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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Oct 17. 2023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침 출근길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니 하늘이 아주 예뻤다. 저녁노을같이 붉은색과 푸른색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는데, 그라데이션 기법처럼 색과 색사이에 또 다른 희미한 색이 애매한 경계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면서 아름다웠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혹은 또 다른 누군가가 차창 밖 풍경과 같은 아주 작은 것에도 큰 만족을 느끼는 성격이라면, 삶의 빈틈 곳곳을 행복감으로 꽉꽉 채우며 범사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을 텐데.


적어도 나는 그런 성격이 못된다. 그저 오, 예쁘네 하고 몇 번 더 보다가 스마트폰이나 이북리더기에 눈을 돌린다. 풍경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만족보다는 불만이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다. 하늘이 예쁘거나 말거나 이른 새벽부터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지하철역에 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이에 끼어서 한참을 이동해야 한다. 왜냐면 타인이 오너로 있는 회사에 가서 그의 벌이를 위해서 내 시간과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하루 종일 남의 일을 해주고 나는 그저 계약된 내 몫만 챙기는 그런 구조. 일을 마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밤늦게나 집으로 돌아온다. 이런 과정을 몇 년간 반복하다가 나이가 들면 쫓겨나겠지. 그런 삶이다. 그러니까 결국 하늘이 예쁘거나 말거나 어쨌든 나는 버스에 앉아있는데, 이게 무슨 행복할 일인가.


그리고 만족이라니, 내가 지금 만족할 때인가. 발전은 불만을 통해 도모된다. 걷기 불편해서 자동차가 만들어지고, 요리하기 귀찮아서 냉동 만두가 개발되고, 잠잘 때 추우면 안 되니까 콘크리트로 아파트를 짓고, 밖에서도 인터넷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출시한다. 만약에 인류가 쉽게 만족하는 성격이라면 우리는 원시 시대나 조선 시대와 같이 어느 시대쯤에 멈춰 있었을 것이다. 이만하면 됐지, 여기서 뭘 더 바랍니까 하면서 말이다. 불만이 있고 호기심이 있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 월 180만 원 벌다가 더 벌고 싶어서 학교도 다니고 자격증도 따고 하면서 월 300만 원도 벌게 되는 거고, 부럽고 불편하고 불만이 있는 것을 하나씩 극복하면서 발전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그래서 나는 만족할 수 없다. 더 큰 차, 더 큰 집, 더 멋있는 나를 원한다. 이 정도면 됐지 뭘 그래, 가 아니라 이게 사는 거냐, 하면서 불만을 가지고 극복하려 노력하며 발전을 구하기에 나는 항상 만족할 수 없고 행복감을 느낄 수 없으며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하며 그래서 우울하다.


미국 백인들이 한창 인디언들을 쫓아내고 있을 시점에 인디언들이 남긴 메시지가 있다. 백인에게 땅이란 사고팔 수 있는 소유의 대상이나 인디언들에게 대지란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그 어머니는 인간뿐 아니라 다른 동물 등 모두를 먹여 살리고자 하며 그래서 함부로 소유할 수도 헤칠 수도 없고, 단지 잘 쓰고 돌려줘야 하는 것으로 대지와 자연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인디언들 말이 참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금만 사고를 확장하다 보면 나는 결국 백인들 편에 서게 된다.


왜냐면 백인들의 그런 생각 덕분에 우리는 지금 자동차와 아파트와 스마트폰으로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백인들이 그래 맞아, 인디언들 말이 참 맞는 거 같아, 자연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다 같이 나누어 소중히 사용하고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 해. 찰스야 스미스야 우리 돌아가자, 우리도 인디언들처럼 자연과 물아일체 하여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참선하는 삶을 살도록 하자라고 했다면, 그리고 전 인류가 모두 거기에 동조했다면 지금 나는 삼국시대 어디쯤 생활 방식으로 살고 있었을 텐데. 그건 좀 아니지 않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뭐가 더 나은 걸까 의문이 생긴다. 자동차를 타고 아파트에 살고 스마트폰이 생겨서 행복한가. 아니, 나는 현재 불안하고 우울하고 초조하다. 인디언들의 생활 방식으로 살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은가. 글쎄, 그들보다 우리가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쿨하게 장담은 못 할 것 같다. 개인의 생은 짧다. 각자 본인이 태어난 시대에 맞춰서 살다가 금방 소멸한다. 나는 지금 아이폰 15 시리즈까지 나온 이 시점의 문화와 과학에 맞춰서 한바탕 살고 있는데, 그런 거 없이도 우리 선배들은 잘 살다 갔다.


결국 질문 하나가 남는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큰 것을 원하며 현재 상태 불만족을 유지하여 발전을 도모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아니면 현재에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수시로 행복감을 느끼는 삶을 만들어야 할까. 뭐가 맞을까. 뭐가 맞긴 뭐가 맞아. 둘 다 맞지 뭘.


발전도 해야 하고 감사도 있어야 한다. 왜냐면 일단 나는 현대 문명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이다. 인디언처럼 열매 따고 사냥하며 살 순 없다. 나무도 다 주인이 있고 고기는 마트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세상이다. 이미 인류는 백인들의 자본주의를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나도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 그러면 결국 나는 발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불편한 것과 불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일상의 감사와 행복감도 필요하다. 작은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널리 전파하며 살아야 한다. 이상하지? 불만을 가지면서 만족도 느끼라니, 마치 회사 다니면서 부자 되라는 식의 말이 안 되는 문장 같지만,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현재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해서 이 시대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커다란 발전적인 목표를 세운다. 개인의 선호나 추구하는 바에 따라 설정한 후 꾸준히 정진한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모으고 싶다면 일단 시드머니를 확보한 뒤, 그걸 재투자해서 자산을 증식시키는 쪽으로 목표를 세우고 밤낮없이 일하며 돈을 모은다. 택배도 하고 배달도 하고 정기적으로 회사도 나가면서 열심히 번다. 그다음에 그걸 부동산이든 코인이든 주식에 넣고 잃기도 하고 벌기도 하면서 불려 나간다. 그렇게 하긴 하는데, 그것만 하고 사나. 사람도 만날 것이고 소풍도 갈 것이고 가끔은 캠핑장에서 가서 불멍도 한다. 그런 중간중간 과정마다 감사하는 마음과 내가 가진 것에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며 산다.


좋다. 오늘이 좋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다. 두 발로 걷고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 앞에 펼쳐진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음에 만족한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또다시 배달을 가고 회사에 가고 돈을 모은다. 혹시 돈을 다 잃었다. 회사에서 잘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감사와 행복감의 근육이 다시 목표 세우기와 계획 실행하기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을 만들어 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게 바로 ‘건강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불만과 불안을 씨앗으로 발전을 도모한다.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실행한다. 순간순간 발생하는 초조와 우울은 감사와 행복감을 덮어버린다.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쉽지 않다. 저절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연습과 훈련 그리고 반복뿐. 눈을 감고 지금 감사한 것을 생각한다. 앞으로 일에 기대하고 설렌다. 눈을 뜨고 출근을 한다. 치열한 현실을 보내며 패배하고 실망하고 좌절한다. 그런 날은 다시 눈을 감고 감사하고 만족한다. 들숨과 날숨처럼 스스로 담금질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나는 원하는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 역시 나쁘지 않았다며 과거를 회상하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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