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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Nov 23. 2023

포드 기원 115년, 멋진 신세계로 가는 길목 어딘가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서평


안정이란 불안정만큼 그렇게 요란하지는 않습니다. 만족한 상태는 불우한 환경에 대한 멋진 투쟁의 찬란함도 없고, 유혹에 대한 저항 그리고 격정이나 회의가 소용돌이치는 숙명적인 패배의 화려함도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란 전혀 웅장하지 못하니까요.


남들과는 조금 다른 태생으로 인하여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늘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온 존, 그는 버나드의 도움으로 마침내 평생 동안 동경해 마지않았던 문명사회 - 멋진 신세계 - 에 발을 들여놓게 되지만, '인간답지 못한' 추악한 세계의 민낯을 마주하며 큰 실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불안정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불행해질 권리'를 되찾고자 싸우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이 소설에서 나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을 고르자면 존이나 버나드는 아니오, 헬름흘츠는 더더욱이 아니고, 아마 '헨리 포스터'나 베니토 후버'쯤이 아닐까 싶다. 나는 사회체제에 잘 순응하고, 문명의 이기와 나의 권리를 최-대한으로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사실 존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내게는 너무도 답답하고 꽉 막힌 사람, 존. 죽을 때 죽더라도(?) 그냥 좀 즐기면 안 돼? 그렇게나 사랑하는 여자가 한 번만 자자며 애걸복걸 매달리고 유혹하는데... 그걸 뿌리친다고?!?!


아일랜드 전역에서 하루에 4시간 작업을 실시했었죠. 결과가 어땠을까요? 불안정과 소마 소비량의 급격한 증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3시간 반이라는 잉여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은 그렇게 남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따름이었어요.


사실 나도 문명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존과 유사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다. 회계법인이라는 야생에 몸을 내던진 채 치열하게 살아오다 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한 후 내 앞에는 너무도 안락하고 안정된 삶이 펼쳐졌다. 남편은 나에게 그 어떤 경제적 부담도 지우지 않았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돈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아주 사소한 집안일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라 손가락질할 수도 있지만,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던 그 생활이 내게는 어쩐지 공허하고 따분하게 느껴졌다.


회사생활은 대부분 고되거나 지루하고 또 대체로 불안했다(하루에 평균적으로 늘 30~40통의 전화를 받아 잠결에도 전화벨소리가 울리는 환청을 자주 겪었다). 때로는 불행으로 치닫기도 했지만, 불안 속에서 피어나는 즐거움과 눈부신 성취가 주는 행복감이 있었다.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신세계에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야만인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한 존처럼, 나는 잔잔한 내 삶에 끊임없이 불안이라는 돌을 던져 넣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구태여 힘든 상황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자 애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 어쩌면 다행히도 - 존과 달리, 나는 금방 또 나의 삶에 적응하게 되었다. 아니, 적응을 넘어서 헨리나 베니토처럼, 아니 야비한 버나드처럼 앞장서 이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야만인은 퍼튼햄과 엘스태드 사이의 언덕 꼭대기에 세운 낡은 등대를 은둔처로 선택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서인지 건물은 상태가 아주 좋았다. 처음 그곳을 둘러본 야만인에게는 거의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고, 문명화되고, 사치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하기 위해 더욱 힘든 극기 수련과, 더욱 완전하고 철저한 정화淨化를 이루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함으로써 양심을 달래었다.


존이 답답하게도 린다를 결국 품에 안지 않았던 것은, 끝내 소마를 거부하고 안락한 삶에서 멀어지고자 부단히 애썼던 것은 '익숙해져 버려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삶에 완벽하게 적응해 버린 나는 더 이상 안락함을 버릴 수 없게 되었고, 이제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조금씩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워서 사람의 신경을 금세 마비시켜 버린다. 존이 만약 이것만, 저것만, 이번에만, 하나씩 타협하고 받아들였다면, 그는 결국 그에게 있었던 모든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도 어떤 면에서는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아이와 더 깊게 교감할 수 있는 모유수유 대신 분유를 선택하였고, 더 안락한 삶과 나의 자유를 위해 이모님에게 아이를 전적으로 맡기다시피 하고 있다. 지금의 나의 삶이 어쩌면 멋진 신세계에서의 인공적인 육아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편안한 삶을 위해 내가 포기하고 타협하고 있는 것들이 결국 나의 인간성을 좀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모든 인간은 물리-화학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죠.” 헨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뿐 아니라 엡실론들까지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입니다.


