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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스토리 May 21. 2024

17부 : D-DAY!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독일군과 연합군의 눈치게임

연합군의 상륙 : 대체 어디로 온다는 거야?


  전쟁의 판세가 뒤집어진 1943년이 지나고, 새롭게 194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이어 쿠르스크에서도 패배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북아프리카에서도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이탈리아로 진격,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연합군과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추축군인 일본의 경우에도 상황은 같았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 이후, 콰달카날 전역에서도 패배하면서 호주 공략의 꿈은 무너졌습니다. 이후 진주만에서의 피해를 회복한 미 태평양 함대가 주력 전함들의 복귀와 신형 항모의 합류로 점차 해상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혼란이 계속되던 1944년 초, 독일군이 가장 신경 쓰고 있던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동부전선에서 또다시 벌어질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였고, 다른 하나는 연합군의 서유럽 상륙작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영/미를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은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에서 작전이 이뤄질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합국 원정군 최고사령부(SHAEF)의 1944년 2월 1일의 회의 모습을 담은 사진. 앞줄의 가운데가 바로 아이젠하워 미 육군 대장이고, 그 오른쪽이 몽고메리 영국 대장입니다.

  연합군의 경우, 대규모 원정군이 영국에 집결하였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작전보안 속에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아가 독일군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또 다른 곳으로의 기만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이미 연합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바탕으로 작전지역을 완벽히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륙지의 선정에 있어서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상륙 다음날인 1944년 6월 7일. 내륙으로 진격하는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지원사격을 가하는 HMS 로드니의 모습. 독일의 21 기갑사단을 좌절시킨 주역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독일군의 경우, 연합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견디어내기에 현실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연합군의 상륙지 선정에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대다수 독일군 장군들은 칼레 지역을 유력한 상륙 예정지로 꼽았습니다. 아무래도 영불해협에서 가장 종심이 짧으니 연합군의 후속병력 증원 등에 있어서 훨씬 유리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단의 소수 몇몇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병장군이었던 마르크스 장군은 부상당한 다리 때문에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지도에 다가서면서, 연합군의 예상 상륙지로 노르망디 지역을 정확하게 손으로 짚었습니다. 게다가, 상륙작전의 기본인 화창한 날이 아닌, 악천후 시기를 이용하여 자신들을 역으로 찌를 것이라는 것 까지두요.

노르망디는 사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평범한' 지형조건을 가진 상륙지였습니다. 전쟁사를 보다 보면, 평범함이 가끔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병력을 배치하는 문제였습니다. 완고한 보수파 노장인 룬트슈테트 장군은 최소한의 병력을 해안에 배치하고, 기동화된 정예 전차부대는 후방에 집결시킨 뒤 연합군의 상륙지점에 정확히 정해지면 그때 기동방어를 통해 적을 물리치자고 제안했습니다. 즉 여기저기 위급한 곳으로 정예부대를 옮겨가며 기동 전을 벌이자는 것이었지요.

노르망디 인근 지역에서 전개하는 독일군 전차부대의 모습. 이들은 1940년 항복시킨 프랑스군의 노획전차를 운용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의 압도적인 항공력을 경험한 에르빈 롬멜 장군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롬멜의 생각으로는, 후방에 집결돼있던 기동예비부대가 공격을 위해 전방으로 기동 하는 동안, 무자비한 연합군의 폭격에 노출되어 역습을 해보기도 전에 박살나리라 생각했지요.


  그렇기에 롬멜은 가용한 모든 자산을 해안에 가까이 배치하고, 연합군의 상륙이 시작되면 즉각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그들이 교두보를 만드는 것 그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륙개시 이후 24시간 안에 결판이 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고전명작 영화, <지상 최대의 작전>의 영문 원제인 <The Longest Day>어원이 되었지요. 연합군에게도, 독일군에게도 모두 가장 긴 24시간 될 터였으니까요.


  이밖에도 상륙작전 직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다른 브런치북에서 연재하도록 하고, 상륙작전의 개시와 전개로 바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되는 연합군의 침공, 우왕좌왕하는 독일군


  1944년 6월 5일 야심한 시각, 노르망디 상공은 어마어마한 굉음에 휩싸였습니다. 연합군의 수송기들이 밤하늘을 가르면서 내륙을 향해 계속 항진했고, 지상의 독일군은 비상벨을 울리며 각자의 방공포대로 달려 나갔습니다. 잠시의 침묵이 이어진 뒤, 독일의 방공포대에서 불을 뿜기 시작하며 밤하늘은 마치 하얀 대낮처럼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에 앞서, 양동을 위한 연합군의 공수부대가 해안의 후방으로 낙하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미 1 보병사단 제16보병연대의 A중대가 오마하 해변에 상륙, 폭스 그린 구역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연대의 E중대는 상륙한 지 불과 몇십 분 만에 3분의 2가 사상당했습니다.

