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0월, 세계 역사상 가장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던 '레이테 만 해전(battle of leyte gulf)'은 미군의 완벽한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일본 해군은 이 패배로 인해 모든 정규 항공모함을 잃었고, 야마토 함과 같이 일본 해군의 상징과도 같았던 전함 무사시도 잃으면서 사기도 곤두박질쳤습니다. 게다가 1944년 중반에 잃어버린 사이판에서 날아오른 미국의 폭격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본토를 타격하고 있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사이판 전투의 패배로 인해, 도조 히데키가 총리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정국의 주도권은 군부가 쥐고 있었습니다. 뒤를 이은 후임 총리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연합국과의 강화를 추진한다는 점에서는 도조와 달랐지만, 그 강화를 위해 연합군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어 조금이나마 유리한 전황에서 강화를 맺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즉각 종전파가 아니었습니다.
1944년 출범한 고이소 내각. 도조에 이어 후임 총리가 된 고이소는 종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 이전에 미군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종전 이후 수많은 군부 인사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밝혔듯이, 사실상 사이판 함락 이후 전쟁에서의 승리, 버티는 것조차 아예 불가능해져 버렸음에도 말이지요.
1945년 1월, 제86회 제국 의회에서 시정 방침에 대해 연설하고 있는 고이소 총리.
레이테 만 해전과 대만 항공전에서 각각 해군과 항공전력을 착실하게 말아먹은(?) 터였기 때문에, 이제 일본이 활용할 수 있는 항공전력은 본토의 항공전력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본토도 이미 미국 폭격기에 의해 공습을 당하고 있어, 이들을 활용하여 오키나와나 이오지마 등의 방어전에 투입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미군은 이러한 폭격기들을 위한 호위 전투기를 띄울 수 있는 기착지를 확보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이오지마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2월이었습니다.
이오지마 전투 - 일본군의 절치부심(?)
그러나 일본군 또한 이오지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빼앗긴다면 이제 미 폭격기는 강력한 P-51 머스탱 전투기의 호위를 받을 수 있게 될 테고, 그렇다면 본토 방공작전은 효율성이 급감하게 될 것이라는 것두요. 이를 위해 일본군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중장을 이오지마 방어작전의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이를 위한 방어작전에 고심하게 됩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의 사진.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개전 이전부터 승전에 대한 가능성을 낮게 보았으며, 그에 따라 이오지마 수비 작전을 재검토하였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한 가지 새로운(?) 방어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기존과는 다르게 미군의 해안상륙을 거부하기 위한 방어진지를 해안에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에는 해안에 바로 인접하여 방어진지를 구축, 바다에서 막 육지로 들어오는 미군 부대와의 교전을 통해 미군의 상륙 그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리바야시 중장은 미군의 강력한 함포사격과 항공기 폭격으로 인해 그러한 진지는 전투개시 몇 분만에 전부 날아가버릴 것으로 예상하였고, 오히려 미군의 상륙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 전력을 내륙 지역에 강력하게, 여러 겹의 종심방어로 편성하여 미군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강요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오지마에 강습 상륙을 진행하고 있는 미 해병대의 모습. 이제 이들은 새로운 전술의 일본군을 맞아 싸워야만 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의 이러한 생각의 기반에는, 미군의 상륙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다는 목표는 없었습니다. 이미 전력차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최대한의 많은 피해를 입힘과 동시에 시간을 벌어, 조금이라도 향후 대세에서 일본 측에게 유리한 시간과 조건을 마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상륙을 허용하고, 내륙에서 치열한 지연전을 펼칠 요량이었습니다.
이오지마 상륙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거대한 함포를 사격하고 있는 미 해군전함 USS 뉴욕의 모습. 미군의 해군 전력은 이제 일본 해군을 훨씬 압도했습니다.
