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스토리 Jun 11. 2024

22부 : 유럽전선의 최종장 - 베를린 전투로 가는 길

소련군, 복수의 레이스 시작!

소련군의 발칸반도 진격, 그리고 루마니아의 항복


  1944년 8월, 서부전선 독일군이 노르망디 팔레즈에서 연합군에게 격파당하고 프랑스 파리가 해방되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겨날 무렵, 동부전선에서도 색다른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련군이 독일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 중 하나인 루마니아의 영토로 진군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루마니아 병사 2명이 자신의 진지에서 기관총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비록 2류 군대였지만, 독일의 동부전선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군대였습니다. 

  루마니아는 동부전선에 참가한 발칸반도 국가들 중 그나마 가장 나은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였고, 무엇보다도 플로이에슈티(Ploieşti) 인근에 있는 유전이 독일이 운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물밀듯이 몰려들었고, 약삭빠른 루마니아는 전투가 진행되던 도중 소련과의 단독 강화를 맺은 뒤, 독일군에게 루마니아 영토에서 나갈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어제의 아군이 순식간에 적군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루마니아는 독일의 소련침공 당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많은 학살을 일삼았고, 더욱이 파병한 군대의 규모도 있던지라 소련에겐 매우 야비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일단은 발칸반도를 해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이러한 협상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이제 중요한 동맹국의 군대와도 싸워야 했으며, 무엇보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지대를 잃게 됨으로써 독일의 마지막 희망고문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군인들이 루마니아 국기와 나치 독일의 국기 아래에서 행사가 진행되는 도중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은 독일의 소중한 동맹에서, 적국으로 순식간에 변모했습니다.

  이제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서 헝가리로 진격해 왔고, 독일의 또 다른 동맹국 헝가리 또한 가혹한 운명의 선택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헝가리의 섭정 호르티가 소련과의 협상을 꾀하자, 독일군은 특수부대를 돌입시켜 그의 아들을 납치하고 헝가리를 불법적으로 접수합니다. 헝가리가 뚫리게 되면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이 그대로 노출됨과 동시에, 헝가리의 소규모 유전을 지켜 전쟁수행능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이유였습니다. 

소련군이 부다페스트 외곽에서 도시를 향해 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자비한 공격으로 헝가리를 함락하기 위해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격을 계속했으며, 이들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까지 도달했습니다. 독일군과 잔존 헝가리군, 그리고 심지어 경찰까지 동원된 수비군들은 부다페스트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맞이할 준비를 계속했습니다. 




부다페스트 공방전, 그리고 봄의 새싹(Frühlingserwachen) 작전


  소련군은 무자비한 공세를 부다페스트에 쏟아부었습니다. 독일군과 헝가리군은 이에 대응하여 계속해서 방어태세를 유지했고, 진지를 빼앗기면 즉각 역습을 실시하여 다시금 전선을 회복하는 탄력적 방어를 선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은 약화된 독일군에게 크나큰 위협이 되었으며, 점진적으로 전선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독일군과 헝가리군은 경찰까지 동원하며 사투를 벌였지만, 도시의 함락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소련군의 규모가 너무나 압도적이었습니다. 

  어느덧 해가 바뀌고, 1945년 1월이 되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는 벌지 전투로 알려진 아르덴 대공세의 마지막 장이 열리고 있는 무렵, 부다페스트 방어전도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한 다뉴브 강 동쪽의 페스트에서 결국 모든 수비군은 소련군에게 포위되었고, 이들을 향한 소련군의 공세를 더욱 강력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분투는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전쟁에서는 승리하고 있었지만, 단일 전투들에서는 독일군을 훨씬 웃도는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러한 통계를 보고서 또 다른 편집증적 공세를 펼치고자 했습니다.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공세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는 부다페스트 남부에 있는 유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공세작전을 지시했습니다.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다리가 끊어졌습니다. 다뉴브 강 동쪽의 페스트 지역은 이제 소련군이 기세를 올리고 있어, 독일군에 의해 교량 파괴는 진행되었습니다.

  독일군 참모본부는 당연하게도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였지만, 히틀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 방향에서 자신들보다 훨씬 우세한 소련군의 돌출부를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가한다는 이 공세작전은, 다가오는 봄의 계절을 뜻했는지 '봄의 새싹(Frühlingserwachen)' 작전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는 독일군이 2차 세계대전 도중 실시한 마지막 공세작전이 되고 말았지만요.

봄의 새싹 작전에서 독일군 판터 지휘전차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독일이 가한 마지막 공세작전의 주력이었지만, 대다수 소모되면서 베를린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1945년 3월부터 4월까지 벌어진 독일군의 이 대규모 공세작전에서, 소련군은 강력한 방어전 전개 이후에 대규모의 기동예비를 투입하여 지칠 대로 지친 독일군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방식으로 독일군의 공세를 좌절시켰습니다. 독일군은 잠시나마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지만, 이를 대가로 지불한 '기갑전력의 증발'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피해였습니다.