  이렇게 치밀한 연합군의 사전 작전전개에 반해, 독일군은 우왕좌왕하기에 바빴습니다. 독일군의 복잡한 지휘체계는, 이런 비상시에 보고와 명령하달의 사이에서 각종 부대가 뒤엉키며 혼선을 일으키는 문제점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서부전선 사령관이었던 룬트슈테트와 B집단군 사령관인 롬멜의 상이한 의견(기갑부대를 해안 가까이 둘지, 아니면 후방에 둘지)을 히틀러가 조율하는 과정에서, 히틀러는 "그럼 절반은 해안에, 절반은 내륙에 두면 되겠네!"라는 타협안(?)을 내놓으면서 이도저도 아니게 된 작전계획인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서부전선군 사령관 룬트슈테트(좌측)와 B집단군 사령관 롬멜(우측)의 모습. 양측은 서로의 의견충돌로 말미암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거기다 전쟁 말기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이상해지는 히틀러의 개인적인 정신상태도 발목을 잡았습니다. 원래 작전계획대로라면 연합군의 상륙징후가 보이면 바로 내륙의 전차부대가 해안을 향해 기동 해야 하는데, 히틀러는 각종 약품들을 먹은 뒤 완전히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일선의 여러 장군들이 전화하여 "기동부대를 옮겨 역습을 해야 하니 총통을 깨워달라"애원하기까지 하였으나, 총통관저의 부관들은 주무시는 걸 깨울 순 없다고 일축하였습니다. 이미 현장과는 괴리가 생겨버린 것이지요.

1944년 6월 6일의 이른 오후, 히틀러가 작전참모인 알프레드 요들에게 침공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그는 "그러니까, 시작된 게로군."이라고 읊조렸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6월 6일 침공 당일 롬멜은 아내의 생일을 맞아 후방으로 잠시 휴가를 나가있었습니다. 당연히 연합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롬멜도 알고 있었으나, 날씨가 좋지 않다는 예보를 보고 조금은 마음을 놓은 채로 이동한 것이었지요. 아내, 그리고 아들 만프레드와 함께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롬멜은 이윽고 참모에게 침공 사실을 전화로 보고받았고, 이내 어느 사단이 역습에 나섰는지를 물었습니다. 참모는 "아직 그 어느 부대도 역습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롬멜은 즉각 수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장 모든 부대를 해안으로 보내! 지시가 있건 없건 모두 해안으로 가서 역습하라고!"

롬멜 원수가 침공 직전인 5월 30일, 제21기갑사단의 자주포 대대를 시찰하고 있습니다. 이들 제21기갑사단은 디데이 당일 유일하게 역습을 시도한 사단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닦달에 많은 부대들이 이동을 시작했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결국 21 기갑사단만이 유일하게 D-DAY 당일 역습을 시도한 부대가 되었습니다. 연합군은 강력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동반하면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월하게 상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단 한 곳, 오마하 해변을 제외하고요.

영국군 랭커스터 폭격기가 노르망디 내륙지역의 독일군 진지에 성공적으로 폭격을 가했습니다. 연합군은 캉 인근에만 약 7,000여 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오마하 해변은 사실 독일군의 가장 강력한 방어가 배비된 곳들 중 하나였습니다. 352 보병사단은 나름대로 향후 소련과의 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창설된 부대로서, 그 전투력이 주변에 있는 예비 사단들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게다가 상륙 당일 악천후로 인해 연합군의 사전포격이 대부분 빗나가며, 대부분의 방어전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채로 연합군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침공 당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해군의 지원사격을 받는 보병들이 상륙주정에서 내려 해안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미군은 그야말로 피의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다른 해변인 유타, 주노, 골드, 소드 해변의 연합군은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고 상륙한 것에 비해, 오마하 해변의 미군은 상륙 당일에만 약 3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면서 교두보 확보 가능성이 불투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계속되던 지원포격과 후속증원부대, 그리고 겨우 살아남은 상륙 전차들이 버텨주면서 간신히 약 3km 정도를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내륙으로 진격하는 연합군, 독일군의 마지막 기동방어


  이러한 오마하 해변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내륙을 향해 계속해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다른 곳에서의 상륙은 매우 성공적인 데다가 독일군의 역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승산은 연합군에게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최후의 카드로 자신들이 자랑하는 무장친위대, SS의 전차부대를 노르망디 전선에 증원하면서 연합군을 격파하기로 합니다.

롬멜 원수(좌측)와 무장친위대 SS 장군인 요셉 디트리히(우측)의 모습. 무장친위대는 광신도적인 강력한 부대였지만, 그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먼저 노르망디 인근의 가장 큰 도시들 중 하나였던 캉(Caen) 인근에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가 도착하였고, 최강의 기갑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기갑교도사단(Panzer-Lehr-Division)' 또한 연합군의 공중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아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했던 해안에서의 역습은 이미 물 건너간 채로, 내륙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연합군을 맞이하는 방어전에 투입되어야만 했습니다.

