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계획이 불러온 파괴력
1945년 5월, 히틀러의 사망과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유럽 전선에서의 세계대전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태평양 전선의 전쟁은 아직도 치열했습니다. 일본 제국은 전쟁에서의 패배가 확실시된 상황에서도, "결전, 그리고 조금이나마 유리한 상황 속에서 협상제시"라는 꿈같은 목표를 가지고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이러한 일본의 집착과도 같은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는데, 주요 부대는 물론이고 오키나와의 주민들까지 집단 자결을 하면서까지 계속해서 저항했습니다. 이런 일본의 강경한 저항은 미국에게 한 가지 걱정을 불러왔습니다. "물론 전쟁의 판세로 보아 미국이 이기는 것은 확실한데, 과연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병력을 희생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이 생각은 더 나아가 "이미 이기는 게 확실해졌는데, 불가피한 아군 병력의 희생이 너무 아쉽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상황과 더불어,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또 있었습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극비에 진행하고 있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행한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트리니티 실험은,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미국의 원자폭탄의 폭발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의 성공으로 미국은 꿈에도 그리던 원자폭탄을 손에 넣게 되었고, 이는 일본의 발악적인 저항과 그 피해로 인한 미국에게 원폭 사용에 대한 강한 유혹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이 원자폭탄 개발은 미국에게는 전쟁 중반부터 실시되어오고 있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이를 위해 엄청난 예산과 자원을 투입했고, 또 이를 숨기기 위한 고도의 보안 수준 유지까지, 미국에게는 많은 것을 공들인 계획이었습니다. 전쟁의 종결은 앞두고, 병력의 희생을 아끼고 싶다는 전술적/정치적인 이유와 더불어서, 인류 최초로 개발된 원자폭탄으로 장엄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전쟁을 종결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완성된다는 유혹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2차 세계대전사>의 저자인 존 키건이 밝힌 것처럼, "굉장히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끝까지 본토결전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승리의 가능성이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군부, 특히 육군의 주도로 본토결전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준비랄 것이 전 국민에게 지급할 죽창을 준비하는 정도였지만요(...). 이미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은 고사된 지 오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를 보고, 미국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오지마나 오키나와, 사이판 등의 작은 섬을 공략하는데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던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 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임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입안된 '몰락'작전은, 그 이름과 마찬가지로 원자폭탄 수십 발과 화학무기를 총동원한 뒤 일본에 상륙하는, 그야말로 일본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1945년 8월까지 항복할 것을 일본 측에 종용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대체 다 패배해 가는 전쟁에서 왜 일본이 이렇게 버티는지 알 수 없었던 미국은, 결국 "일본인의 완전 소멸"에 준하는 협박이 아닌 이상, 이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항복을 시킬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제시한 항복안 - 포츠담 선언을, 일본 정부가 "묵살"한다고 발표했고, 이는 미국에게 일본이 이를 완전히 "무시(ignore)"한다는 뜻으로 번역되었고,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원자탄의 사용을 승인하게 되는 큰 갈림길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제 원자폭탄의 군사적 효과와 더불어 정치적 상징성까지 고려하여, 투하지점을 선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이제 일본의 주요 도시들 중, 원자폭탄의 위력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중요 목표 지점을 선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도쿄나 오사카는 미 항공대의 융단폭격으로 인해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박살 나있던(...) 상태였기에, 미국은 투하지점을 선정하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선정된 주요 도시들은 히로시마, 고쿠라, 교토 등지로 선정되었습니다. (의외로 나가사키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협의를 거치던 도중 일본인의 문화적/역사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교토'는 폭격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전후 일본 국민감정을 다스리는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교토는 제외됩니다. 이 교토의 대체자로 등장한 것이 바로 '나가사키'였습니다.
다양한 협의의 결과, 히로시마 / 고쿠라 / 나가사키 / 니가타의 4곳으로 폭격 목표가 좁혀졌고, 최대한의 폭발효과를 거두기 위해 군인과 과학자들로 이뤄진 회의가 줄곧 이어졌습니다. 산과 계곡의 형태와 군수시설의 위치 등, 미국은 최대한의 고심을 통해 정확한 폭발지점을 선정하였습니다.
