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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Sep 19. 2023

따스함이 스며있는 뇌과학책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서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다니, 항상 아내를 머리에 짊어지고 다니기라도 한다는 건가? 왠지 모를 따뜻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귀여운 제목에 핑크빛 구름이 몽실거리는 표지를 보고, 나는 이 책이 기묘한 뇌질환을 가진 남자의 아내 사랑을 다룬 소설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귀엽거나 따뜻하기는커녕 전반부는 그 어떤 괴담이나 공포영화보다 오싹했다. 깊게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섬뜩한 이야기들이었다.


병은 인간이 처한 본질적인 조건이다. 동물도 질병에 걸리기는 하지만, 병에 빠지는 것은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제1장 <상실>에서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차례로 소개된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P 선생, 기억의 연속성을 잃고 과거 속에서 헤매게 된 지미, 몸을 느낄 수 있는 감각(고유감각)을 상실하여 '몸이 없는 채로' 살아가게 된 크리스티너, 손의 감각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 매들린, 근육감각을 잃고 똑바로 걷지 못하는 맥그레거, '왼쪽'이라는 개념을 상실한 S 부인, 언어상실증에 걸린 환자 등.


반면 제2장 <과잉>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무언가가 '넘쳐서' 문제를 겪는다. 그들은 틱이나 투렛증후군, 신경매독 등의 뇌질환으로 인해 늘 경박스럽고 소란스러우며, 폭발하는 충동에 시달리곤 한다. 다만 재밌는 것은 그 성가신(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증상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이다. 모든 기억을 잃고 끊임없는 혼돈 속에서 폭주하는 톰슨이나 세상일에 무관심하고 변덕스러워진 B 부인의 이야기는 매우 안타까웠지만, 레이와 나타샤는 뇌질환이 주는 에너지와 영감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일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소개된 사례들 중 무엇 하나 두렵고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역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지미와 톰슨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행복했던 기억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네이버 클라우드와 구글 드라이브, SNS에 이중 삼중으로 추억을 백업하고, 별 것 아닌 일들에도 의미를 부여해서 특별한 일로 둔갑시키기를 즐기는 나로서는 모든 순간이 그 즉시 휘발되어 버리는 - 그래서 모든 순간이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어 버린 그들의 삶이 너무도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은 감정, 의지, 감수성을 갖고 있는 윤리적인 존재입니다. ...(중략)... 신경심리학상으로 봤을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거의가 아니라 전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견지에서는 할 일이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진들이 모두 없어진다고 하여 추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듯, 기억이 없어진다고 하여 살았던 삶 자체가 모두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속성을 잃고 '아무런 맥락도 없는 잡다한 인생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지미와 톰슨을 '주체성'과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여전히 그들은 감정과 의지를 가진,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는 존재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영혼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환영이 하찮고 꺼림칙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지고한 황홀감에서 나오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상실> 파트와 <과잉> 파트가 뇌질환으로 겪을 수 있는 끔찍한 - 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 사례들을 나열하며 질환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행>과 <단순함의 세계>에서는 환자를 대하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과 태도가 더 드러난다.


<이행>에 소개된 사례들이 특별한 것은 분명 치료되어야 할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그 질환이 환자에 따라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하루종일 귓속에서 울리는 음악소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괴로움과 짜증을 유발하겠지만, C 부인은 그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다시 만나 위로받았다. 인도소녀 바가완디 또한 고향에 대한 꿈과 환영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고, 약물 중독으로 인한 발작이 만들어낸 후각민감성이 스티븐에게는 잠시나마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뇌에 가해지는 극한 충격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끄집어내 주기도 하고(그것이 도널드처럼 고통일지라도), '환영'은 힐데가르트와 같은 이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기도 한다. 


우리는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단순함의 세계>에서는 자폐증이나 정신 지체, 중증 정신질환 등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예술성이나 천재적인 면모를 가진 이들이 소개된다. 아름다운 감수성과 표현력을 가진 리베카, 뛰어난 음악적 지성이 있었던 마틴 A, 숫자에 천부적인 재능과 애정을 가진 쌍둥이 형제, 훌륭한 관찰력과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보인 호세. 