SS 무장친위대 부대가 100mm Nebelwerfer 35 박격포를 발사하고 있습니다. 이들 독일군 보병부대는 화력의 우세를 위한 집중적인 박격포 사격을 장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전투력 하나만큼은 확실했습니다. 투입된 이들은 그 악명 높은 티거 1과 판터로 무장하고 있었고, 숫적으로 우세한 연합군 전차를 마구잡이로 격파하면서 그들의 예봉을 꺾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전투의 양상은, 연합군이 어느 한 지점에서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시도하면, 후방의 어딘가에서 달려 나온 독일군 기갑부대가 나타나 이를 저지하고, 다시 사라지는 형식이었습니다.

제15 스코틀랜드 보병사단 병사들이 숲에 은엄폐한 채로 작전 개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합군은 비록 독일군에 비해 경험이 부족했지만, 강력한 포격으로 이를 상쇄해 나갔습니다.

  연합군 수뇌부는 답답했습니다. 이미 승기를 잡기는 잡았는데, 계속해서 독일군의 기동예비가 나타나 훼방을 놓는 이 전투양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영국군이 굿우드(Goodwood) 작전을 입안하였습니다. 영국군이 동부 쪽의 캉 인근 지역에서 공세를 펼침으로써 독일군의 전차부대를 자신들의 앞으로 유도하고, 독일군 전차들이 영국군 정면으로 이동한틈을 타 서쪽의 생로 지역에서 미군이 코브라 작전으로 전선을 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독일군 비장의 무기였던 88mm Flak 36은 매우 효과적인 대공포이자 동시에 대전차포였습니다. 88mm의 직격을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연합군 전차는 없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예전에 읽었던 책, <Kursk in Normandy>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굿우드 작전을 다룬 책인데, 이름부터 '노르망디의 쿠르스크'라니.. 그만큼 비교적 많은 수의 전차가 좁은 구역에 욱여넣어졌던 굿우드 작전을 잘 반영한 이름인 듯싶습니다. 영국군 전차부대는 교통체증에 시달리면서 공세를 위한 전개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 타이밍을 제대로 노린 독일군이 방어작전에 성공하면서 영국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공세를 중지하는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1944년 7월 9일, 캉의 외곽에서 '캉'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캐나다 군인 3명이 웃고 있습니다. 영국군은 비록 목표달성은 성공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독일군이 영국군의 정면으로 끌려 나오게 되면서 생로 방면의 미군 부대가 코브라 작전을 벌이는데 굉장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코브라 작전에서 독일군은 부족한 여건 속에서도 미군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면서 분투하지만, 대세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무엇 보보다도 항공전력의 열세가 너무 심각한 수준이었고, 게다가 모든 방면에서 예비대를 운영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이미 독일의 패색은 너무나 짙었습니다.

1944년 6월 14일, 영국군의 셔먼 파이어플라이에 의해 격파된 독일 판터 전차의 모습. 독일군은 강력한 기갑부대의 반격을 계속해서 시도했고, 연합군은 골머리를 썩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점차 넓어지는 전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역량을 다한 독일군, 패주 하다


  독일군은 이제 패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벌어진 팔레즈 포위망에서 마지막 남은 서부전선의 최정예 기갑부대 대부분을 소모하게 되면서, 독일군은 빠르게 후퇴하여 재정비를 하는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재정비가 언제, 어디에서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지요.

코브라 작전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SS 무장친위대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소속 부사관이 몸수색을 당하고 있습니다. 영국군의 희생 덕분에 미군의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독일군은 빠르게 패주를 거듭하였고, 뒤이어 8월 15일에는 남프랑스에서도 연합군의 상륙작전인 '용기병 작전'이 벌어지면서 서부전선의 전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이제 네덜란드 국경까지 쫓겨나게 되었고, 프랑스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독일군은 급격하게 쪼그라들어버리게 된 것이었지요. 독일군의 후퇴 속도가 너무 빨라, 연합군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보급체계가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영화 <머나먼 다리>에서 독일 룬트슈테트 장군이 한 대사, "우리가 너무 빨리 후퇴해서 (연합군이) 못 따라오는 모양이군"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맞을 것입니다.

노르망디에서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독일군들의 모습. 해안방어에 투입된 이들은 정예병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심지어 강제로 끌려온 소련군 포로도 있었습니다.

  비록 많이 밀려나긴 했지만, 독일군은 이제 다시금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전쟁의 신이 그렇듯이, 승리한 자에게 내리는 달콤한 기쁨과 더불어, 자신만만한 오만이라는 불행을 연합군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연합군은 이제 대담한 작전을 통해 공수부대를 투입, 194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과감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944년 7월 16일, 영국 왕립포병대대의 5.5인치 중포가 야간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포병사격을 하고 있습니다. 중포병연대는 군단 수준의 자산이었고, 통상 사단을 지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동부전선은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6월 6일, 영미연합군이 상륙한 뒤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던 서부전선의 전황을 보고받던 독일군 수뇌부는 6월 22일, 동부전선에서 더욱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자신들이 소련을 침공한 그 날짜인 6월 22일에, 소련이 그대로 이를 돌려주기 위한 대규모 반격 작전에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1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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