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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휘찬 May 09. 2024

14부 : 사상 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 전투!

한여름의 대평원에서 벌어진 강철의 무덤

스탈린그라드의 승리가 불러온 처참한 참패


  스탈린그라드의 패배 이후, 남부 지역의 독일군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려버린 쥐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독일군의 정예부대인 제6군이 거의 전멸상태였고, 스탈린그라드에서도 30만 명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습니다. 캅카스를 겨우 빠져나온 A집단군의 전력도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소련군은 이 호기를 놓치지 않았고,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주요 도시인 하르코프로스토프가 함락되고, 이윽고 남부집단군의 사령부인 도시인 자포로제까지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오죽하면 전선을 시찰하러 항공기를 타고 자포로제의 남부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가 직접 포성을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협이었습니다. 남부집단군의 붕괴가 코앞이었지만, 만슈타인은 오히려 역습을 생각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기다렸습니다. 히틀러의 히스테릭한 신경질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은 기동예비를 꽁꽁 감춰두었고, 호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호기란 바로 소련군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르는 시점이었습니다. 공격작전은 많은 보급품과 전투력을 필요로 합니다. 계속해서 공격을 계속하는 군대는 언젠가 보급과 재보충을 위해 공세를 멈춰야만 하는 시기가 다가오는데, 이를 군사용어로 공세종말점이라고 합니다. 

독일군의 3호 돌격포와 장갑차 뒤로 빠르게 은엄폐하고 있는 독일군 보병. 하르코프 시가전은 꽤나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소련군의 무전에서 보급품을 요청하는 무전양이 많아지고, 움직임이 점차 둔화되자 만슈타인은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비록 5대 1의 숫적열세였지만, 독일군은 소련군에 비해 잘 보급되었고 기계화되어 있었습니다. 만슈타인이 3개의 기동집단을 즉각 소련군의 후방으로 기동시 키면서 소련군을 분단시켰고,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소련군은 그대로 뒤통수를 맞고 역으로 포위섬멸당해 버리게 됩니다. 그 유명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바로 이 전투이지요.

하르코프 시내로 진입하는 독일군 전차병과 그 주변에 탑승한 보병들의 모습. 비록 스탈린그라드의 뼈아픈 패배가 있었지만, 아직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소련군은 순식간에 2개 야전군 규모의 부대가 증발되었고, 독일군은 다시 전선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함과 동시에 주요 도시인 하르코프를 다시 탈환하였습니다. 이렇게 처절하고도 추웠던 1943년 3월이 끝나고, 독일과 소련은 모두 다시금 숨 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하르코프의 시가지 도로 한편에서 위치한 독일군의 티거 I 전차의 모습.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보여준 독일군 전차부대의 기동역습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양측 모두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다음번 전장이 어디가 될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분석에 나섰습니다. 독일과 소련의 참모장교들 모두, 이번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으로 인해 형성된 소련군의 돌출부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돌출된 지역의 이름은 바로 쿠르스크(kursk)였습니다. 




쿠르스크로 모여드는 수백만의 병사들과 수천 대의 전차들


  독일군은 이 쿠르스크 돌출부에 대한 새로운 공격작전을 계획합니다. 이 돌출부를 제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소련군 주력을 포위섬멸함으로써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고, 두 번째는 튀어나온 전선의 길이를 단축해 병력을 보존, 예비병력으로 돌릴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침공 3년 차, 독일은 이제 서서히 넓은 전선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동부전선 전체에서 쿠르스크 돌출부의 위치와 모양. 독일군 측으로 튀어나온 이 돌출부는 양측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제공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돌출부를 남과 북, 두 방향에서 거대한 집게발처럼 동시에 공격하여 소련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소련군 또한 이 쿠르스크 지역에 대한 중요성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전력을 이 돌출부에 집결시켰습니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방어시설을 건설, 설치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방어전을 펼치며 독일군의 전력이 약화되면, 그때를 노려 반격에 나설 요량이었습니다.

쿠르스크 돌출부에 대한 독일군(적색)의 공격계획.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과, 클루게 장군의 중부집단군이 각각 남과 북에서 동시에 집게발 역할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최초에 공격 계획은 6월 중순으로 정해졌습니다. 물론 이 작전을 강하게 주장한 만슈타인은 더 빠르게 5월에 주장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지난번 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호되게 당한 소련군이 전력을 보충하기 전에 기세를 몰아 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더 많은 전차부대를 끌어오기 위해 계속 작전을 연기했고, 최종적으로는 7월 5일이 이 작전의 개시일로 정해졌습니다. 작전의 이름은 성채작전(Operation Citadel)이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끈 대신, 계속해서 전력을 보충한 독일군은 약 90여만 명의 병력과 3천여 대의 전차를 집결시켰습니다. 아예 가용한 거의 모든 전력과 최신 전차를 모두 동원했고, 히틀러는 승리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련군의 보충속도가 독일군의 보충속도보다 거의 두세 배에 가깝게 빠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군이 이 돌출부에 집결시킨 병력은 병력 170만에 약 6천여 대의 전차였습니다. 




작전개시 : 독일군의 창이냐, 소련군의 방패냐!


  7월 5일 이른 아침, 독일군의 전선에서 어마어마한 포병사격과 함께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소리를 신호로 독일군은 자신들의 진지에서 뛰쳐나와 돌격했습니다. 드디어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미 소련군이 이곳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지라, 독일군은 강력한 화력과 더불어 최강의 전차부대를 선두로 이 방어진을 정면에서 열어젖힐 요량이었습니다.

