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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휘찬 May 23. 2024

18부 : 소련의 복수, 시작되다! - 바그라티온 작전

동부전선의 마지막 여름이야기

  1944년 : 동부전선의 마지막 여름 


치열한 사격을 개시하고 있는 소련군 포병부대 사이로 부상당한 소련군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은 소련군의 거대한 복수의 완성이었습니다. 

  1943년 7월에 독일군의 패배로 끝이 나버린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이제 일방적으로 밀리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력 정예부대의 대다수가 쿠르스크 돌출부의 소련군 종심방어 진지에서 소모되었고, 이후 소련군의 반격작전으로 인해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에 상륙한 미/영 연합군을 막기 위해 추가적인 부대가 이탈했기에, 동부전선 독일군은 숫적열세에 처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와중,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변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이젠 서부전선 / 이탈리아 전선의 2개와 더불어 동부전선을 막아야 하는 3면 전쟁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로, 노르망디로 주요 기갑부대가 차출되었고, 이로 인해 동부전선의 공백은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중부지역의 대도시인 민스크는 소련군의 최종적이고 핵심적인 작전목표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독일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련 또한 이러한 독일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5월 말부터 대규모 공세작전을 준비해오고 있었습니다. 극도의 기밀을 유지한 채로 준비되던 와중, 작전 개시일은 6월 22일로 정해졌습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침공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있은지 정확히 3년이 되는 날짜였습니다. 소련군은 그만큼 독일군에게 장엄하고 거대한 규모의 반격작전으로 복수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독일군도 이러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가 곧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장소선정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공세방향이 우크라이나의 남부집단군이라고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이 우크라이나를 돌파해 폴란드 남측으로 진격, 발칸반도의 루마니아와 헝가리 등 독일 동맹국들로부터 독일을 격리시키려는 움직일 것이라는 것이 판단의 근거였습니다. 특히 루마니아 플로에슈티 유전지대의 석유는 독일의 생명줄과도 같았으니까요.

소련군에게 항복의사를 밝히는 독일군 병사들의 모습. 독일군은 이제 전쟁에서 자신들이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숫적으로 부족한 독일군 중에서도 가장 많은 병력이 배치된 곳은 우크라이나 지역에 배치된 남부집단군이었고, 중부집단군의 경우에는 이미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 너무 크고 넓은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병력이 부족한 중부집단군은 결국 모든 곳을 지킬 수 없기에 주요 도시와 거점을 중심으로 주둔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일군 부대 사이사이에 엄청난 공백지역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미 병력 차이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약 200여만 명의 병력과 3,500대가 넘는 전차, 40,000여 문의 야포와 8,000여 대의 항공기를 이번 공격에 동원했습니다. 그에 맞서는 독일군은 겨우 약 60여만 명과 전차 400대, 야포 3,000여 문과 항공기 900여 대뿐이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 막을 수 없는 중부집단군의 붕괴 시작


  1944년 6월 21일 야간, 밤하늘 속에서 검은 비행체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소련 쪽 진지에서 출발하여, 독일군의 방향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이윽고, 늦은 심야의 적막을 깨면서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날이 밝은 뒤, 소련군이 독일군의 배치가 약한 곳에 집중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다방면에서의 공격은 독일군이 유기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소련군 공세를 한 장에 담은 지도. 소련군 공세의 규모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습니다. 발칸반도의 약간을 제외하면, 거의 동부전선 전체에서 가해진 강타였습니다.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패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이제 독일군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면서 배웠던 양익포위전술을 능숙하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주요 도시와 거점에 위치한 병력들을 모두 후퇴시키면서 전선을 단축시키고, 조금 더 밀도 있는 방어 전선을 꾸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러한 장군들의 건의를 모두 일축하였고, 모든 독일 장병들은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후퇴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으로 일관했습니다. 작전 초기, 후방으로 후퇴해 재편할 수 있었던 독일군의 많은 부대들은 이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소련군에게 포위당한 채 각개격파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 독일군에겐 너무나도 뼈아픈 타격이었습니다.

