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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Jul 24. 2023

현대인의 고질병, '불안'

알랭드보통 <불안> 서평


줄을 세우고 등급 나누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까? 초등학교 시절 매년 운동회 때마다 달리기 등수에 따라 손등에 새겨졌던 파란색 도장부터 키 순서대로 주어졌던 출석번호, 과목마다 성적에 따라 부여받았던 석차와 등급까지. 중요성은 다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언제나 우리는 성취에 따른 평가를 받고, 그에 맞는 자리에 앉을 것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들은 다시 줄을 맞춰 경제적 성취에 따른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계급제나 신분제가 폐지된 지는 꽤 오래지만, 현대 사회의 '사회적 지위'는 어쩌면 과거의 그것들보다 더욱 힘이 세 보인다. 게다가 이 지위란 놈은 굉장히 공고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또 너무 위태로워서 더 높은 계단으로 올라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렵게 올라선 자리를 유지하고자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불안'이란 돌덩어리를 턱 하니 안겨준다.


저자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로 인해 현대인의 느끼는 불안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대한 해법 역시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런 류의 철학 에세이들이 대부분 다양한 물음을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과 달리 저자는 구체적인 해결책까지 건네고 있다는 것이 우선 흥미로웠다.


저자가 말하는 불안의 원인은 아래 다섯 가지와 같다.

1. 사랑결핍
높은 지위를 얻어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고자(= 사랑받고자) 전전긍긍하는 마음

2. 속물근성
사회적 지위가 곧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보는 속물들이 넘쳐나는 사회

3. 기대
i) 더 높은 기대와 욕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
ii) 나와 비슷하게 보이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4. 능력주의
모두에게(출발선이 설사 다를지라도) 평등한 기회를 주었으므로 능력에 따른 불평등은 당연한 것 
→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 사회 분위기

5. 불확실성
변덕스러운 재능, 운, 고용주의 성향, 세계 경제 상황 등 노력 대비 확실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게 만드는 현대 사회의 경제적 특성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저자는 물질적 진보로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로 인해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되려 늘어났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것은 최근의 사회문제들을 이야기할 때 어디에나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이고, 나 역시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명 과거보다 훨씬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사회는 점점 더 신음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과거의 계급사회에서는 정해진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의 성취를 비교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다르다. 사람들이 욕망하는 모든 것들이 마치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닿을 것처럼 꽤나 가까이에 있어 보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와 별 다를 바 없이 고만고만해 보이는, 아니 나보다 더 못해 보이는 사람들이 내가 욕망하는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든다.


SNS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학창 시절에는 내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고작 같은 반 친구들 뿐이었다. 물론 그 작은 사회에도 질투를 유발하는 유독 뛰어난 친구들은 늘 있기 마련이었지만, 지금처럼 클릭 한 번으로 사람을 주눅 들게 혹은 불안하게 만드는 비교 대상들이 쏟아져 내리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몸매와 화려한 다이닝, 눈부신 사치품과 앞치마를 두른 자상한 남편, 스스로 잠드는 의젓한 아이, 멋진 차와 높은 연봉 등 사람들을 자극하고 갈망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SNS 속에서는 너무도 쉬워 보이고 또 흔해 보인다.


비교대상의 폭발적인 증가로 욕망은 더욱 다양해졌지만, 잡힐 듯 손에 잡히질 않으니 불안감은 증폭된다. 게다가 사회는 약자에 대한 자비와 관용을 잃어버려 '루저'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을 뿐이다. SNS에서 (무례함을 살짝 곁들인) 솔직함을 과시하는 재벌은 멋지다고 칭송받고, 단지 재벌가에서 태어났을 뿐인 '재용이 형'과 화려한 '금수저'들은 모두가 굽신거리며 추켜세워준다. 반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약자들은 쉽게 무시당하고, 사회에 손을 벌리는 사람들은 벌레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가난하지만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고 있는 부모나 부자가 아님에도 많은 자식을 가진 사람들은 난데없이 쏟아지는 화살들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해법 역시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철학 (염세주의 철학)
i) 칭찬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에 움츠러들지 말고, '진정한 자신'을 파악할 것
ii) 지적인 염세주의: 세상은 어차피 미쳤잖아!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만한 것인지 자문해 볼 것

2. 예술
i) 예술은 모든 드러나지 않는 삶의 가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념을 교정하도록 하는 것
ii) 비극을 통해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우월감이 아닌 공감을 느끼고, 사랑과 관심을 가지도록 인도
iii) 희극과 유머를 통해 모두가 나처럼 어리석다는 것을 인지하며 불안감을 조절할 수 있도록 도움

3. 정치
i)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당대 지배계층의 편의를 위한 지배관념일 뿐. 
→ 이성적 분석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할 것
ii) 소유와 성취 뒤의 만족은 늘 유한함.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피할 것

 4. 기독교
i) 소멸을 생각하며 사회의 기대 가운데 정당성이 없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거나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릴 수 있음
ii) 자신이 너무도 하찮은 존재라는 인식은 불안의 좋은 치유책
→ 먼지처럼 덧없는 존재이기에 현생에서의 의미 없는 지위나 일들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음

5. 보헤미안
부르지아에 대항하여 경제적이고 능력주의적인 지위 체계에 맞서는 자들
돈이 없다는 것은 돈을 벌 시간에 다른 활동에 에너지를 쏟았고,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


만일 청중이 한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과거 회계사 1차 시험 합격 후 우월감에 젖어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썼던 개인적 소회와 카페에 올린 1차 합격수기가 악의를 가진 지인으로 인해 퍼다날라진 적이 있다. 싸이월드에는 내 모든 일상과 사진이 '전체공개' 되어 있었기에 나는 회계사 카페에서 가장 핫한 감자가 되어 동차로 2차 시험을 준비하던 4개월 내내 온갖 성희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당시에 사귀던 남자친구의 사진까지 카페에 올라오며 지금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성희롱이 난무했고, 매주 학원에서 치는 모의고사 점수가 낱낱이 카페에 공개되었다. 내가 학원에 신고 간 구두가 너무 낡았더라는 글부터 내가 사는 동네나 나의 학벌을 비하하는 글들도 많았다.