멋진 신세계에서의 모든 배아들은 수정 시점부터 등급이 결정되고, 등급에 맞는 양의 혈액을 공급받고, 등급에 따른 습성훈련과 수면교육 따위를 받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멋진 신세계에서처럼 알파, 베타 따위로 명확하게 등급이 결정되지는 않지만, 유사한 형태로 금, 은, 동 혹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다. 아이들은 서로 다르게 세팅된 환경에서 그에 걸맞은 모습으로 길러진다. 훌륭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최상의 조건에서 금이야 옥이야 길러지고,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낮은 수준의 교육과 문화를 향유할 수밖에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전기충격을 견뎌내야 하는 델타 아기들은 없지만, 불우한 환경 속에서 전기충격보다 더 큰 학대를 당하거나 방치되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어 고통을 주는 위선적인 우리 사회보다는 멋진 신세계와 같이 명확한 계급사회가 오히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랑한다는 것―.” 국장이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다. 불가피한 사회적인 숙명을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만드는 훈련, 모든 습성 훈련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멋진 신세계의 델타나 앱실론들은 불행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우둔해 보일지언정 본인의 일을 사랑하고, 충분한 여가를 즐기고, (소마에 의지한 불완전한 행복일지라도 어찌 됐건) 늘 행복하다. 다른 계급을 선망하거나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갈망하는 일도 없다. 그곳에선 저출산 문제도,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도 없을 것이고, 미움, 절망, 실망 같은 감정으로 힘들어할 필요도 없겠지. 대낮에 칼부림을 하는 미친 사람도, 배가 고파 말라죽는 아이도 없는 세상. 내가 최근에 힘들다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제거된 세계. 소마 1g이면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세계. 

하지만 그곳에서도 외모나 체격으로 인한 차별과 무시가 존재한다는 것이 조금 씁쓸했다. 그건 습성훈련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 걸까.


신은 기계와 과학적인 의학과 보편적 행복과는 병립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 문명은 기계와 의약품과 행복을 선택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책들을 금고 안에 넣고 잠가둬야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많은 의문이 솟구쳤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잉여인간을 왜 그렇게나 많이 생성해 냈을까. 과학이 그토록 발달했음에도 주사를 놓고 청소를 하는 일을 왜 로봇이나 자동화시스템이 아닌 인간이 계속하고 있는지, 승강기 안내원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쳇바퀴 돌 듯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기계 하나 뚝딱 만들면 통제도 더 쉽고 보다 '효율적'일 텐데, 굳이 힘들게 배아를 96개까지 분열시켜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생산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쓸데없는 낭비가 아닌가? 신세계에서의 인간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虱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멋진 신세계의 달콤함을 알게 된 이상 나는 벌레가 들끓고 살이 축 늘어지는 야만인으로서의 삶은 결코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존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만약 나에게 두 세계 중 한 곳에서 나의 삶을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나는 아마 야만인 보호구역에서의 삶을 선택할 것 같다. 껍데기뿐인 공허한 행복보다는 다양한 감정 속에서 피어나는 고통을 즐기고 싶다. 사랑이나 심오한 감정도 나누지 못하고, 자유의지 없이 멍청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기계만도 못한 존재라면, 태어나는 것 자체가 낭비가 아닐까. 애초에 과학과 문명의 존재를 모른다면, 우리의 부모님이 그러했고, 또 부모님의 부모님이 그러했듯 그것에 순응하며 나름의 행복을 찾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청소기의 존재를 모른다면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하는 것이 불편은 할지언정 불행이라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세탁기의 존재가 없다면 추운 날 손이 불어 터지는 손빨래가 뭐 대수일까. 야만이라고 규정짓는 것 자체가 문명사회와의 비교에 의한 것이니, 나는 문명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 야만적으로 - 인간답게 - 사는 것을 택하고 싶다. 하지만 또 같은 이유로, 내가 길들여졌다는 것을 모른 채 멋진 신세계에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자유나 의지라는 것 자체를 모를 테니 적당히 즐기며 적당히 즐겁게 살 수 있겠지. 왜 사는 가에 대한 기분 나쁜 의문이 들면 소마 반 알 먹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하면, 거대한 사회의 아주 작은 부품으로 무의미하게 살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게걸스럽게 살고 있다는 상상보다 훨씬 더 섬뜩한 기분이 든다.

