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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나한테 묻죠? 알아서 정리하세요

방향 없는 리더가 조직을 피로하게 만드는 방식, 모호 회피 이론

by 퉁퉁코딩

기능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몇 년 전, 한 임원으로부터 타 부서에서 개발한 모든 기능을 우리 서비스에도 적용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기능은 많을수록 좋다는 논리였습니다. 저는 일주일간 모든 기능들을 검토했습니다. 다른 직원들의 의견도 충분히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곤 언급되었던 기능 중 일부가 고객에게 불필요하거나 우리 서비스의 성격과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 이유를 포함해 보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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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임원은 지시했습니다.

"고객 입장에서 다시 정리해 보세요."

저 역시 고객을 고려해 진행한 보고였기에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습니다.
"혹시 말씀하신 고객 입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죠? 알아서 정리하세요."


그 순간,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게 자율성을 준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판단은 하지 않으면서 책임만 떠넘기는 회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심리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혹 조직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는 모호 회피 이론(Ambiguity Aversion Theory)이 나타난 순간이었습니다.


모호함을 피하는 본능, 회피로 이어지다

모호 회피란 사람들이 기준이나 확률이 불명확한 상황을 불편해하고 피하려는 심리입니다. 다시 말해, 명확히 실패할 수 있는 상황보다도, 판단 기준이 없는 상태를 더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매한 상황에 직면하면 결정을 미루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성향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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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념은 1961년 다니엘 엘스버그(Daniel Ellsberg)의 연구와 엘스버그 패러독스(Ellsberg Paradox)에서 잘 드러납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두 개의 상자를 보여주고, 각각에서 특정 색 공을 뽑을 확률을 제시했을 때, 확률이 명확한 상자를 더 선호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확률이 낮은 리스크보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모호성이 훨씬 더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심리는 일상적인 의사결정에서도 나타납니다. 특히 판단 기준이 애매하면, 사람들은 결정을 내리는 대신 다른 사람의 선택에 기대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특히, 이커머스 환경에서는 제품 후기나 별점이 구매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조직에서의 모호 회피

문제는 이 심리가 조직 내 의사결정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방향을 제시해야 할 위치에 있는 결정권자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확신이 없을 때, '알아서 해보라'는 식의 말로 상황을 넘깁니다. 이는 실제로 자율을 주는 게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회피 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건 고객 입장에서 알아서 판단해 봐요."


겉으로는 열린 말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방향도 기준도 없이 결과만 요구하는 말입니다. 실무자는 목표 달성을 위한 과제를 정의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아무 기준도 내려오지 않으면, 결과가 좋으면 당연한 것이 되고, 나쁘면 실무자의 책임이 됩니다. 그리하여 모호함은 결국 조직 내 책임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실무자는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지쳐갑니다.


질문이 막히는 조직은 왜 피로해지는가

구체적인 고객입장에 대한 질문은 반박이 아니라 정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실무자는 모호한 지시 속에서도 분명한 방향을 찾기 위해 맥락을 묻고, 기준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질문이 모호함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직관에 의존해 결정을 내린 사람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면,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때때로 방어를 넘어 공격으로 나타납니다. 소리치고 몰아붙이는 이유는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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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실무자는 실행을 위한 논리를 세우려는 시도가 부정적인 태도로 오해받습니다. 그 결과, 판단은 감정에 따라 이루어지고, 실무자는 눈치를 먼저 살피게 됩니다.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기능이 포함되고, 서비스는 산만해지며 팀은 피로해집니다. 실행 없는 말은 조직을 혼란에 빠뜨리고, 모호함을 질문으로 바꾸려 한 사람만 소진됩니다.


좋은 질문은 조직을 전진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설명 없는 권위는 그것을 멈추게 합니다.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리더

조직에는 때때로 실행의 무게를 감당해보지 않은 리더가 존재합니다. 교수 출신, 외부 전문가, 공공기관 출신 인사들 중 일부는 이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실무의 리스크를 직접 다뤄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아는 척하거나, 모른다는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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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무자가 진짜 원하는 리더는 완벽한 해답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질문에 열린 태도로 응답하며, 필요할 땐 "잘 모르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리더가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방향을 함께 정의하고, 책임을 나누려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조직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리더가 먼저 질문을 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상으로도 만나보세요

https://youtu.be/ebOralvTb1Q?si=HVlNxwRLuaZm63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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