매일 아침 카페에 접속해 새로 올라온 악의적인 글들을 캡처하면서 나는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을 되새겼다. '내 합격이 이들에게 최고의 복수다'. 어차피 이들은 익명으로 악플이나 달고 있는 한심한 인생이기에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하기 너무 싫거나 나태해지는 날에는 오히려 그 악플들이 역설적으로 나에게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나를 조롱하는 이들에게 더 큰 패배감을 돌려주고 싶다는 복수심은 합격을 위해 열심히 달려 나갈 수 있게 만드는 또 다른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 악플들 덕에 그 어려운 동차합격을 해낼 수 있었다.


결혼 전 꽤 인지도가 높은 공중파 주말 예능에서 연예인과 소개팅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 연예인이 너무 아깝다는 댓글부터 외모 비하와 근거 없는 악플들이 넘쳐났지만, 그중 어떤 댓글도 나에게 정신적 대미지를 주지는 못했다. 그저 악플엔 '싫어요' 버튼을 누르고, 예쁘다는 댓글엔 '좋아요' 버튼을 눌러줬다. 댓글을 다는 사람들 중 99%는 나보다 못생겼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외모 평가나 지위 부여가 내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을 내가 가장 잘 안다는 확신, 그리고 그로 인한 단단함이 있으면 타인의 평가나 기준에 따라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해법 중 첫 번째 해법인 '철학적 염세주의'를 꽤나 공감하며 읽었다. 튀는 것 좋아하고 조심성이 부족한 성격 탓에 여러 가지 삶의 굴곡도 있었고, 때로는 기대와 노력보다 낮은 성취를 받게 된 때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모욕을 받거나 견딜 수 없이 낮은 지위에 서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만약 그럴 때마다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불안에 빠져 허우적 대기만 했다면 어땠을까. 폭풍우가 쏟아져 내린 뒤의 눈부신 성취나 안락한 현재의 지위는 결코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고 충고한다.


사실 나는 속물근성과 기대, 그리고 비교로 인해 불안함을 느끼는 현대인이라면 모름지기 SNS를 삭제하고 다소 외로워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외로움 대신 천박함을 선택하였고, SNS의 순기능이 내게는 더 크다고 생각하여 헤비업로더로 살아가고 있지만, SNS가 사람을 다소 천박하게 만들고 끝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공간인 것은 자명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SNS를 보고 불타는 마음이 들거나 악플을 달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면, 인스타를 삭제하고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볼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SNS를 삭제한다고 해서 모든 불안의 근원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음이 번잡한 시기에 분명히 큰 도움은 될 것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중략)...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몸을 부대끼고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 '불안'은 필연적으로 함께해야만 하는 동반자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이 넓은 우주에서 먼지 같은 존재로 태어난 것 자체가 불안에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불안을 컨트롤하고 스스로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때때로 걷잡을 수 없이 강한 불안의 파도가 밀려와 나를 집어삼키려 하겠지만, 불안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 잠식되지 않고자 오늘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안간힘을 써본다.


p.s 매 달 서평 제출기한을 지키지 못할까 불안해지곤 하지만, 정성 다해 골라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은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을 이겨내는 데 꽤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I love 책당모의♥



2023년 7월 24일, 열일곱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KHJ

1. 책에 제시된 불안의 원인 다섯 가지 중 어떤 요소에 가장 공감하시나요? 여러분이 느끼는 불안은 어떤 것인지도 이야기해 주세요.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2. 저자는 물질절 축적이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로 인식되는 근대 이상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능력주의 시대에는 부의 축적이 곧 노력의 결과이며, 높은 품성으로 연결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취, 높은 지위 요소는 무엇인가요? 


3. 저자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다섯 가지 해법을 제시합니다. 어떤 방법에 가장 공감/비공감했나요? 나만의 불안 해소 방법도 공유해 보아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안


4. 책에서는 자존심 방정식(자존심=이룬 것/내세운 것)을 언급하며, 우리의 기대 수준을 낮출 때 찾아오는 편안함과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성취를 추구하나요? 아니면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준을 줄이는 편인가요? 


5.‘철학’ 파트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받아들일 때 ‘이성’이라는 상자를 통해 한번 더 검열하라고 합니다. 평소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 말에 영향을 잘 받는 성격인가요?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6. 책에서는 불안의 순기능도 일부 언급됩니다. (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의 가치) 나를 성장시킨 불안이 있나요? or 내적인 불안을 원동력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본 적이 있나요? 


7. 발전한 사회에 살면서 무제한의 기대를 갖고 현실과 비교하며 늘 불안해하는 삶 vs 정해진 틀 속에서 낮은 수준으로 살아가면서 ‘기대’라는 단어조차 모른 채 잔잔하게 살아가는 삶. 여러분이 살고 싶은 삶은 어떤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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