확실한 것은 두 세계 어디에 태어나도 좋으나, 문명세계의 아름다움을 모두 누리다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떨어진 린다나, 습성교육을 받지 않은 채 신세계에 떨어진 존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최대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자 애쓰면서도, 과학이 더 이상 급속도로 발전하지 않기를(내가 죽기 전까지만이라도) 간절히 바라며 살고 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감수해야 할 대가가 두렵고, 그 대가는 '멋진 신세계'보다 더 혹독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발전하지 않은 채 고여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인데, 문명과 과학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과학의 발전을 어디까지 허용해야만, 어느 선까지 인권의 침해를 받아들여야만 우리가 '인간성'이라는 것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아진다. 



TMT. 1. 

1930년대에 쓰인 소설이다 보니 여자나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많이 느껴져 좀 아쉬운 소설이었다. 앱실론과 야만인들은 대부분 검은 피부로 묘사되고, 여자들의 존재는 뭐 성노리개나 섹스로봇 수준...ㅠ_ㅠ


TMT. 2.

헬기에서 내릴 때 택시비를 내는 것을 보면, 올더스 헉슬리도 이 정도로 과학이 빠르게 발달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포드 기원 115년인 지금도 택시에서 내릴 때 자동결제 시스템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포드 600년에 직접 계산을 한다고..? 생각보다 헬기속도도 좀 느리고요..?ㅎㅎ 물론 포드 기원 25년에 한 상상치고는 기가 막히지만.


TMT.3.

남들보다 불편함을 더 많이 느끼고 예민한 사람들이 기어코 발명을 해내고, 남들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멋진 작품을 남기듯 결국 남들과 조금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겠지. 체격이 작은 버나드나 너무 뛰어나서 외톨이가 된 헬름흘츠처럼. 나처럼 쉽게 순응하는 사람들도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2023년 11월 23일, 스물한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MBK

1. 1932년에 발표된 소설로, 현대사회의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도덕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 속 문명사회는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등급의 사회 구성과 그에 따른 역할 분배를 통해 기술과 사회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ex: 알파 등급은 지도자와 지능노동자로, 엡실론 등급은 물리 노동자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 소설에 제시된 등급과 역할 분배는 어떤 면에서 현대사회와 유사하거나 다를까요? 
(2) 현대사회에서는 사회 통제와 개인의 자유가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2. 소설에서는 등급에 따른 안정성과 행복을 강조하고 있고, 안정된 사회를 위해 행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 행복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까요? 
(2) 안정성과 행복을 강조함으로써, 자유과 다양성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나요? (ex: 통제관 무스타파 몬드 vs 야만인 존)


3. 소설에서는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원하는 특성을 갖도록 하는 기술이 등장합니다. 
(1) 이러한 유전자 조작은 개인의 자율성과 결정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2) 어떤 경우에 유전자 조작은 허용되어야 하며, 또는 금지되어야 할까요?
(3) 인간의 유전자 조작이나 감정 억제와 같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어떤 종류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필요할까요? 이를 어떻게 도입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요?


4. 주인공들의 감정 부재와 자율성이 상실된 상황에서, 창의성은 존재할까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거나 창작하는데 어떤 제약이 있을까요?


5. 소설에서는 낡은 옷은 무조건 새 옷을 사 입어야 하고, 단순히 자연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시간보다는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소비하고자 하는 등의 ‘소비문화’를 통해 행복함과 연관을 짓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소비문화가 우리의 만족감과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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