독일군 대전차포가 불타는 마을을 배경으로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 기갑부대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독일군을 덮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소련군의 공세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독일군의 양 옆에 있는 취약점을 돌파한 뒤, 포위하기 위해서 독일군 부대의 후방으로 거대하게 우회하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비텝스크(Witebsk) 지역의 상황이 가장 심각했습니다. 소련군은 비텝스크 시가지를 우회하였고, 독일군은 비텝스크에 갇혀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련군은 이러한 포위를 완성한 뒤 일부 병력을 남겨 비텝스크 포위전을 계속해서, 나머지 기동부대는 다시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나머지 독일군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수적우세를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모길료프(Mogilew)의 상황도 심각했습니다. 소련군의 전진 속도가 너무 빨라, 심지어 후퇴하고 있는 독일군 부대보다도 더 빠르게 진격할 정도였습니다. 소련군의 전진을 막기 위해 한 줌의 독일군 중전차 부대가 전선으로 나섰지만, 교전에서는 이겨도 전체적인 전황을 뒤집을 순 없었습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뛰어난 전투능력으로 해당 전투지역에서 소련군이 다른 곳으로 우회하도록 만드는 것뿐이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소련군은 엄청난 기동력을 선보였고, 아주 정확하고 적절한 작전 속도를 유지했으며, 그를 위한 세밀한 공격제대가 잘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공군의 경우에도 소련군의 우세가 이어졌습니다. 소련 공군은 더 이상 전쟁 초기의 숫자만 많은 허약한 군대가 아니었고, 반대로 독일군은 개전 초기의 강력함과 규모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소련군에게 포위된 독일군은 이제 소련 공군의 강력한 폭격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이는 독일군의 탈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독일군은 탈출에 성공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소련군의 공세에 그저 녹아내릴 뿐이었습니다. 




독일군의 발악적인 방어전과 소련군의 돈좌


  공격이 개시된 지 겨우 5일째던 6월 27일, 소련군은 주요 지점에서 독일군의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미 독일군의 정예인 제9군은 붕괴된 채로 필사의 대탈출을 시도하고 있었고, 소련군의 돌파구를 막기 위해 추가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예비 부대도 전무했습니다. 다급하게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병력을 철도수송으로 파견해 보았으나,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로스도이칠란트(Grossdeutschland) 사단과 같은 정예 부대는 소련군을 늦추기 위해 끈질기게 싸웠습니다. 이들은 다른 부대의 탈출을 돕기 위해 위치를 고수했습니다.

  독일군이 할 수 있는 것은 소련군의 공세를 기다리면서, 공세가 시작되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버티는 것뿐이었습니다. 소련군이 멈출 때는 그저 보급이나 휴식이 필요할 때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세가 지속되면서, 중부지역의 주요 대도시인 민스크가 7월 3일 소련군에게 함락되었고 독일군의 사기는 더욱더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민스크가 함락되었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 앞에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던 수십만의 독일군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7월이 지나 8월에 접어들면서, 소련군은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작전반경에 둘 수 있을 정도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약 400여 km를 달려오면서 부대들이 많이 지친 상태였고, 보급역량을 넘어서는 진격속도로 인해서 소련군의 공세도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습니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진격하고 있는 소련군의 전차부대가 한 마을을 지나쳐 진격하고 있습니다. 독일군의 매복공격을 빼면, 이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일군의 최일선 전투능력은 아직 건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소련군이 비록 수적우세를 바탕으로 주도권을 쥔 채 공세를 계속해왔지만, 실제로 최일선의 전투에서는 독일군에 비해서 더 많은 피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규모는 작았지만 수년간의 전투경험과 우수한 기갑부대를 통해서 소련군에게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신호에 맞추어 진지를 뛰쳐나가는 소련군 보병들의 모습.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은 독일군에게 공포와 좌절을 겪게 했습니다.

  독일군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각지의 기갑 부대를 집결시켰습니다. 다양한 부대에서 패퇴해 온 전차들이 뒤섞여 한 개의 역습부대로 편성되었고, 이들은 중구난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로 들어가는 소련군 기동부대의 옆구리에 마지막 펀치를 날리는 데 성공합니다. 깜짝 놀란 소련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추가적인 공세를 중지하였고, 이를 마지막으로 중부지역에서의 공세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수풀로 위장한 독일군 판터 전차가 비텝스크 인근에서 전진하고 있습니다. 독일군 기갑부대는 비록 소규모였지만, 소부대 공세 행동에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습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은 붕괴되었고, 전선은 400km나 서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제 폴란드가 코앞이었으며, 자신들의 문 앞까지 소련군을 맞이하게 된 발칸반도의 독일 동맹국들은 이제 자신들의 입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이 바로 앞까지 진격해 온 바르샤바의 민중들은 이에 고무되었고,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봉기를 일으키면 소련군이 즉각적으로 개입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련군은 봉기를 보고도 개입하지 않았고, 봉기군은 독일군의 친위대와 특수작전부대에 의해 처참히 진압당하고야 마는 비극을 겪게 되었습니다. 




1945년 : 전쟁의 종장을 향하여...

독일군 무장친위대 SS의 기갑척탄병이 불타는 소련군 전차를 지나 달려가고 있습니다. 독일군은 분투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향방은 이제 거의 결정되었습니다.

  1944년 8월,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을 대패시킴과 동시에 (지난번 글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서부전선의 노르망디에서는 독일군 정예 기갑부대가 연합군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이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한계에 부딪혔고, 그저 시간을 끄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독일군의 최일선 전투능력은 여전했습니다. 연합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지만, 전투에 있어서 독일군은 아직도 여전히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1944년 후반, 전쟁의 향방이 결정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투현장의 처절함은 더욱더 강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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