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덴 대공세, 개시!
마켓가든 작전 이후 양측의 상황
마켓가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서부전선의 연합군은 다시 한번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194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확정된 상황에서 더 이상 불필요한 희생을 낳는 대공세보다는, 착실하게 전력을 보충하면서 다음 공격지점을 선정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전선의 연합군 부대들은 어마어마한 보급 부족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건 연합국의 보급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빠른 진격속도와 거리로 인해 보급품이 전방까지 추진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지요. 거대한 항구인 셸부르 항구는 독일군의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노르망디 인근의 간이 항구에서 추진되는 보급품은 거의 수백 킬로가 넘는 대장정을 떠나서야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경우도 마켓가든 작전에서의 승리로 연합군의 공세를 꺾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쟁의 판세를 뒤집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우세한 연합군의 대공세를 한 번 막아낸 것에 불과했지요. 독일군은 이러한 자신들의 입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연합군의 다음 공세를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정예병력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구요.
그때, 일일이 최일선에 간섭하며 장군들의 학을 떼게 만들었던 히틀러가 다시금 어마어마한 도박카드를 들고 장군들에게 제안합니다. 동부전선으로 가야 할 최후의 예비 기갑전력을 몽땅 모아 아르덴 숲을 다시 한번 돌파, 연합군의 후방으로 질주하자는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벨기에의 항구 '안트베르펀'을 확보하여 연합군의 보급품 부족사태를 더 심화시킬 수 있으며, 운이 좋다면 또 한 번 연합군을 포위섬멸 해버릴 수도 있었지요.
룬트슈테트나 발터 모델 등 여러 장군들은 히틀러의 이 공세작전 계획에 반대합니다. 당장 동부전선에서도 예비 병력이 없어서 비명을 지르는 중인데, 그 병력을 빼서 방어작전도 아니라 피해가 큰 공세 작전을, 서부전선에서 편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장군들은 어이없어했지요. 그러나 이미 1944년 7월에 있었던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과 뒤이은 숙청으로 인해 히틀러의 발언권은 더없이 강력했고, 결국 작전은 강행됩니다.
작전명 가을안개(Herbstnebel), 아르덴 대공세를 이렇게 준비되었습니다.
비록 마켓가든 작전은 실패했지만, 연합군은 독일군에 비해 어마어마한 숫적우세를 바탕으로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휘르트겐 숲 전투 등에서 끈질기게 버텨주고 있었지만, 이미 전략적 수준의 공세 능력은 잃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사실 연합군의 이런 분석은 조금 성급하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의 기갑 예비전력'까지 모조리 끌고 올 정도로 무모할 것임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지요.
1944년 12월 16일, 추운 겨울날 새벽의 고요를 깨면서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강력한 항공전력을 피하기 위해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전진하기 시작하였고, 경험 많은 보병부대가 연합군의 주요 진지를 타격하며 기동로를 확보했습니다. 이후 점차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보병이 확보해 둔 기동로에 독일군 전차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으로 미 8군단의 정면을 박살 내며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연합군은 아르덴의 울창한 숲으로 독일군 대규모 기갑부대가 공격해 오는 주공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이러한 기습은 완벽히 맞아떨어졌습니다. 4년 전의 아르덴 기습이 다시 한번 성공할 수 있는지는 기상상태, 그리고 독일군 전차부대의 연료 보유량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공세 초기, 독일군의 공세는 상상이상으로 강력했습니다.
게다가 전차부대의 강력한 공격과 더불어, 독일군의 정예부대인 공수부대, 팔쉬름예거(Fallschirmjäger)가 미군의 후방으로 공수강하를 마치고 교란작전에 나서면서 이러한 혼란은 가중되었습니다. 영어 회화가 가능한 자들로 이뤄진 이들은, 미군 군복을 입고 다니면서 후방에서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표지판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두어 후방에서 전방으로 이동하는 부대들이 완전히 뒤엉키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독일군은 완전한 기습을 이뤄냈습니다. 병력의 규모와 기습의 장소, 그리고 시간과 그 방법까지 그야말로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에 걸맞은 수준의 과감한 공세였습니다. 독일의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것처럼 "정상인이라면, 동부전선에 집중할 것"이라는 명제를 완전히 뒤집은 히틀러의 독선이 낳은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독일군의 초기 공세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미군이 사로잡히거나 전사하였고, 미군의 최일선은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타 지역에서 원군이 오기 전까지, 미 8군단은 독일군에게 일방적으로 강타당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기갑부대는 다시 한번 4년 전의 영광을 같은 장소에서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세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미군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젠하워 원수는 즉각 자신의 모든 권한을 활용하여 부대를 지휘하기 시작하였으며, 예비로 보유한 부대들을 즉시 아르덴 인근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독일군의 돌파구 확장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자신들의 후방을 휘젓고 다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 내부에서도 분투의 열기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아르덴 숲 남쪽 입구의 주요 길목인 바스토뉴(Bastogne)에서 독일군에 포위된 미 101 공수사단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거의 신들린 수준의 기동방어를 통해 독일군의 공세를 끝끝내 막아내면서 독일군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독일군은 이들과 씨름하기보다는, 이 전투를 끝내고 빨리 더 진격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독일군 측에서 바스토뉴 포위망에 장교를 파견, 미군에게 항복을 종용합니다. 독일군은 이들에게 명예롭게 항복할 것을 권유함과 동시에,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강력한 포병공격으로 포위망을 섬멸하겠다는 요구사항도 분명히 전달하였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요구를 들은 101 공수사단의 맥콜리프 장군은 답장에 단 한 단어만을 써서 보냈습니다.
