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동기는 왜 학교 친구처럼 안 될까? 사회정체성이론
오랜만에 학교 후배를 만났습니다. 항상 밝고, 분위기도 잘 살리는 녀석입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도 잘 유지하는 편이죠. 그런데 그 후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입사한 지 2년쯤 된 후배는 회사 동기들과 2~3개월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입사 연수 후 각자 다른 부서로 흩어졌기에, 가끔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직장생활의 고충도 나눈다고 했죠. 모임 자리에서는 정말 즐겁고 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돌아가는 길이나 잠들기 전엔 이상하게 헛헛한 감정이 밀려온다고 했습니다. 함께 연수를 받을 때는 오래 함께할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는 한참을 떨어져 있어도 그런 기분이 든 적이 없었는데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마음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역시 비슷한 감정을 겪은 적이 있었고, 많은 직장인들이 언젠가는 경험하게 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후배가 말한 모임 후의 헛헛함은 사회정체성이론(Social Identity Theory)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이론은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할 때 개인이 아닌,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일원이라는 정체성도 함께 가진다고 말합니다. 회사에서는 우리 팀, 우리 조직, 입사 동기같은 소속이 바로 그 예입니다.
이러한 집단 정체성은 소속감을 주고, 심리적 안정감과 유대감을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 정체성은 항상 유지되지 않습니다. 특정 상황에서는 강하게 작동하지만, 그 상황이 끝나면 쉽게 사라지기도 하죠. 회식 중엔 동기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분명히 '우리'였지만, 모임이 끝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 감정은 금세 희미해집니다. '나 혼자'라는 감정만 고스란히 남습니다. 이 감정의 전환이 바로 헛헛함의 이유입니다.
입사 동기라는 말엔 자연스럽게 '같은 해에 함께 시작한 사람들'이라는 공통된 배경이 담깁니다. 이 때문에 소속감이 생기지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덧없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자주 만나지 않거나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 유대는 금세 희미해지곤 하죠
직장에서의 관계와는 다르게, 학교 친구들과는 오랜 시간 만나지 않아도 그런 감정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두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비롯됩니다.
학교 친구 사이에는 긴 시간이 깔려 있습니다. 자취방에서 컵라면을 나눠 먹고, 시험을 망친 날 밤새며 서로의 고민을 나눴던 경험처럼, 함께한 일상의 밀도가 깊습니다. 이런 시간과 경험의 축적은 관계에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그냥 좋은 사이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듭니다.
반면 회사 동기는 입사 시점이라는 공통점 외엔 실질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같은 조직에 속해 있지만, 부서도 다르고 일도 다릅니다. 만남이 반복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기고, 관계는 일의 맥락이 사라지는 순간 흐려지기 쉽습니다.
학교 친구와의 관계는 오랜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정체성이 쌓인 결과입니다. 몇 년 만에 연락을 해도 우리라는 느낌이 쉽게 복원됩니다. "고1 때부터 친구잖아"라는 말 한마디면 거리감은 단번에 줄어들죠.
반면, 회사 동기와의 소속감은 회식이나 연수처럼 특정한 상황에서만 일시적으로 켜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면 그 감정은 빠르게 사라집니다. 회식에서 나눈 농담이 다음 날에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회식 후 느껴지는 허전함을 피할 수 없다면, 방법은 덜 흔들리는 법을 익히는 쪽입니다. 핵심은 감정 전체를 붙잡기보다 그중 단 한 장면만 기억에 남기는 것입니다. 가장 즐거웠던 순간 하나, 함께 웃었던 장면이나 따뜻한 대화 한 줄 정도면 충분합니다.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거나 메모 앱에 짧게 적어두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기억을 간결하게 저장하고 일상을 빠르게 회복하는 것이 단순한 습관 하나만으로도 회식 뒤에 오는 공허한 기분을 훨씬 가볍게 넘길 수 있습니다.
회식의 웃음과 건배는 그 자리에선 분명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온기는 입사 동기라는 상황 속에서만 유지되는, 일시적인 연결감에 가깝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순간, 관계의 밀도는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이 흐름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기보다,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실용적입니다.
관계는 순간의 감정을 남기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을 감정대로 인정하되, 그 안에 과도한 의미를 덧붙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회식의 온기는 추억으로만 남겨두고, 다음 날 평소 루틴대로 돌아가는 사람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소속감에 기대되다가도 스스로 중심을 다시 잡을 수 있는 사람이 감정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