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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부장님은 왜 맨날 안 된다고만 할까?

젊을 땐 안 그랬던 부장님,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 정보의 탐색과 이용

by 퉁퉁코딩

내가 예전에 다 해본거야

제가 자주 협력하는 타 부서 부장님이 한분 계십니다. 회사생활 경력만 20년,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일하셨던 분이죠. 그런데 이분과 회의를 할때면 꽤나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회사의 목표를 위한 새로운 과제는 물론, 참신한 아이디어나 단순한 사용성 개선 제안조차도 그분은 반드시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거 예전에 다 해봤어요.

그거 괜히 했다가 문제 생기면 어떡해요.

별로 효과 없을 텐데 뭐하러 해요.

이분에게 회의는 새로운 것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정리하는 시간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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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로 "저 부장님이랑 한 번 부딪혀 봐야 진짜 회사생활 시작이지"라는 이야기까지 떠돕니다. 저 역시 그분과의 회의가 끝날 때마다 피로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랫동안 그분과 함께 일해온 차장님께 그 부장님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젊은 시절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새로운 기술을 가장 먼저 적용하며, 성과도 좋았다고 합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그 부장님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 정보 탐색과 이용

젊었을 때는 왜 그렇게 과감했을까요? 반면 지금은 왜 점점 신중해지고 보수적인 판단만 하게 될까요?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이론이 바로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Socioemotional Selectivity Theory)입니다.


심리학자 로라 카스텐슨(Laura Carstensen)이 제안한 이 이론은, 인간이 인생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행동과 선택이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삶의 시간이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향한 모험과 가능성에 더 끌리고, 반대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지금 가진 것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변화는 정보의 탐색과 이용의 상충관계와도 유사합니다.


정보 탐색(Exploration)은 더 나은 선택지를 찾기 위해 다양한 옵션을 시도하는 과정입니다. 리스크가 따르지만 그만큼 보상도 클 수 있습니다.


정보 이용(Exploitation)은 이미 알고 있는, 검증된 방법을 반복하여 안정적인 결과를 얻는 전략입니다. 효율적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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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서 이 두 전략 사이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정보가 부족하니 당연히 탐색의 가치가 큽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더 이상은 실험보다 안정이, 가능성보다 예측 가능한 결과가 중요해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재까지 확보한 최고의 정보를 활용할 시간이 줄어듭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사람은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을, 가능성보다는 확실함을 택하게 됩니다. 시간 감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커피를 찾아서

작년, 저는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었지만, 어떤 카페의 어떤 커피가 제 입맛에 맞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여러 리뷰를 참고했지만, 결국은 직접 마셔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동네는 카페거리가 있어 유난히 많은 매장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카페 안에도 다양한 원두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마셔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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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경험해봐야 최고의 커피를 찾을 수 있을까요? 첫 방문에서 아쉬움이 있었다고 해서 다시 갈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날 하루의 컨디션이 문제였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아직도 여러 카페를 돌아다니며 최고의 커피를 찾는 중입니다.


하지만 전에 살던 동네를 떠나기 직전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 동네에서 지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인식하자, 가장 좋아했던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커피만 마셨습니다. 새로운 커피를 찾기보다는 이미 좋아하게 된 그 커피를 반복해서 마시는 것이 더 가치 있게 느껴졌거든요.


이것이 바로 정보 탐색과 이용의 상충관계입니다. 새로운 선택지를 더 많이 들여다보면 더 나은 결과를 찾을 가능성은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죠. 반대로 이미 알고 있는 방식을 고수하면 안정적이지만, 발전은 멈출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새로운 카페보다 단골집을 고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또한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부장님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

이제 다시 그 부장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젊은 시절의 부장님은 정보가 부족했기에, 더 나은 선택을 위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었고, 실패는 성장의 자양분으로 여겨졌죠.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부장님은 이미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이 쌓이면서, 이제는 탐색보다는 이용의 시기로 접어든 것입니다.


게다가 정년이 가까워지며 남은 시간이 자연스럽게 짧아졌고, 이로 인해 그는 정서적 안정과 효율성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낯선 탐색'보다는 '검증된 이용'을 선택하는 것이 더 이성적인 판단이 된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는 예전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결국, 그 부장님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둘러싼 시간 달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자연스러운 흐름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선택은 어디에 있을까?

코끼리와 기린은 태어나고 몇 시간 만에 스스로 걸을 수 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상당히 갖춘 채 세상에 나옵니다.


반면, 인간은 매우 연약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아직 세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아기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유아기, 청소년기, 그리고 젊은 시절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탐색하는 시기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 시기의 경험과 탐색은 훗날 우리가 정보를 이용하는 시기에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밑거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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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를 때 가장 큰 가치를 가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고,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그 가치는 자연스레 달라집니다.


저는 오늘 아직 가보지 않은 집 근처의 또 다른 카페에 들러보려 합니다. 앞으로 이 동네에서 몇 년은 더 살 것 같기에 새로운 탐색은 아직 제게 큰 의미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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