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시간을 조용히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관계적 접근성, 스키마
한동안 직장에서 회의가 너무나 많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 8시 첫 회의를 시작으로 두세 개의 회의를 연달아 마치면 오전 일정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죠. 이미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오후에도 다른 회의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었기에, 점심시간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쉬고 싶었습니다.
평소에는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지만, 그날은 따로 먹겠다고 말한 뒤 사내 식당에서 혼자 천천히 조용히 식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기류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묻는 동료들이 생겼고, 제가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단지 조용한 점심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이상 신호로 느껴졌나 봅니다.
우리는 가끔 직장 동료들의 작은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지나친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오해를 만들기도 하죠. 관계적 근접성과 스키마가 결합한, 아주 전형적인 사례였습니다.
"김과장이랑 정대리가 회의 때 싸웠대."
"옆 부서 박부장님 주식으로 3억 날렸다던데."
"아니 근데, 홍상무님이랑 비서랑 요즘 왜 자꾸 붙어 다니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유독 관심을 끕니다. 특히 회사라는 공간에서는 사소한 이야기들이 기가 막히게 빠르게 퍼지죠. 오전 커피 타임의 한마디가 복사실을 거쳐 메신저에 도착합니다. 점심시간이면 이미 조직의 절반은 알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의 결혼 소식보다, 옆자리 동료의 소개팅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롭죠.
심리학에서는 이런 걸 관계적 근접성(Social Proximity)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넘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마주치고 얼마나 자주 의식하게 되는지에 따라 심리적 친밀도가 높아지는 현상입니다. 자주 보는 얼굴, 함께 회의하는 사람, 같은 복도에 앉은 동료일수록 그들의 말과 행동에 민감해지고, 그 변화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가까운 사람의 변화는 곧 내 일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는 겁니다.
결국 직장에서는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그만큼 오해도 쉽게 시작됩니다.
동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혼자 밥을 먹었을 뿐인데, 왜 동료들은 그걸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해석했을까요?
여기엔 스키마(Schema)라는 심리 작동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스키마란, 우리가 세상을 해석할 때 꺼내 드는 '기억의 틀', 혹은 '자동 번역기'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장면을 볼 때 그걸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과거의 경험, 익숙한 이야기, 감정이 얽힌 기억을 불러와 지금의 상황에 자동으로 덧씌웁니다. 이는 인지적으로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많은 오류를 만들기도 합니다.
혼자 밥을 먹는 동료를 보면, 사람들은 그 장면만 보지 않습니다. 예전에 혼자 밥을 먹다 결국 퇴사했던 선배가 생각납니다. 어릴 적 급식 시간에 늘 혼자 앉아 있던 소극적인 아이가 떠오릅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혼밥하는 외로운 사람의 사연도 어딘가 연결됩니다.
그 기억 조각들이 하나둘 연결되며, 머릿속에선 빠르게 이런 시나리오가 만들어 집니다.
혼자 밥을 먹는다 → 뭔가 쓸쓸하다 → 문제가 있는 건가? → 아, 이직 준비하나 보다
이 과정을 거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몇 초면 충분합니다.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사실 확인도 없었습니다. 그냥 머릿속 스키마가 자동으로 돌아간 결과일 뿐입니다.
사람도, 조직도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합니다. 예측이 되지 않으면 불편하고, 그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해석을 시도합니다. 문제는 그 해석이 단순한 추측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누군가는 아예 사실로 믿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결국, 정작 당사자만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너무 쉽게 서로를 오해합니다. 실제 관계를 흐리고, 진짜 소통을 방해하며, 괜히 누군가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조직은 어떨까요?
조금 다르게 행동했다고 해서 해석당하지 않는 팀
그저 그날의 컨디션일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분위기
말하지 않아도 괜찮고, 말하지 않았다고 오해받지 않는 조직
그런 팀에서는 조직원들이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자기다움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해석이 줄어들면,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더 잘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해석이 없을수록 오히려 진심이 더 잘 보입니다. 무엇보다, 해석하지 않는 조직은 에너지를 추측이 아니라 일에 씁니다. 의미 없는 상상 대신 눈앞의 업무와 사람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짧은 생각과 말이 문화가 되면, 우리는 서로를 훨씬 더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팀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진짜 건강한 조직입니다.
https://youtu.be/x3IXjSlmI1s?si=noz5W9T6w6nrxo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