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패망
1945년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인 바로 그날에 소련군은 히틀러를 위한 거대한 생일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4월 22일 오전 08시 30분, 소련군의 야전포병부대가 베를린 시내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문에 파편이 튈 정도의 파괴력으로 베를린을 강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군 폭격이 아닌 포병의 포격이었다는 점에 베를린 시민들은 망연자실했는데, 이는 그만큼 소련군의 지상부대가 베를린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소련군은 베를린 시내로 빠르게 진입하지 않고,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베를린을 감는 형태로 휘몰아쳤습니다. 평소 같았더라면 강력한 독일군의 기갑예비대가 소련군의 측면을 강타하며 이것을 분쇄했겠지만, 이미 전쟁 말기의 독일군에겐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남은 독일군의 잔여부대는 그저 소련군의 포위를 지연시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혼자만의 망상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편집증적이고 신경질적인 이 독재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부대들을 지도 위에서 이리저리 이동시키며 자신만의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완전히 해체되었거나 전멸한 부대의 깃발들도 히틀러의 지도 위에서는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측근들은 히틀러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정확한 보고를 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 와중에 히틀러는 SS의 슈타이너 장군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주변의 다른 부대를 급조하여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고, 그 부대의 지휘권을 슈타이너에게 준 것입니다. 슈타이너가 받은 명령은 현재 베를린을 포위하려는 소련군의 측면을 강타하여 분쇄함으로써 베를린을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슈타이너가 받은 병력은 해체직전의 미미한 소부대들이었고, 탄약과 연료부족으로 인해 공세는커녕 현재 위치를 고수하는 것 마저 기적적일 정도였습니다.
결국 슈타이너의 공세는 실시되지 못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히틀러는 자신의 지하벙커에서 장군단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던 독일 장교단이 자신을 배신했다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소련군이 눈앞까지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전쟁을 지휘하던 그가, 처음으로 패배에 대한 말을 입 밖으로 꺼냈습니다.
"우린 전쟁에서 진거야!"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Alfred Jodl) 장군이 발터 벵크(Walther Wenck)가 이끄는 제12군을 서부전선에서 이동시켜 베를린을 구원할 수 있다고 히틀러를 설득했습니다. 히틀러는 마지못해 이 작전을 승인했고, 벵크는 자신의 마지막 부대를 이끌고 제9군과의 연결을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이자 유일한, 베를린 구원의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제12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수많은 소련군에게 난타당한 제9군은 결국 소련군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에게 밀려나게 되었고, 4월 23일 늦은 밤이 되자 베를린 외곽에선 독일군 부대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소련군의 거대한 야포들과 전차부대가 자리 잡게 되었지요. 베를린이 포위되었습니다.
4월 24일, 독일군의 발악적인 최후 방어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베를린 포위망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전쟁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베를린 시내에는 즉각 특수임무부대가 돌아다니며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와 노인까지 모두 강제징집하였고, 이를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교수형을 당한 이들의 목에는 "겁쟁이!", 혹은 "배신자!"라고 쓰인 이름표가 걸려있었습니다.
현역 군인들, 그중에서도 엘리트인 무장친위대에게도 보급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당연히 국민돌격대에게는 제대로 된 무기조차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소련군의 전차를 막기 위한 휴대용 대전차무기, 판처파우스트(Panzerfaust)만이 소량 지급될 뿐이었습니다. 소련군 전차에 사격을 하고 난 뒤, 생존성은 전혀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마지막 발악과도 같았습니다.
독일 쇠르너 장군이 지휘아래 소규모 반격작전이 이어졌지만,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이었습니다. 소련군은 베를린의 외곽 방어선을 일소하고, 이제 시가지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히틀러는 헬무트 바이들링 장군을 베를린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모든 지휘권을 일임합니다.
그러나 포위된 베를린을 방어할 병력은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모두 포함한 약 4만 5천여 명의 병력, 그리고 베를린 경찰들과 히틀러 소년단(유겐트), 그리고 빈약한 무장의 국민돌격대가 전부였습니다. 베를린의 서쪽은 제20 보병사단이, 북쪽은 제9공수사단, 북동쪽에 기갑사단 '뮌헨베르크(Müncheberg)'가, 동쪽에는 제11 SS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Nordland)'가 각각 위치했습니다.