이제 투하 장소가 선정되었으니, 다음은 "어떻게" 투하할 것인지 방법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 항공대가 운용하던 B-29 폭격기가 그 주인공으로 당첨되었고,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개발되어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이를 조종할 조종사들은 매우 엘리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첫 원자폭탄 투하의 영예를 안은 것은 바로 '에놀라 게이(ENOLA GAY)'였습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3시경,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폭격기 B-29가 티니안 비행장에서 이륙했습니다. 워자폭탄이 기존의 폭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기 때문에, 이륙 순간 비행기가 기우뚱하며 천천히 하늘로 올랐습니다. 활주로가 너무 짧은 듯 보일 정도였지요. 이제, 에놀라 게이는 세계 최초의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거대한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이후 아침 8시경, 청명한 히로시마 하늘에 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 히로시마 시민들과 방공대원들은 공습에 대비하려 하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두어 대만 날아온 폭격기의 항적을 보고 마음을 놓고 다시 생업에 들어갔습니다. 대규모 폭격이 아니라, 정찰을 하러 온 줄로만 안 것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여름날 아침, 에놀라 게이는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이윽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기체가 마구 뒤흔들리고, 엄청난 섬광이 온 세상을 감쌌습니다.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8시 16분, 히로시마 상공에서 성공적으로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섬광, 그리고 뒤이은 폭발과 후폭풍은 그야말로 히로시마를 단 한순간에 파괴했습니다. 시내 곳곳에 발생한 화재는 후폭풍으로 인해 계속해서 번져나갔으며, 이로 인해 폭발로 인해 사망한 1차 사망자 외에, 살아남아 신음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뻗어왔습니다. 폭발로 인해 발생한 먼지가 대기 중으로 떠올라 날은 흐렸고, 도시는 거대한 불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이후, 낙진이 뒤섞인 비가 내렸고, 이제 폭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방사능의 공격으로부터도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단 한 발의 폭탄이, 인구 수십만의 히로시마를 단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화시킨 것이었습니다. 해당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히로시마 성에 있었는데, 이때 징집된 여고생의 생존증언이 재밌습니다.
지하 벙커에 있던 그녀는 엄청난 폭발에 놀랐는데, 이후 밖을 내다보니 히로시마가 완전히 박살 난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윽고 바깥에서 쓰러진 군인 한 명이 "전멸! 신형폭탄에 당했다!"는 한마디 말을 남겼고, 이를 듣고 인접 도시인 후쿠야마의 부대에게 아직 살아있는 회선을 통해 전화로 전멸상황을 보고했다고 합니다. 후쿠야마의 부대장은 "갑자기 전멸이라니? 이유를 말해!"라고 따졌고, 그녀는 "신형폭탄"이라고 군인들이 말했다고 했다는, 그런 일화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는 미국과 일본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일본쪽에게요.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현장으로 급파된 의료인력들과 과학자들은 히로시마의 실상을 확인한 뒤 원자폭탄임을 확인하였으나, 일본 군부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정부는 강경파와 화평파로 나뉘어 격렬한 회의가 계속되었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화평파는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빨리 항복을 해야 한다"라고, 강경파는 "협상이 진행 중인데, 저자세로 나가면 더 불리한 조건으로 해야 할 것"이라면서 대립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난리가 난 일본 정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음 재앙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대응책을 고심했습니다. 8월 8일에서 8월 9일로 넘어가는 야심한 시각,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소련이 대일본 선전포고를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인 사토 나오타케에게 전달했습니다. 이윽고, 만주지역에서 거대한 소련군의 포격이 시작되며, 전차 웨이브가 개시되었습니다.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작전의 시작이었습니다.
관동군은 한때 '무적의 관동군'으로 불리며, 실상 100만 대군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한 일본 육군의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주요 정예 부대는 미군과의 전투를 위해 남태평양의 섬들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전멸하였고, 남아있는 부대들은 그야말로 껍데기뿐만 남아있던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소련군의 침공 직전에 약 75만 명의 병력이 있다고 추정되었지만, 소련군은 이미 그들을 숫적 / 질적으로 모두 앞서고 있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미 최강의 기동전을 선보이던 독일군과 4년 내내 치고받으면서, 소련군의 전투교리는 이미 체계화되었고, 그것을 현장에서 실현해 낼 소련군 병력들의 숙련도도 완벽했습니다. 게다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에도 소련의 입장을 알아보려고 했던 일본의 입장을 고려했을 때, 전략적 / 외교적 차원에서 또한 완벽한 기습이었습니다.
