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닭
새로운 시작이 많아지는 3월이다.
3월의 첫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늘 귀에 꽂고 다니던 이어폰을 잠시 빼본다.
겨울 동안 잊고 지냈던 어떤 소리들을 다시 들어보고 싶어서다.
아이들이 돌아왔다.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이 거리를 채웠다.
아이들이 많은 길에는 살아있는 기운이 돈다.
검고 두꺼운 옷을 입은 어른들만 가득한 길에서는 들을 수 없는 높낮이의 음성이 들려온다.
웃음이 크고, 발걸음이 빠르고, 대화가 끊임없다.
그 사이로 파란 잠바를 입은 남자아이가 혼자 걸어가고 있다.
열 살은 채 되어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똑바로 걷지 않는다.
직선으로 이어진 인도를 곡선을 그리며 걷는다.
왼쪽으로 살짝, 다시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피해 몸을 틀며 걷는다.
조금 더 지켜보니 나름의 규칙도 있는 것 같다.
어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떤 상상의 경계선이 그 아이 앞에 놓여 있는 모양이다.
그 선을 벗어나면 안 된다.
오늘 하루가 엉망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가끔 그런 식으로 세상을 걷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아주 충실히 지키면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나도 괜히 참여하고 싶어진다.
출근길에 작은 도전 하나를 추가해보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선을 만들어낼 상상력은 이미 많이 줄어버린 어른이니, 대신 인도의 보도블록 경계선을 밟지 않고 회사까지 가기라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해본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직 초등학생보다도 못한 부분이 있는 어른인 것 같다.
똑같은 분홍색 가방을 메고, 똑같은 청바지에, 똑같은 하늘색 패딩을 입은, 키까지 비슷한 아이 둘이 손을 잡고 내 앞을 걸어간다.
둘다 머리를 양갈래로 땋았고 그 길이도 똑같다.
뒷모습에서 알아볼 수 있는 둘 사이의 차이는 없다.
만약 둘이 뒤돌아 얼굴을 보여주더라도 나는 분명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오른쪽의 아이가 갑자기 손을 놓고 앞으로 뛰어간다.
왼쪽의 아이도 뒤따라 뛴다.
뛰는 속도마저 비슷해 둘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횡단보도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 간격은 그대로 유지된다.
나란히 멈춰 선 두 아이는 다시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다.
그때 어디선가 또래의 친구 둘이 합류한다.
네 명의 여자아이가 횡단보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선다.
각자의 가방에 달린 작은 인형들이 아이들의 대화에 맞춰 덩달아 흔들린다.
나는 슬쩍 고개를 기울여 분홍 가방을 멘 두 아이의 얼굴을 확인해본다.
역시 예상대로다.
둘의 얼굴도 똑같다.
똑같은 얼굴인데도 친구들은 전혀 헷갈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 아이들에게는 둘이 완벽하게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듯하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직 이 길이 익숙해 보이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더 특별한 시작을 하는 아이들이다.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서 있다.
등에는 자기 몸만 한 가방이 매달려 있고, 손에 든 실내화 가방은 바닥을 끌 듯 말 듯 흔들린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잠시 뒤 교문 앞에서 엄마와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처음 보는 어른을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을.
엄마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얼굴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다.
그 아이들의 6년 뒤 모습도 이 길 위에 섞여 있다.
몸집보다 한 사이즈쯤 커 보이는 활동복을 입은 아이들이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이다.
같은 중학교에 가게 된 친구들은 나란히 걸어간다.
새 활동복을 입은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다.
얼굴에는 설렘보다는 약간의 긴장이 묻어 있다.
더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걱정일까.
성적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세계의 입구에 막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 내 8살과 14살의 3월 첫 월요일도 아마 지금 길 위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 고등학교 앞을 지나간다.
학생들에게 누군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입시학원 전단지인 것 같다.
교문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들 앞에 종이를 내밀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내가 그 앞을 지나가면 혹시 나를 고등학생으로 착각하고 전단지를 건네줄까 문득 궁금해진다.
괜히 발걸음을 조금 늦춰 본다.
하지만 전단지는 나에게 오지 않는다.
다시 보니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조차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인다.
17살의 3월 첫 월요일은 또렷하게 떠오른다.
나는 교문을 통과하지 않았다.
이미 교문 안에 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학교에 입학했고, 첫 등교 전날 기숙사에 들어와 있어야 했다.
인생의 첫 독립이었다.
이른 아침 6시 30분, 기숙사 앞에 모여야 했다.
처음이라 그런지 1학년들은 말끔히 씻고 나왔다.
머리도 단정했고 옷도 깔끔했다.
반면 2, 3학년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눈곱도 채 떼지 않은 얼굴로 나와 있었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세상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1학년들도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대학교의 시작도, 대학원의 시작 역시 3월이었다.
술과, 연구실 생활이라는 시작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퇴근길에는 닭을 한 마리 샀다.
저녁으로 찜닭을 만들기로 했다.