이들은 사회적인 기준에서는 많이 모자라거나 쓸모없는 존재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면모를 살펴보면 매우 귀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의 '결함'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이 가진 능력을 개발시키는 것보다는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쌍둥이는 강제로 떨어져 무차별한 교육을 받아 기초적인 일상생활의 영위는 가능해졌지만, 숫자놀이에서 얻던 행복감과 함께 그들의 신비한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완벽하고 평범하게 '모자란' 사람이 되어버렸다.

 

성공의 비밀은 좀 더 특별한 곳에 있다. 모츠기는 이 지능 낮은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기로 했다. 상대를 위해서 몸을 내던지는 헌신,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위 문장은 자폐증이 있었던 딸을 예술가로 길러낸 파크박사의 논문에 수록된 마지막 문단이자, 저자가 이 책의 맺음말로 고른 문장이다. 이 길고 복잡한 책을 읽으며 접한 수많은 사례들과 주옥같은 문장들 속에서 내 마음에 가장 깊이 새겨진 문장이기도 하다. 


항상 같은 장소에 옷을 개어두는 부인이 없었다면, P 선생은 자신의 몸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늘 다정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준 할머니가 없었다면 리베카는 그토록 아름다운 감수성을 가질 수도, 극단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자간의 친밀한 관계와 아버지의 헌신적인 애정이 없었다면 마틴 A. 는 그와 같은 음악적 소질과 정열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환자를 대해 준 색스와 같은 의사가 없었더라면, 매들린은 더 큰 세상을 향해 손을 뻗지 못했을 것이며, 맥그레거는 똑바로 걷지 못한 채 결국 넘어졌을 것이다. 


저자는 환자들을 소개하면서 한결같이 그들의 지성과 예술적 능력을 찬송하며 그들의 의지를 추켜세웠지만, 나는 그들 뒤에 있는 가족들의 헌신과 저자의 진심 어린 사랑에 계속 눈길이 갔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책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헌신'과 '사랑' 따위의 단어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래, 그래서 이 책의 표지가 그렇게나 예뻤구나.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2023년 9월 19일, 열아홉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LYK2

1. <상실>
이 파트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한 여러 가지 신체적, 정신적 요소와 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시각적 정보를 조합하여 인식하지 못하거나, 특정 시점 이후의 그 어떤 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몸을 느끼고 제어하는 고유감각을 잃는 등 환자들의 사례는 안타깝기도 하지만, 질병과 증상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극복하여 삶을 꾸려 나가는 점이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나를 나답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이것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만약 잃어본 적이 있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공유해 주세요.


2. <과잉>
뇌의 질병으로 강렬한 충동과 원시적인 갈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틱, 투렛증후군, 간질발작 등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때로는 그것이 예술의 영감이 되거나 삶에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예술가들이 정신병에 걸리거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여 불행한 말년을 보내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가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에게 강렬한 영감과 날뛰는 감정은 축복일까요, 독일까요? 

마약이 사람의 내재된 능력을 일깨워 더 훌륭한 예술적 재능을 꽃피우게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3. <이행>
앞선 사례에서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억의 총합이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완성시킨다고 보았다면, 잠들어있던 기억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거나 형벌처럼 덮쳐온 사례도 나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잊고 있던 것을 원치 않게 떠올리는 것도 모두 고통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과 망각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알츠하이머로 삶의 기억을 잃어가는 것은 정말 슬프고 괴롭지만, 너무 큰 트라우마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기억이 곧 고문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4. <단순함의 세계> 지적 장애를 가진 무력한 존재도 연극, 음악, 수학 등 자신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특정 분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하고 풍부한 표현과 몰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여러 사례로 알려줍니다.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큰 인기를 끌면서 자폐스펙트럼을 가졌더라도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서번트 증후군 환자도 실제 사례를 모티브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지적장애를 가진 환자의 고유한 능력을 찾기보다는 그들의 결함을 메꾸고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부분에 아쉬움을 표현하지만, 모든 환자들이 서번트 증후군인 것은 아닐뿐더러 최대한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도 합니다. 

장애인의 교육과 사회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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