봄의 새싹 작전 도중 파괴된 독일군 판터 전차의 잔해. 공세는 비교적 성공적이었지만,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금방 복구될 수준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아니었지만요.

  1945년 4월에 접어들면서, 이제 베를린으로 가는 길을 막아설 독일군 부대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드디어 만난 소련군과 미군, 그리고 베를린으로 가는 길


  1945년 4월, 젤로(Seelow) 고지의 독일군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이 고지군을 소련군이 돌파한다면, 이제 아우토반과 각종 도로를 타고 베를린까지 진격할 수 있는 하이패스를 부여받을 터였습니다. 그렇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대응하여 고지와 주변 지역에 겹겹이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봄이 되어 따뜻해진 날씨에 진창이 되어버린 땅이 수비군에게 더욱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 주었습니다.

독일군은 이제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잔여 전투력과 인원들이 50% 이하인 사단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서류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부대들이었습니다. 

  이 방어진지를 돌파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게오르기 주코프였습니다.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 원수는, 이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산을 넘어야만 했습니다. 소련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10대 1의 비율을 넘어가는 압도적인 비율이었고, 주코프는 이러한 힘의 차이를 이용해 장엄하고도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한시바삐 베를린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장군들도 베를린 함락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젤로 고지의 독일군 진지를 향해 공격준비사격을 가하고 있는 소련군 포병부대. 이 한 번의 작전에만 약 1만 여문이 넘는 야포가 참가할 정도의 대규모 포격이었습니다. 

  젤로 고지 전방의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여 독일군 수비대의 진을 빼놓으려고 했습니다. 거대했던 포격이 끝나고, 소련군은 강한 광량을 자랑하는 탐조등을 독일군 진지를 향해 쏘는 동시에 일제히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이 탐조등으로 독일군 수비대의 눈을 멀게 하려는 심산이었지요. 그러나 막상 탐조등이 쏘아지자, 강한 빛이 방금 전 실시했던 포격으로 인한 먼지에 난반사되면서 순식간에 전장을 뿌옇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젤로고지를 지키고 있는 독일군 병사들의 앞에 소련군 전차의 잔해가 인상적입니다.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지형과 작전의 우위를 통해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공격을 시도하였던 소련군은 순식간에 전장에 안개가 낀듯한 감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강력한 포격에도 비교적 잘 은엄폐해 살아남아있던 독일군 수비대가 강하게 저항하면서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당연히 독일군에게 더 유리하게 끝났으며, 전쟁 말기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한 소련군에게 오히려 창피를 안겨준 전투였습니다.

독일군의 참호 속에서, 젊은 병사가 머리를 쥐어짜면서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련군의 파도를 막아내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과의 압도적인 전력차이를 끝끝내 독일군은 극복해내지 못했고, 피의 대가를 지불하며 젤로 고지를 넘어온 주코프는 이제 눈에 불을 켜고 베를린을 향한 레이스를 시작했습니다. 젊은 청년 대부분이 징집된 당시 독일군은, 이제는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15세에서 60세까지의 모든 남성을 징집하여 전투병력으로 전환시키고자 했습니다. 

국민돌격대(volkssturm)를 사열하는 괴벨스. 이들은 전투의 최일선으로 보내지기엔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습니다. 그래도 사진 속의 이들은 최소한 장비는 지급받았습니다.

  거기에 4월 25일, 엘베강 연안에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서쪽에서 들어온 미군과 동쪽에서 들어온 소련군이 드디어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만남으로 인해 독일군의 잔여 지역은 이제 남과 북으로 분리되었으며, 이제 독일군은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길고도 길었던 유럽에서의 전쟁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만나 서로 악수를 주고받는 미군과 소련군의 모습. 사진은 정다운 모습이지만, 이들은 은연중에 서로가 또 다른 전쟁 - 냉전을 벌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를린에 있던 독재자는 아직 자신의 전쟁을 끝내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그는 베를린을 최전선의 도시로 지정함과 동시에 도시의 요새화를 시작했고,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압박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구원하러 달려와줄 부대를 계속해서 호출했습니다. 

  시시각각 소련군의 포위가 완성되어 가는 동안, 히틀러는 탈출을 거부했습니다. 이제 베를린은 더 이상 그가 꿈꿔온 천년제국 게르마니아의 수도가 아닌, 2차 세계대전의 끝을 아쉬워하는 사신의 둥지처럼 마지막 지옥도가 될 준비를 마쳤습니다.



(23부에서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