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자!
1944년 6월 6일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독일군에게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가장 중요한 전장이었던 소련과의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 서부전선으로 보내야만 했고 나아가 연합군과의 교전에서 정예 기갑부대 대부분을 소모하면서 방어역량은 더욱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상륙작전이 진행된 지 2달이 지나는 8월이 넘어가면서, 독일군은 거의 모든 공세역량을 소실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파리가 연합군에게 해방되면서 독일군은 이제 후퇴를 거듭, 네덜란드 인근까지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독일군의 후퇴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연합군의 신나는 진격을 멈추게 한 것은 독일군 때문이 아닌, 연합군의 보급 부족이라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습니다.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 보급속도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해 버린 것이지요.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이제 거의 무너진 듯 보였습니다. 이제 연합군은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후방에서 전방으로 이동 중인 여러 보충부대와 보급품들이 도착하면 이제 전쟁은 끝날터였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 상황 속에서 독일군의 주력이 궤멸되었다는 판단 아래, 194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자하는 강한 유혹에 휘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연합군은 대규모 공수작전을 동반한 독일군 종심에 대해 강력한 돌파 작전을 개시, 네덜란드 해방과 독일 국내로의 진공이라는 목표달성을 위한 "마켓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을 입안,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연합군의 개괄적인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먼저 독일군 후방에 있는 주요 도시인 아인트호벤, 네이메헨, 아른헴의 3곳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주요 지점과 교량을 확보한다. 이후 전선에서 출발하는 기갑부대가 단일통로를 통해 찌르듯이 진격, 공수부대가 미리 확보해 준 교량을 통과하여 아인트호벤 - 네이메헨 - 아른헴을 단숨에 바늘처럼 꿰뚫어 네덜란드 전선에 구멍을 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켓가든 작전을 위해 연합군은 엄청난 수송자산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무리 독일군이 약체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적지 후방에 투입되어야 하는 공수부대에겐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교량확보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공수부대는 적에게 포위된 채로 며칠 동안이나 아군의 기갑부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기를 기다려야 했지요.
이러한 공수부대의 투입을 '마켓 작전', 그리고 이를 구출하기 위한 기갑부대의 돌진인 '가든 작전'의 2개가 합쳐서 '마켓가든'이라는 작전명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기갑부대가 계획된 제 시간이 각 교량에 도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제일 전선과 가까운 아인트호벤의 경우엔 몇 시간 내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가장 깊숙한 쪽에 있었던 아른헴의 경우엔 3일을 버텨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약체화되었다고 판단한 연합군 사령부는 이 작전을 계획, 강행하도록 진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연합군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독일군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노르망디와 팔레즈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경험한 부대들이 대다수였고, 이들이 재편성과 휴식을 위해 네덜란드 후방에 위치했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독일군 부대가 대다수 "기갑부대"였던 것이었습니다.
공수부대의 경우, 낙하산이라는 투입자산의 한계로 인해 중장비를 가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수부대는 기습의 효과를 노리고 투입되는 것인데, 만약 공수부대가 강하한 이후 전차를 맞닥뜨리게 된다면 이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보병의 대전차화기뿐이었기 때문에, 이는 연합군 공수부대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들 독일군 부대는 무장친위대, 즉 SS부대로서 약체화된 독일군 내에서도 굉장히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부대였고, 무엇보다 이들을 지휘하고 있는 사령관은 방어전의 명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발터 모델" 원수였습니다.
결국, 이 마켓가든 작전의 중요한 요소는 '연합군의 공수부대가 다리에서 얼마나 버텨내느냐', 혹은 '연합군의 기갑부대가 얼마나 제시간에 도착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독일군은 애초에 연합군을 격파한다기보다, 연합군 기갑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공수부대를 격멸하고 주요 교량을 확보, 파괴한다면 연합군의 작전 목표는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먼저 에인트호벤에 강하를 시작한 미 101 공수사단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해 나갔습니다. 9월 17일 강하하여 교량을 확보하였지만, 북쪽의 교량은 이미 독일군에 의해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공병부대를 요청한 뒤, 이들은 북쪽의 네이메헨의 미 82 공수사단과 의 협조된 공격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장 북쪽이자 깊숙한 쪽에 투입되었던 영국 제1공수사단이었습니다. 이들인 아른헴 인근에서 교량의 한쪽 부분을 확보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교량의 반대편까지는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교량의 반대편에서 몰려드는 SS 부대를 맞아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독일군이 전차부대를 추가투입하면서 점차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이러한 연합군의 공수작전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약체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전차를 다수 보유한 기갑부대가 잔존해 있었고, 특히 부대를 잘게 쪼개 필요한 부분에 적시적으로 구멍을 틀어막는 방식의 유기적인 방어전술을 지닌 발터 모델과 비트리히 장군의 지휘가 더해져 빛을 발했습니다.