작전개시 전, 전차장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는 보병들의 모습. 보병과 전차의 협동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최고의 전술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이 개전 초기의 영광을 재현하러 날아올랐지만, 소련 공군이 하늘에 등장해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소련 공군은 많은 희생을 밟고 이뤄낸 경험을 통해 이제 독일 공군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고, 게다가 숫적우세가 더해져 더 이상 독일군은 완벽한 제공권 확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돌격해 오는 독일군 전차에 대항하여 포탄을 쏘고 있는 소련군 대전차포의 모습. 소련 병사들은 굳건히 독일군의 맹공에 대항하였고, 전투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일군은 어마어마한 소련군의 벙커와 지뢰밭, 포병사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5km 정도를 돌파했을 뿐이었고, 작전 목표 달성까지는 너무나도 먼 시점이었습니다. 특히 북쪽의 중부집단군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는데, 소련군의 거대한 종심방어 진지에서 독일군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소모'되었습니다. 독일군 전차가 소련군 전차 5대를 격파하면, 그다음엔 6대의 전차가 새로 나타났습니다.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예비대를 후방에 편성해 두었던 것입니다. 

  중부집단군은 엄청난 피해율에 경악하였고, 히틀러의 공격 지속 명령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판단으로 공세를 중지합니다. 소련군이 구축한 어마어마한 종심방어진지를 뚫기엔 너무나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제 작전의 성패는 남쪽의 남부집단군에게 달렸습니다. 


  남부집단군은 중부집단군과 같은 날인 7월 5일 공세를 개시한 이후, 주력인 전차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워 소련군의 진지를 돌파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2겹, 3겹, 4겹으로 겹겹이 편성한 종심방어진은 서서히 독일군의 전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마치 양파껍질처럼,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그쪽으로 후속부대를 투입하면, 또 다른 방어선에 봉착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독일군은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소련군의 포병화력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진퇴양난의 지옥도가 펼쳐졌습니다. 

비록 압도되었지만, 독일군의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견고한 방어 진지에 대한 정면공격은 큰 피해를 불러왔습니다. 공격작전을 시작하는 제2무장친위대 사단 '다스 라이히' 병사들의 모




강철의 무덤 : 수백 대의 전차가 벌이는 대전차전의 시작


  독일군 이러한 방어 진지에 학을 뗀 나머지, 이제 공격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프로호로프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은, 이제 수천 대의 독일군 전차부대가 깔아뭉개고 지나갈 예정이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소련군 전차부대도 현장에 급파되었고, 이제 불과 3km의 전장에서 양측 도합 약 천여대가 넘는 전차들이 정면승부를 벌이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약 300여 대였던 것에 반해, 소련군은 약 900여 대에 달했습니다. 이 전차들은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고, 그야말로 프로호로프카의 개활지는 강철의 무덤으로 변했습니다. 소련군의 T-34 전차는 독일군의 티거 전차에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소련군 지휘부는 아예 차체를 이용해 들이받는 전술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전술도, 전략도, 작전도 없이 양측의 전차는 그저 눈앞의 적 전차와 교전을 지속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도 소련군에게 압도적인 교환비를 강요하며 무쌍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독일군 전차부대는 피해를 보충받을 수 없었던데 반해, 소련군 전차부대는 계속해서 보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독일군이 약 60여 대의 전차를 잃는 동안, 소련군은 약 400여 대의 전차를 잃었습니다. 

  만슈타인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물론 피해는 막심했지만, 소련군의 예비 전차부대를 모두 격파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남부집단군은 예비로 두고 있던 제24기갑군단을 즉각 투입하여 소련군의 나머지 예비병력마저 돌파해 버릴 예정이었습니다. 만슈타인은 공격을 계속할 요량이었지요.


  그러나, 프로호로프카 전투 이틀 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연합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히틀러는 쿠르스크의 병력을 빼 이탈리아로 보내려고 했습니다. 남부집단군의 소중한 주요 전력이었던 제2친위기갑군단은 히틀러에 의해 이탈리아 방위임무를 부여받고 전선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만슈타인은 조금만 더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으나, 히틀러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맙니다. 

히틀러(우측)와 작전토의 중인 만슈타인(좌측의 백발) 장군의 모습. 만슈타인은 계속된 공격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연합군 때문에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만슈타인이 쓴 회고록인 <잃어버린 승리>라는 제목은 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공격을 계속했다면 승리할 수 있었는데, 히틀러의 이 판단으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할 유일한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물론 지금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군이 공세를 지속했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하지만요.

포로로 잡힌 독일군. 이미 전장의 공황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모양입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강철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전차의 잔해로 가득한 전장을 남겼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지금부터였습니다. 이제 독일군은 하지 못한 공세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예비병력을 바탕으로 역공세에 나서는 소련군을 어떻게 막아내느냐 하는 처절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소련군이 보여준 반격의 규모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번 공격작전으로 거의 모든 예비병력을 쏟아부은 독일군으로서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독일군에게 반격하고 있는 소련군 전차와 보병들의 모습.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가 둔화되자 이제 자신들의 주도권이 왔다고 판단, 대규모 공세작전을 통해 독일군을 밀어내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마지막으로 가했던 전략적 공세작전이었습니다. 독일은 이후 종전까지 이러한 규모의 대규모 공세작전을 계획하거나 실행할 역량을 모두 상실했으며, 이제 모든 전선에 병력을 배치하기에도 부족한 실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독일군은 이제 기동방어를 어떻게든 완성해야 했고, 점차 소수정예화된 독일군 전차부대는 전선 곳곳의 소련군을 막으러 동분서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곧 이탈리아로 넘어올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그렇게 원하는 제2 전선이 열렸고, 독일군은 이제 양면전쟁의 악몽 속으로 다시 빠지고 말았습니다. 



길고도 길었던 2차 세계대전도, 이제 중반부를 넘어 달리고 있었습니다.



(15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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