"X이나 먹어!"(NUTS!)
이 답장을 받아 들은 독일군은 포위섬멸전을 예고했고, 실제로 101 공수사단은 사기는 높았지만 큰 위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12월 23일이 되면서 날씨가 맑아졌고 연합군의 항공작전이 개시되면서 전황은 빠르게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항공작전을 통해 포위된 여러 부대에 공중보급이 가능해진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전폭기와 폭격기가 해당 공역에 등장, 독일군 기동부대에 지속적으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은 점차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기습이 시작된 지 열흘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라 연합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고, 연합군의 항공작전이 시작된 데다가 특히 아르덴 숲에 오밀조밀하게 펼쳐져있는 산림지대는 독일군 전차들의 빠른 기동을 제한했습니다.
독일군의 기계화부대는 4년 전처럼 소형전차들이 아닌,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력해지고 거대해졌기 때문에 산길을 통한 전진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거기다, 애초에 부족한 연료로 시작했던 공세였기 때문에 연료가 바닥을 드러냄과 동시에, 계획단계에서 연합군의 연료저장소를 탈취하기로 했던 목표가 실패하면서 점차 작전성공은 어려워졌습니다.
여기에 더해 독일군이 비록 초기에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지만, 명색이 공세작전이었기 때문에 기갑부대의 피해가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점차, 독일 장군들도 이제 공세작전을 멈추고 남아있는 전력이라도 살려 제대로 활용, 방어작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히틀러에게 건의하였지만, 히틀러는 완강히 반대하였습니다.
해가 바뀌어 1945년 1월 1일, 독일군은 마지막 공세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던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의 마지막 대규모 공중작전인 보텐플라테(Bodenplatte)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에 발맞추어 마지막 남은 독일군 기갑부대가 각자의 통로를 이용하여 미군의 정면을 타격하였습니다. 미군도 이에 대응하면서, 벌지 전투의 막바지는 치열한 혈전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1주일 간의 치열했던 혈전 끝에, 독일군이 결국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면서 공세는 끝이 나고 맙니다. 보텐플라테 작전이 초기에 연합군 공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 데엔 성공했지만, 문제는 연합군은 이를 상쇄할 만큼의 보충 전력이 충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합군의 공군이 계속해서 날아올라 제공권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일군 기갑부대를 하늘에서부터 타격하였고, 독일 기갑부대는 돌출부 내에서 점차 고립되어 갔습니다.
1월 7일, 히틀러가 마지못해 여러 장군들의 철수건의를 수락하면서 작전이 중지되었고, 독일군은 다시 공세를 시작한 곳으로 후퇴하였습니다. 독일군은 연합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강요하는 데엔 성공하였지만, 작전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했고, 그 스스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야 말았습니다. 이 공세에 참가했던 독일군 기갑부대는 원래 동부전선의 소련군과 싸우러 가야 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볼 때, 이 작전의 실패는 이제 서부와 동부 모두에서 독일에게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방어를 해도 모자랄 판에, 가능성이 희박한 공세작전에 주력부대를 모두 잃으면서 독일은 이제 공세작전의 여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야말로 빈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전락해 버렸고, 마켓가든 작전에서 연합군을 패퇴시키면서 겨우 안정화시켜 놓은 서부전선은 이제 활짝 열리게 돼버린 것입니다.
연합군은 이제 독일 국내로의 진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라인강 인근에 미군 부대가 집결하기 시작했고, 라인강을 넘어서 독일 남부로의 공격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공세의 소식을 전해 들은 소련군도 1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오데르 강 인근에서 공세를 시작하면서, 베를린을 향한 레이스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독일군은 이제 마지막 호흡기를 떼었으나, 히틀러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양측에서 몰려드는 연합군과 소련군의 사이에서, 히틀러는 베를린을 최일선 도시로 지정하여 마지막 결전을 벌일 요량이었습니다.
(2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