사실 소련군이 히로시마 원폭투하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동북아시아에서의 전후 영향력 확보를 위해 참전했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는데, 소련의 만주지역 공세작전은 1944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가 확실시되자, 전후의 세계 정책 차원에서 스탈린은 아시아에 대한 공세작전도 이미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이지요. 히로시마 원폭투하 소식을 듣고, 하루이틀정도 작전개시일을 앞당기긴 했지만요.
'무적의 관동군'이라고 불리며 일본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관동군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갔습니다.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과의 기동전에서 단련된 소련군의 적수가 되기엔, 관동군은 이미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소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소련의 기습을 당한 일본 정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8월 9일 아침부터, 소련군의 만주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전회의가 진행되던 도중 급보가 회의장에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또 다른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8월 10일부터, 일본의 기상 상황은 늦여름의 악천후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미군은 이를 확인한 뒤 8월 9일을 투하일로 결정하였고, 본래 목표는 규슈 북쪽의 고쿠라였습니다. 이번에 투하될 폭탄은 팻 맨, 투하할 폭격기의 네이밍은 '복스카(Bockscar)'였습니다. 지난 작전의 주인공인 에놀라 게이는 이번엔 기상관측기로 함께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 에놀라 게이는 복스카의 진입 전 고쿠라에 미리 정찰을 간 뒤, 그곳의 기상상황을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고쿠라의 날씨가 맑다는 소식과는 달리, 막상 복스카가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을 땐 아직도 뿌옇게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습니다. 복스카는 계속해서 폭격을 위한 관측을 시도했지만,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계속 끌면 위험했습니다. 출발 직전에 연료 펌프에 문제가 있었고, 또한 일본군의 요격 전투기의 통신이 잡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 요격기가 나타나면, 원폭을 실은 상태로 공중에서 격추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복스카는 고쿠라에 대한 폭격을 과감히 포기하고, 차선책이었던 나가사키를 향해 비행했습니다. 나가사키에도 약간의 구름이 끼어있었으나, 그것을 감안하고 폭격을 강행하려던 찰나 구름 사이로 나가사키 시가지가 복스카에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가사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불운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서 두 번째 섬광이 번쩍였습니다. 거대한 폭발과 폭풍이 나가사키를 덮쳤고, 5만여 명이 넘는 나가사키 시민들이 순식간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히로시마에서의 지옥도가 다시 한번 규슈의 나가사키에서 펼쳐졌습니다. 이러한 지옥도를 뒤로하고, 복스카는 연료부족으로 오키나와에 잠시 머물렀다가, 티니안섬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하면서 폭격작전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일본 군부의 고집으로, 계속되는 전쟁에서 가공할 신형무기를 두 번이나 얻어맞은 일본은 이제 어떤 것이 되었든지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나가사키의 투하는, 히로시마의 폭격과는 다른 감정을 일본군 수뇌부에게 불러일으켰습니다. 히로시마 투하 때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혼란이 계속되었다면,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는 일본 정부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같은 날 벌어진 소련의 참전은 마지막 남은 모든 경우의 수를 일본에게서 빼앗아가버린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국은 나가사키 원폭투하 이후, 새로운 폭탄을 제조하느라 추가 폭격을 멈추게 된 이 시점에서, 다양한 외교적 라인이 급물살을 타게 되어 그나마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일본에게 있어 다행이었던 점이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미군의 항복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조건으로 단 하나, "천황제 유지"를 요구했습니다. 쇼와 천황은 그 유명한 '옥음 방송'을 녹음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장교단은 아직 전쟁을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부 장교들은 이 옥음 방송의 녹음본을 탈취하여 방송을 막고, 전쟁을 계속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궁성을 호위하는 일본군 제1근위사단이, 8월 15일 새벽 02시를 기해 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26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