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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 내가 안 된다고 했었지!

결과가 나온 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착각, 사후확신편향

by 퉁퉁코딩

나 그거, 안 될 줄 알았어

타 부서에서 공들여 준비한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출시 전부터 회사의 큰 기대를 받았고, 디자인, 마케팅, 법무팀까지 각자의 시선에서 꼼꼼히 검토했습니다. 누가 봐도 정성이 들어간 프로젝트였고, 프로토타입의 완성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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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출시 직전 시행된 고객 만족도 테스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반응이 처참했습니다. 사용성에 대한 비판적인 피드백을 모두 반영한다면 사실상 기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할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프로젝트는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한 선배가 그 프로젝트에 대해 말을 꺼냈습니다. "난 사실 처음부터 이거 좀 무리라고 생각했어. 잘 안될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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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내내 회의에 꾸준히 참여했지만, 특별히 비판적인 의견을 낸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과가 확정된 이후에야, 마치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이야기를 꺼낸 것이죠. 그 말을 듣고 저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정말 직감이 있었다면, 왜 그동안 침묵했을까? 그냥 넘기기엔, 어딘가가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기억하고 싶은 것

우리는 어떤 사건이 벌어진 뒤, 마치 그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처럼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 예측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바탕으로 과거를 재편집한 기억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후확신편향(Hindsight Bias)입니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처음부터 무리였지"라고 말하고, 새로운 전략이 빗나가면 "내가 안 된다고 했었지"라고 회고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당시엔 침묵했거나,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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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는 예측보다는 이해에 더 특화되어 있습니다. 일이 일어난 후에야 우리는 그 원인을 찾기 시작하고, 현재의 정보를 바탕으로 과거의 맥락을 재구성합니다. 회의의 분위기, 누군가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까지도 지금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짜 맞춰집니다.


하지만 이는 결국 기억의 합리화일 뿐입니다. 마치 추리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후, 처음부터 결말이 뻔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죠. 실제로는 그 마지막 장면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알고 나면 모든 단서가 그 방향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전 세계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들도 2008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고, 누구도 코로나19의 등장을 정확히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른 후, 당연한 결과였던 것처럼 해석하며 자신의 통찰력을 과시할 뿐입니다.


사후확신편향의 사례들

사후확신편향은 일상생활 곳곳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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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예인 스캔들 발생 후

"그 사람? 나 원래 이미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평소에는 팬이었거나 무관심했던 사람이, 사건이 터진 뒤에는 말투, 표정, 과거 행동까지 모두 의심스러운 기억으로 되살려냅니다.


2. 축구 경기 후 감독 교체론

"이 감독, 원래 전술의 발전이 없었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리그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감독을 지지하던 팬들이, 시즌 순위가 확정되고 나면 갑자기 모두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듯 말하기 시작합니다.


3. 주식 하락 후의 이야기

"그래서 내가 그 종목은 하지 말랬잖아."
실제로는 다 함께 기대하고 투자했던 종목임에도, 하락이 시작되면 뒤늦게 애초에 이상했었다며 손절의 이유를 정당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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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해석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해석이 마치 애초부터 정해진 사실이었던 것처럼 포장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나를 예언자였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결과가 나오기 전,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했는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위험한 진짜 이유

원래 안될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은 툭 던진 푸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조직 안에서 반복되기 시작하면,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깁니다. 그 균열은 사람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결국 조직 전체의 판단력과 건강성을 갉아먹습니다.


책임이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회의에 참여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결과가 나쁘게 나오자 마치 처음부터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책 책임에서 빠져나갑니다. 그 결과, 묵묵히 일하던 실무자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패를 복기하지 못한다

실패의 원인을 명확히 분석하지 않고 원래 안 될 일이었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다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조직은 문제를 겪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용기 있는 목소리가 사라진다

프로젝트 초기에 우려를 말했던 사람은 기억되지 않고, 결과가 나온 후에야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만 살아남습니다. 점점 누구도 먼저 말하지 않게 되고, 위험 신호는 공유되지 않은 채 묻히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사후확신편향은 결과를 안 뒤, 마치 그 일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심리입니다. 이때의 확신은 우리를 위로하지만, 동시에 반성과 학습의 기회를 가로막습니다.


실패 이후에야 분석하며,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었노라고 믿는 태도는 일종의 자기 면책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는 순간, 실패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은 놓쳐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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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패를 예견된 일로 넘기지 말고, 그 안에서 진짜로 무엇을 놓쳤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고 믿는 대신, 그때 나는 무엇을 몰랐는가를 묻는 것. 그것이 더 나은 미래의 판단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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