이윽고 미군의 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미 해병대는 강력한 포격과 폭격을 동반한 채로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일본군이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예상한 해안이 잠잠하자, 미 해병대는 약간 당황스러운 느낌마저도 들었습니다. 미 해병대가 천천히 해안에서 벗어나려고 이동을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 일본군의 강력한 화력이 순식간에 퍼부어졌습니다.
이오지마 해변에 상륙작전을 펼치고 있는 미 해병대의 모습. 강력한 포격으로 인해 생긴 포탄구멍이 인상적입니다. 1945년 2월 19일 촬영.
이런 기습으로 인해 미군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이 이후에 전열을 가다듬고 제대로 된 공세를 펼쳤지만, 잘 준비된 방어 진지와 일본군의 준비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패색이 짙어지면 전부 할복하거나 반자이 공격을 시도하는 옥쇄를 금지시키고, 미군의 전력이 너무 강하면 후퇴하여 차후 진지에서 2차 방어를 실시하라고 하는, 군사학적으로 지극히 정상인(그러나 일본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지시를 내립니다.
미군의 37mm M3 대전차포가, 일본군의 수비거점인 수리바치 산의 일본군 동굴진지에 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은 요새화 이후 미군에게 피해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고, 결국 구리바야시 중장 또한 마지막 야간 돌격조에 직접 참가, 전사하면서 이오지마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히 요새화된 이오지마에서 산발적인 유격전이 계속 진행되었고, 일주일 만에 손쉽게 점령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이오지마에서 미군은 호위 항공모함 1척이 침몰하고, 약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약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전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일본의 자살특공대인 카미카제가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도 물론 이러한 자살특공이 있었지만, 국가 단위로 명령이 하달되고 부대 단위로 조직되어 임무를 수행한 것은 이오지마 전투가 처음이었습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바로 그 사진입니다.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서도 관련된 사연이 잘 설명되어 있지요. 연출사진이지만, 그 역동성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오지마는 미군이 확보하게 되었고, 이제 폭격기의 항로에서 미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오지마 전투 - 철의 폭풍(鉄の暴風)
이제 미군의 공격 방향이 중요했습니다. 원래 미군의 목표는 대만 - 중국으로 향해 대륙에서 일본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해방시킨 뒤 일본을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륙에서의 일본군이 아직 강력한 점, 그리고 이미 대만의 일본군 항공전력이 무력화되었다는 점이 고려되어, 오키나와를 통해 일본 본토로 바로 공격해 들어가는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일본도 이러한 미군의 낌새를 눈치채고, 괌 전투를 전후하여 정예 전력을 오키나와에 투입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오키나와는 물론 항로와 비행장 등의 군사적으로도 고가치 목표였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본토에서 매우 근접한 섬이었다는 점은 일본군 수뇌부의 심리적 안정감을 무너뜨리기 아주 적절한 대상이었습니다. 미군은 오키나와 공략을 위해 약 50여만 명의 병력을 밀어 넣었고, 일본도 그 자신들로서는 매우 많았던 15만 명을 투입하면서 이 전투가 매우 격렬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이오지마 해변으로 달려가고 있는 미 해병대의 LVT뒤로, 오키나와를 포격하고 있는 미 전함 USS 테네시의 모습. 1945년 4월 1일 촬영.
1945년 4월 1일, 미군의 오키나와 본섬 상륙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오지마에서 보여준 효과적인 방어전술에서 착안했는지, 해안에 대한 방위보다는 내륙에서의 지연전에 집중하였습니다. 이윽고, 내륙으로 미 해병대가 진출하면서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은 험난한 지형과 각종 시설물을 방어요새화 하였고, 이오지마 전투와 동일하게 미군에게 큰 인명피해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미 해군 전함 USS 아이다호가 오키나와 해변의 상륙지점에 함포 지원사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함포사격인 미 해병대 상륙작전의 전조 중 하나였습니다. 4월 1일 촬영.
그러나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은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특히 미군은 화염방사기를 통해 진지와 동굴에 숨어있는 일본군을 하나하나 소탕해 나가면서 차츰 섬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 일본 본토에서 날아온 항공기들의 카미카제 공격은 지속되었습니다.
