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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춘 Sep 09. 2024

서태지와 나

1992년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당시 인기 있던 가수는 태진아였다. 히트곡 ’옥경이‘를 알고 있다. 티브이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고생한 아내를 위한 곡이라는 것도 기억한다. 후속곡 ’거울도 안 보는 여자‘는 가요톱텐에서 1위를 했다. 그 노래는 지금도 부를 수 있다. 멜로디가 나의 뇌 측두엽 어딘가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대망의 ’노란 손수건‘이 발표되었을 때는 당장 집에 있는 손수건부터 찾았다. 유행을 예감했기에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확보해둬야 했다.


그랬다. 그때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게 트로트뿐이었다. 김현식이나 강수지 같은 젊은 가수가 있지 않았냐고? 재미가 없었다. 그들은 담배연기처럼 심각했거나 오직 연애에만 관심이 있었다. 트로트가 가사가 재밌고 멜로디도 심플해서 따라 부르기 쉬웠다. 무엇보다 의상이 반짝반짝 화려해서 보는 맛도 있었다.


어머나 그런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MBC 인기 프로그램 ‘특종 TV 연예’에 처음 나온 그들을 보면서 난 내 손에 쥐고 있던 엄마의 레이스 달린 손수건을 스르륵 땅에 떨어트렸다. 그들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난 다음에 내 마음속에는 회오리 춤의 잔상이 진하게 남았다. 상체는 태권도의 정권 지르기를 하면서 동시에 하체는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처럼 발을 헛 놀리는 독특한 댄스. 디. 디. 디. 디. 디스코 디디디 하는 비트에 맞춰 딱딱 떨어지는 절도 있는 군무. 또 보고 싶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온다는 프로그램을 찾기 시작했다. 회오리 춤. 유행예감이다. 알아야 했다.


대한민국 가요계는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듯이 내 음악 인생도 커다란 기점을 맞이한다. 더 이상 내게 어른들의 음악은 필요하지 않았다. 캡 모자를 쓰고 옷에 인형을 달고 다니며 깜빡했는지 어쨌는지 상표텍도 떼지 않고 무대에 오르는 그들은 여러모로 엄마가 알면 혼날 만한 짓을 많이 하고 다니는 천상 ‘아이들’이었다. 그중에 대장 격인 서태지는 뽀얀 피부에 둥근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무뚝뚝한 삼촌들이나 새침데기 이모들과는 달랐다. 그냥 좀 애 같았다(말투도 그랬다) 그리고 그들의 율동은 말할 것도 없이 재미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우리를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음악이었다.


그들을 향한 어른들의 반응도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저게 무슨 노래냐’, ‘뭐라 그러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아는데 나한테는 다 들리는데’, ‘우리 친구들 다 좋아하는데’ 하며 우리의 것, 우리만의 문화에 대한 묘한 소속감과 연대를 느끼며 동시에 기성세대와의 거리감을 즐겼다.


어른들은 초대받지 못한 비밀의 숲이 하나 생긴 기분이 들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당시 나는 사춘기라는 벽을 쌓을 준비를 하고 있는 단계였고 그때 만난 서태지는 그 벽을 같이 더 재밌게 쌓아보자며 내가 다가왔다. 공감하고 설레는 감정은 결국 동경까지 향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그렇게 나는 서태지의 팬이 되었고 그의 음악 인생은 내 인생에도 중요한 이슈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대변했다. 나를 대신해서 멋진 옷을 입었고 춤을 추었으며 경쟁에서 독보적으로 승리했다. 내 키가 자라는 동안 그들의 음악도 성장했다. 신나게 부수기도 했고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으며 생소한 장르를 소개해 주면서 내 눈과 귀 그리고 시상하부 구석구석을 즐겁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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