내부로 진입해 오는 소련군을 맞아, 독일군 각 부대는 베를린의 밀집된 시가지의 건물에 거점을 구축하고 이에 대항하였습니다. 마치,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이 했던 것과 같은 움직임이었습니다. 소련군은 베를린을 각각의 구획으로 나눈 뒤 하나하나 소탕해나가야만 하는 입장에 처했습니다. 도시지역 작전의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시였습니다. 압도적인 전력임에도, 완전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었지요.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의 명장, 소련의 추이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제8근위군은 베를린의 남쪽을 찌르듯이 공격해 들어왔고, 이윽고 템펠호트 공항 방향으로 공세를 지속합니다. 이를 막기 위해 독일 기갑사단 뮌헨베르크가 부리나케 달려와 교전을 벌이면서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나, 문제는 뮌헨베르크의 빈자리였습니다. 소련군은 사방에 있었습니다. 포츠담 광장도 격전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몰트케 다리 인근에서는 진압하려는 소련군과 막으려는 독일군의 처절한 백병전까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4월 29일, 소련군이 몰트케 다리를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몰트케 다리를 건너면서 이제 독일 정부의 중심지인 국회의사당과 크롤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티어가르텐이 교전에 노출되었습니다. 이 널찍한 대로변에, 소련군이 무자비하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은 이제 지난 몇 년간 자신들이 유럽 전역에 퍼뜨린 지옥도를, 자신들의 수도 한복판에서 재현당하게 되었습니다.
몰트케 다리 바로 앞의 내무부 건물에서 독일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소련군의 야포 사격이 가해지자 곧 잠잠해졌습니다. 내무부 건물이 확보되자 소련군은 자유롭게 다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소련군이 광장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4월 29일 새벽 04시경,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제 죽음을 위한 착실한 단계를 밟기 시작한 것입니다.
4월 30일, 소련군이 독일 국회의사당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그날 늦은 시각에 의회에 진입하였고, 내부에는 독일군 무장친위대가 마지막 방어선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베를린 동물원 인근의 대공포대가 아직 티어가르텐 인근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이를 피해서 이동해야 했습니다. 의사당 내부에서는 매우 치열한 교전에 지속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같은 날, 히틀러는 결국 자신의 지하벙커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남아있던 휘발유를 이용해서 그 시신은 철저하게 화장되었고,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총통직은 다시 대통령과 총리로 나뉘었고, 대통령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가, 총리엔 요제프 괴벨스가 각각 임명되었습니다. 5월 1일, 크렙스 장군의 협상단이 교전지역을 뚫고 이 사실을 소련에게 알렸으며, 교전중지를 위한 협상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소련 측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크렙스는 자신에겐 그것을 수용할 권한이 없다면서 거부하면서 교전은 계속되었습니다.
5월 1일 늦은 시각, 국회 의사당이 드디어 소련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소련군은 점령 이후 즉각적으로 붉은 깃발을 게양하여 이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이를 본 독일군 잔존부대는 최종병기 티거 2 중전차를 동원해 건너편인 크롤 오페라 하우스를 탈환할 정도로 치열한 교전은 계속되었습니다. 다음날인 5월 2일이 되고 주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소련은 베를린 전투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진을 촬영하고자 했습니다. 그 사진이 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바로 이 사진이지요.
5월 2일이 되자, 소련군이 대부분의 정부 주요 시설을 점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베를린 방어 사령관 헬무트 바이들링 장군은 같은 날 이른 아침 소련군에게 공식적으로 항복했으며, 이러한 항복사실을 확성기를 통해 도시 전역에 방송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살아남아 저항하고 있던 독일군은 이 방송을 듣고 자신의 거점에서 나와 무장해제 후 항복하였으나, 몇몇 광신도적인 무장친위대 부대는 끝까지 산발적인 교전을 지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대들이 서쪽으로의 탈출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비단 베를린뿐만 아니라, 베를린 포위망 바깥에서 소련군과 교전하고 있던 많은 독일군 부대들이 그랬습니다.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서부전선의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들이 지난 4년간 소련 영토에서 저지른 가혹행위들을 돌려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소련군은 이제 나치 독일의 심장부, 베를린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난 4년 동안의 거대한 인종 절멸전쟁에서 기어코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 의해 자행된 악행들로 인해, "복수"라는 개념이 잉태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의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했으며,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소련군 사령부는 이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선의 그 모든 병사들을 일일이 다 단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길고 길었던 2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5월 8일에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하였고, 이에 소련이 반발하자 다음날인 5월 9일에 소련을 포함한 전체 연합군에게 다시 한번 항복협정을 조인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모든 "세계대전"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마지막 적, 일본 제국은 아직도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연합국의 승리는 의심할 여지없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수단으로 전쟁을 끝내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25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