌파하여 이들을 격파하였습니다. 만슈타인의 대담한 공격이 빛을 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련군도 이에 대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만, 의외로 루마니아 제4군이 독일군의 측방을 보호해 주면서 독일군은 안심하고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겨울폭풍작전의 성공적인 돌파로, 스탈린그라드에는 일말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설원을 돌파하는 독일군 돈 집단군의 성과는 다시금 주도권을 찾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12월 20일, 드디어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로부터 50km 지점까지 돌파해 들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지쳐버린 6 기갑사단의 뒤를 이어 제23기갑사단이 선봉의 임무를 부여받아 공세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때즈음,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군 병사들도 남서쪽 밤하늘에서 번쩍거리는 불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뒤이어 밤하늘을 가르며 들려오는 은은한 포성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만슈타인이 온다!' 이 포성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군에게는 달콤한 구원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의 이러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점차 전황은 나빠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각지의 소련군은 계속해서 독일군을 훨씬 상회하는 숫자로 보충되기 시작했습니다. 만슈타인은 파울루스에게 연락하여, 지금 6군이 즉각 돈 집단군의 돌파구 방향으로 탈출하라는 의도를 보냈지만, 파울루스는 거절했습니다. 그로서도 긴 포위기간 동안 지치고 다친 병사들로 50km나 가까운 돌파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군 수송이 Ju 52가 포위된 스탈린그라드를 위해 항공수송작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6군의 필요한 양의 절반 가까이만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12월 22일,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 35km 지점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한계였습니다. 측방을 엄호해 주던 루마니아 4군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돌파구내의 기갑사단 사이사이에 소련군이 밀려들어와 혼전이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견딜 수 없었던 돈 집단군은 그동안의 진격이 무색하게도 100km 후방의 진지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독일 6군의 병사들이 학수고대하던 크리스마스이브, 12월 24일의 밤하늘은 매우 조용했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최악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독일군 보병들이 잔해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만슈타인의 구원이 온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일터였습니다.

  소련군은 이제 천천히 스탈린그라드를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남아있는 독일군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1943년 1월 30일, 스탈란그라드 포위망의 지휘관인 파울루스에게 '원수 진급'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지난 프로이센으로부터의 전통으로 비추어볼 때, 단 한 명도 항복했던 원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히틀러가 내리는 비공식적 자결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그러한 히틀러의 기대를 따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독일 제6군의 항복, 그리고 뒷 이야기..

소련군에게 항복한 파울루스. 그러나 그는 처음에 항복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로잡힌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윽고 북부와 남부에서의 전투가 끝나자, 이윽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1월 31일, 그는 스탈린그라드의 어느 백화점 지하실에 마련된 그의 '사령부'에서 소련군에게 사로잡힙니다. 이후 2월 3일이 되자, 스탈린그라드에서 조직적인 저항은 모두 종료되고, 그저 각개부대에 의한 몇몇의 저항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끝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약 30만 명의 독일 제6군 중 살아남아 소련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힌 것은 9만여 명에 불과했으며, 이들 또한 소련의 험난한 포로 생활을 견뎌야 했습니다.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모습. 이들은 이제 포로수용소에서 더욱더 험난한 나날들을 보낼 테지만, 공식적으로 그들의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남부집단군의 주력이자 풍부한 경험을 지닌 베테랑 부대였던 제6군이 그야말로 증발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제 후방이 위험해진 A집단군 또한 캅카스 지역에서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고, 독일군은 몇 달 만에 다시 캅카스 지역에서 모두 철수,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기세 등등한 소련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끝까지 추격하였습니다. B집단군은 그로기 상태였고, A집단군도 전면적인 철수작전으로 인해 혼란을 야기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여유도 없이 그저 밀려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 혼란의 와중에도 반격의 칼날을 벼리면서 소련군이 더 깊숙이, 더 많이 치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련군의 저승사자, 만슈타인 장군이었습니다.



(1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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