오키나와 방위를 위해, 일본 해군은 마지막 공세작전을 실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직까지도 살아남아있던 거대전함 '야마토'를 오키나와로 출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연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결국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는 편도 항행을 위한 연료인 2,500톤만이 지급되었습니다. 이미 일본 해군도 야마토가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지요.
미군 항공기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 야마토의 마지막 모습. 거함 거포의 시대가 끝나는 장렬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해전은 항공전의 시대가 찾아오게 된 것이었지요.
그러나 야마토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미군의 거대한 전함들과 처절한 포격전 끝에 격침된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오키나와에 도착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미 항공모함에서 날려 보낸 항공기들에 의해, 실제로 적함을 찾아보지도 못하고 공해상에서 거대한 폭발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야마토 전함도 허무하게 스러지자, 오키나와 방위를 위한 일본군의 모든 행동은 거의 종료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미군의 공세를 기다리면서 그저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지요.
야마토가 남긴 마지막 거대 폭발. 이 버섯구름은 일본 본토인 규슈에서도 식별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버섯구름의 높이는 약 6km가 될 정도였습니다.
오키나와 전투가 격렬하게 나아가던 5월 초, 오키나와의 현장에서는 좋은 뉴스가 퍼져나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구의 반대편에서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는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다고 하는데, 현장에 있는 미군에게는 꿈과도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지요. 태평양 전선의 미군은 악랄하고 처절하게 저항하는 독종인 일본군과 문화적 충격을 받아가면서 지옥도를 쌓아 올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험난한 전투의 와중,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 미 제77보병사단 병사들의 모습. 그들에게 아직 종전은 너무나 먼 이야기였습니다.
카미카제 공격을 받고 불길에 휩싸이는 USS 벙커힐. 본토에서 가까운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특성은, 본토로부터 날아오는 카미카제 항공기의 위협에 심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가지 예시로, 일본군의 카미카제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심각해졌습니다. 특히 1945년 5월 11일, 미 항공모함 USS 벙커힐이 카미카제 2대의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고, 약 60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낳았습니다. 벙커힐은 다행히도 격침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전쟁에서는 더 이상 활약할 수 없었습니다. 종전의 그 순간에도, 벙커힐은 수리를 위해 조선소에 있었습니다. 카미카제는 물론 비효율이었지만, 그 수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카미카제에 공격당해 불길에 휩싸여 있는 영국 해국의 HMS 포미더블. 1945년 5월 4일 촬영.
오키나와 전투는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동굴에서 죽어가는 일본군 잔여부대와 함께, 오키나와의 주민들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옥쇄명령을 민간인들에게도 강요하였고, 이러한 프로파간다로 인해서였는지 주민들은 항복하기보다는 스스로 절벽에서 투신하는 등의 방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일본군과 그 민간인들의 행동은, 미군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미 제96보병사단의 소총수들이 능선 고지에서 일본군의 진지에 사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미군은 압도적이었지만, 하나하나 소탕하는 데엔 너무나 많은 인명손실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저항했습니다. 특히 슈리성을 기점으로 구성된 일본군의 방어진지는 꽤 잘 편성되어 있었고, 작전의 목적이 "미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는 것이었기에 격렬한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미군은 분명히 승리하고 있었지만, 항복조차 않고 버티는 이 독종에게 슬슬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습니다.
1945년 6월 23일,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거의 종결되었고, 미국의 승리로 전투는 끝났습니다. 미군은 여기에서 약 4만여 명이 넘는 전사상자를 낳았습니다. 일본은 전사상자가 10만이 넘어가기도 했지요.
전투종료 후 미국의 고민 - 일본 본토 상륙, 괜찮을까?
일본의 이러한 격렬한 저항은 미군으로 하여금 "작은 섬도 이 모양인데, 본토에 상륙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걱정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점차, 현재 개발되어가고 있는 미국의 "신형폭탄"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개를 낳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