연합군 공수부대가 이렇게 피를 흘리며 교량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연합군의 기갑부대도 전선을 뚫어내면서 기동 하기 시작했습니다. 빨리 타임테이블에 나온 시간 안에 공수부대를 구출하러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동로는 하나였고, 독일군은 이 도로를 중심으로 연합군의 이동대열을 소규모로 타격하기 시작하면서 연합군의 전진속도는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9월 17일인 강하 당일에 도착하기로 약속했던 아인트호벤은 결국 그다음 날인 18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작전계획이 계속해서 뒤로 딜레이 되면서 연합군 사령부는 더욱 고심이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9월 19일, 두 번째 목표인 네이메헌에 도착하면서 조금은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82 공수사단은 자신들이 확보하지 못한 교량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것인지, 보트를 활용해 도하작전을 벌여가면서 다리를 확보하는데 끝끝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잔당들이 계속해서 주변에서 반격을 가해왔고, 정작 다리는 확보했음에도 연합군은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생각대로 약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아른헴이 강하한 영국 제1공수사단은 이미 두 그룹으로 쪼개진 뒤 포위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스트 중령이 이끄는 1 공수사단의 선발대는 아른헴 대교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단의 본대와 주력부대는 다른 곳으로 강하해버려(...) 독일군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다리로 걸어가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독일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격을 시도하면서, 영국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작전종료예정일이었던 9월 20일이 되었는데도, 연합군은 네이메헌조차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작전 예정일을 넘겼음에도 아른헴의 영국군은 굳건히 버텨주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추가적으로 폴란드 공수부대를 아른헴이 강하시키면서 이들을 지원하려 했지만, 이미 주변엔 독일군 기갑부대가 집결을 마쳤던 터라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교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른헴의 영국군은 3일을 버티라는 애초의 작전목표를 훨씬 상회하는 8일을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의 기갑부대는 좁은 도로에서 지속적인 반격을 펼쳐오는 독일군을 일소하지 못하고 너무나 느린 진격속도를 보였고, 피해도 예상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점차 둔화되었습니다.
독일군 또한 이러한 연합군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SS 기갑부대는 점차 예비대를 집결시키면서 연합군 기갑부대의 진격을 방해하는 한편, 하루빨리 영국군 공수부대는 포위섬멸하기 위해 공세를 계속했습니다. 독일군의 반격이 점차 거세어지자, 연합군 사령부는 9월 25일 아침 결국 모든 공세작전을 중지, 영국군 공수부대에 탈출작전을 벌일 것을 지시하면서 마켓가든 작전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영국군 공수부대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야음을 틈타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영국군의 탈출을 보장해 줄 마음이 없었으며, 지속적인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영국군은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인원들만을 선발, 도하를 강행했고 그렇게 살아서 강을 건너 연합군 본 대로 돌아온 것은 1만 2천여 명 중 2천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걷지 못하는 부상자와 이들을 돌봐야 할 의무병, 그리고 독일군에게 이 철수를 숨기기 위한 기만작전으로 통신병과 군의관들은 현장에 남아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마켓가든 작전은 독일군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파죽지세로 몰고 진격하던 연합군은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로 인해 전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으며, 독일군은 이를 기회로 재정비를 마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게다가 연합군 주력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자신감과 사기를 되찾았으며, 다시금 전력을 보충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이 패배로 인해 1944년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허황된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연합군은 많은 피해와 보급품 소모로 인해 다시 전략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연합군이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여 전쟁의 판세가 뒤바뀐 정도의 절대적인 패배는 아니었습니다. 연합군은 물론 네이메헨까지 진격하는 데에는 성공했기 때문이었지요. 중요한 점은 연합군이 작전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작전수행으로 불필요한 희생을 낳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연합군의 패배는 고전명작 영화인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특히 영국군의 장군이 나지막이 말한 대사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한 것 같이 느끼냐는 부하의 날 선 질문에, 고개를 떨구면서 하는 바로 그 대사 말이지요.
브라우닝 중장: 몽고메리를 보고 왔네. 매우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하시더군.
(I've just been on to Monty. He's very proud and pleased.)
어카트 소장: 기쁘다고?
(Pleased?)
브라우닝 중장: 그렇다네. 원수께서는 마켓 가든 작전이 90% 성공했다고 생각하시니까.
(Of course. He thinks Market Garden was 90 per cent successful.)
어카트 소장: 그러면 중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But what do you think?)
브라우닝 중장: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우리가 너무 먼 다리까지 가려한다고 항상 생각했네.
(As you know, I've always thought that we tried to go a bridge too far.)
이제 서부전선에서는 잠시나마 조용한 소강상태가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서부전선에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을 걸었던 도박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21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