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이후의 세계대전의 향방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시작된 2차 세계대전도 어느새 3년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16부에서는 지난 전쟁의 진행경과와 양상, 그리고 중간정리 이후에 향후의 전개에 대해 중간점검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세계각지에서 일어나다 보니까, 야전에서 제가 간부교육을 할 때에도 이쯤 해서 많은 간부님들이 헷갈려하시기도 했었기 때문에!
이럴 때 아마도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대별로 사건을 나열해 뼈대를 만든 뒤, 세부내용의 살을 붙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각각의 사건들의 배경과 영향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에서 더 상세히 다룰 예정이니, 이번엔 사건 위주로 간결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인해 폴란드는 개전 초기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를 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이제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습니다. 폴란드군은 분투하였지만, 독일군의 기세와 소련군의 기습참전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게 양분되었습니다.
1940년 4월, 독일과 프랑스 전선은 매우 조용했습니다. 바로 가짜전쟁의 시기였지요. 서로 눈치만 보고 공격하지 않던 이 시기에, 독일은 기습적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풍부한 자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그곳의 항구와 군사공항을 활용하여 북해에서의 진출로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이 황급히 노르웨이 작전에 참가하고, 노르웨이군은 분투하였지만 결국 노르웨이도 항복하고 맙니다. 작전 내내 독일군, 정확히는 독일 해군이 스스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작전의 성패에는 관련이 없었던 것이 연합군으로는 아쉬웠던 전역이었습니다.
1940년 5월, 베저위붕 작전이 중반부로 넘어가던 바로 그 시점에서 독일군의 전격적인 프랑스 침공이 벌어졌습니다. 프랑스는 대규모의 포병과 방어 진지로 이뤄진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을 맞이했으나, 독일군의 경이로운 진격속도와 프랑스군의 사기저하 등의 문제로 순식간에 무너져버렸고, 결국 6주 만에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고 괴뢰정부를 수립하는 참사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것은 덩케르크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연합군 인명을 구조할 수 있었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이제 독일은 프랑스의 항구와 공항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독일은 유럽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하는 대규모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해군력의 부족으로 이를 실행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공군을 이용해 영국을 타격, 협상 테이블로 영국을 끌어내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고,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국과 독일의 공군은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고, 가까스로 영국이 승리하면서 영국은 생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독일의 승리에 고무된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서 영국령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을 열게 되었고, 여기서 자신들보다 소규모였던 영국군에 의해 난타당한 뒤 독일에 SOS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요청을 받고 날아온 구원투수는 바로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이었지요. 롬멜은 이후 신출귀몰한 전술로 영국군을 상대하며 기동 전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프랑스가 이렇게 정신없이 털리고 있는 와중, 친독 국가였던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를 노리고 이곳에 진출하였습니다. 비시 괴로 프랑스는 이 진주를 허용하였으며, 이제 일본은 인도차이나의 고무 자원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미국은 일본에게 최후통첩을 하달하였으며, 일본이 대륙에서의 전쟁을 모두 무효화하고 남방으로의 진출도 하지 말라는 엄중경고를 하게 됩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깨고 소련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였습니다. 무려 300만이 넘는 대군이 동원된 이 최대 규모의 지상작전에서 소련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했지만, 특유의 저항정신으로 독일군에게 강력히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저항은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낳았지만, 헛되이 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시간을 빼앗긴 독일군은 결국 모스크바의 바로 앞에서 진격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월동장비를 챙겨 오지 않았던 독일군에게,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모스크바 공방전은 소련군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고, 양측은 다시 날씨가 풀릴 때까지 불쾌한 소강상태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지구의 반대편인 태평양에서도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계속되는 일본의 폭주에 석유수출 금지라는 강경책을 내놓았고, 이는 국가 석유 소비량의 80%를 미국산 석유에 의지하고 있던 일본에겐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군부의 강한 입김이 작용하던 일본은 결국 대미개전을 결의하고, 개전 초반 미국 함대에 큰 피해를 입힌 뒤 시간을 벌고, 차후 결전에서 승리한 뒤 협상한다는 '러일전쟁 시즌2'를 찍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진주만에 주둔해 있는 미 태평양 함대의 주력함선을 기습하여 격침시키고, 그 전력의 공백을 미국이 다시 보충하는 동안 동남아시아를 석권하고 결전을 위한 태세를 완비하기로 합니다.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은 일본의 완벽한 기습이 성공하면서 미 태평양 함대는 궤멸하고 마는데, 천우신조로 미 항공모함은 이때 진주만에 있지 않아 이 기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은 남아있는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함대를 재편성하여 작전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전화위복으로 이로 인해 현대전에서의 항공모함의 유용성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이후 태평양 전역의 해전에서 항공모함이 전장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본 해군이 자랑하던 거함 거포주의는 이제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지요.