식당에서 사 먹으면 꽤 값이 나가는 음식이라 기분을 내기에 좋다.
먼저 닭을 팬에 올려 굽는다.
기름이 지글지글 올라오기 시작할 때쯤 소금과 페퍼론치노를 넣고 함께 볶는다.
간장, 설탕, 굴소스를 차례로 넣는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을 비밀 재료 하나를 더한다.
짜장라면 스프다.
들키지 않도록 스프 봉지는 재빨리 처리하고, 얼른 냄비 속에 뒤섞어 버린다.
파와 양파, 생강, 후추를 넣고 한 번 더 볶다가 물과 감자, 당근을 넣는다.
약한 불에서 천천히 졸인다.
20분쯤 지나면 불려 둔 당면을 넣고, 반숙으로 삶아 둔 계란도 함께 넣는다.
마지막으로 5분 정도 더 졸인다.
불을 끄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살짝 섞어 주면 완성이다.
완성된 찜닭을 올려놓자 아내가 식탁를 들여다본다.
"오늘 무슨 날이야?"
근사한 요리를 했다는 표정이다.
나는 회사에서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출근해 컴퓨터를 켜니 메일이 17통 와 있었다.
어제도 그렇게 늦게 퇴근한 것 같지는 않은데 누군가는 야근을 했거나,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일찍 출근한 모양이다.
그중에는 사내 시스템이 자동으로 보내는 메일도 섞여 있었다.
보통은 가장 아래 메일부터 차례로 확인한다.
그런데 먼저 열어 보라고 유혹하는 제목의 메일이 하나 있었다.
'긴급'이라는 딱지가 붙은 메일은 아니었다.
대신 훨씬 기분 좋은 단어로 시작하고 있었다.
축하.
다가오는 입사기념일을 축하한다는 메일이었다.
회사에서 준비한 작은 선물이 있다며 상품권을 받을 번호를 입력하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 받은 메일 17통이 전부 이런 내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쨌든 덕분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3월의 여섯 번째 날,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
아내에게 물었다.
"나 입사하고 연수 들어갔을 때, 너 나 엄청 보고 싶어했던 거 기억나?"
당면을 건져내던 아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뭐야,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잠깐 생각하더니 웃는다.
"하긴 그때 3주 동안 오빠 엄청 보고 싶었지."
나는 바로 닭다리를 뜯으며 정정한다.
"3주 아니야. 중간에 한 번 나왔었어. 10일 정도 떨어져 있었을걸?"
아내는 잠시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 근데 왜 더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 같지."
"연애 초반이라 더 길게 느껴졌나 보다."
아내는 국물에 밥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잠깐 뜸을 들이다가 내가 다시 묻는다.
"지금은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아내는 뼈를 바르던 고기도 내려놓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글쎄? 두 달 정도?"
"두 달 못 보면 눈물 날 것 같아?"
"눈물까지는 안 날 것 같아. 그냥 엄청 보고 싶을 것 같아."
연애 초반에는 열흘 떨어져 있는 것도 길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두 달이 기준이 되었다.
마음이 줄어든 것은 아니니 더욱 단단해 졌나 보다.
지금 줄어들고 있는 것은 고기와 야채, 그리고 당면뿐이다.
잠시 뒤 내가 다시 말을 꺼낸다.
"내 생일 선물은 뭐 사 줄 거야?"
아내가 고개를 든다.
"갑자기? 뭐 필요한 거 있어?"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던 나는 바로 답했다.
"있지."
"뭔데?"
"달력."
"달력?"
"매년 어디선가 달력을 하나씩 받아서 잘 썼거든. 근데 올해는 아무 데서도 안 주네."
알겠다고 대답한 아내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스마트폰을 붙잡고 온갖 달력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새 학기의 시작, 첫 독립, 첫 직장, 첫 월급, 심지어 입대까지.
나를 다른 세계로 밀어 넣는 일들이 3월에 모여 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원래부터 내 자리였던 것처럼 금세 익숙해지는 그런 일들이다.
3월의 근처에서 새로운 시작이 많아진다.
아마도 내가 태어난 달이라 그런가 보다.
아내의 후기
찜닭
★5.0점
찜닭 소스가 잘 배어든 반숙란, 당면, 감자가 정말 맛있었습니다.
찜닭의 매력은 역시 소스를 가득 머금은 꾸덕한 당면에 밥을 비벼 먹는 데 있잖아요.
저는 닭보다도 그 꾸덕한 당면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 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감자는 폭신폭신하고, 반숙란은 부드러워서 더 잘 어울렸네요.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P.S.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보니, '메뉴판 없음 재료는 사랑 단골은 한명' 연재를 시작한 것도 3월이네요.
글의 부제목에는 늘 요리한 메뉴를 적어 둡니다.
문득 몇 개나 되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세어 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이글 전까지 정확히 100개였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저를 구독해 주신 분도 3월에 1,000분이 되었습니다.
3월의 첫 글은 1,000명의 구독자분들과 함께하는 101번째 요리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