1942년 소련과의 전쟁에서 다시 여름을 맞이한 독일군은 강력한 하계공세를 펼쳤습니다. 목표는 더 이상 모스크바가 아닌, 남부지역의 자원지대였습니다. 특히, 캅카스 지역의 석유 생산 시설이야말로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할 수 있는 독일의 중요한 카드였습니다. 독일의 초기 공세는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소련군은 이를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였습니다.
전진을 계속하던 독일군은 볼가강 유역의 도시,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맞이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스탈란그라드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이 이 스탈린그라드에 온 전력을 집중하였을 때, 소련군은 겨울이 다가오는 틈을 타고 스탈린그라드의 외곽을 포위에 성공하면서 전세는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구출노력해도 불구하고, 결국 스탈린그라드는 소련군에게 함락되면서 약 30만 명의 독일군이 증발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지요.
이러한 독일군의 패배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포위가 한창 진행될 무렵, 북아프리카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에서도 롬멜의 아프리카 전선 군이 영국 몽고메리 장군의 대규모 공세에 패배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은 이제 점차 한계를 보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연합군의 강력한 공세로 인해 독일군은 튀니지를 향한 기나긴 후퇴를 감행해야만 했습니다.
태평양의 전세 또한 추축국에게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계속되는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인해 일본은 미국의 항공모함 함대를 끌어내어 격파하기로 결정, 미드웨이 섬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전보안의 실패와 갈팡질팡한 지휘력의 문제로 인하여 작전에 참가한 항공모함 4척이 모두 격침되는 초유의 사태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 승리로 인해 미국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1943년, 이제 승리의 무게 추는 연합국에게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태평양 전역에서는 미국이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일본에 대한 최초의 육상 반격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야간 근접 함대전이 벌어질 정도로 치열했던 이 전투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동남아시아 진출지역에 대한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정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동부 유럽에서 소련군은 비록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패배했지만, 여전히 독일에 비해 어마어마한 전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었습니다. 독일은 이러한 주도권을 다시 빼앗아 오고자 쿠르스크 돌출부 지역의 소련군을 남북에서 차단하여 포위섬멸하려고 했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와 거대한 규모의 예비대 투입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이제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 주도권을 완전히 잃게 되었고, 이젠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추축군의 30만여 명의 병력이 아프리카에서 증발하였고, 영미연합군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였습니다. 이제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 동부전선에서 일부분의 병력을 이탈리아로 돌려야 했습니다. 전쟁의 양상이 이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독일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 이후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으나, 대규모 공세를 펼쳐올 것임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전략적 공세를 할 수 있는 역량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고, 연합군이 상륙한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연합국과의 협상에 나서면서 상황은 급박해졌습니다. 게다가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프랑스 지역에서 있을 것이라는 첩보까지 들어오면서, 독일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태평양의 경우도 상황이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이제 함대를 재정비하고, 일본군의 가장 최남단 진출지역인 솔로몬 제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일본의 함대는 건재했고, 미국은 이를 공격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할 요량이었습니다.
전쟁의 향방이 크게 뒤바뀌어버린 1943년이 지나고, 이제 전쟁의 종반부인 194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추축국은 암담한 전황 속에서도 절대로 전쟁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제, 세계대전의 가장 처절한 국면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7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