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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라푼젤 May 29. 2024

잔혹하게 현실적인 동화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서평

스포주의



평범한 화덕 뒤로 마법 같은 일이 펼쳐지는 작은 베이커리. 달콤한 빵 냄새 사이사이 진하게 배어있는 인간의 욕망. 마녀나 도깨비 혹은 산신령(?) 그 사이 어드메에 있는 듯 의뭉스러운 점장. 친모에게 버림받고 악덕한 계모로 인해 고통받는 가엾은 주인공. 동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많은 요소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지만, 이 소설의 주제역설적이게도 이것이다.


동화는 없다.


사랑에 아파본 적 있는가? 위저드 베이커리의 쿠키 하나면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는 일이나 실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다. 어릴 적, 아니 나이 삼십 줄이 되어서도 이따금씩 상상해 보는 그런 일들. 나 대신 회사를 대신 가주는 도플갱어라든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는 부두인형 따위를 만들어내는 것도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는 가능하다. 심지어는 이미 죽은 사람을 살려내거나 사무치게 그리운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마법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마법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악마 같은 그 인간만 없어진다면, 아무 불행 없이 오래오래 행복하게만 살았다는 동화 같은 결말이 가능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마법의 힘을 빌려 쉽게 치유한 마음은 무성의한 시작을 만들어 더 큰 상처를 불러일으키고, 간절하게 바랐던 누군가의 마음은 도리어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쉽은 족쇄가 되어버린다.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 (중략) … 그로 인한 부작용이 반드시 너한테까지 미칠 테니까.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해가 빠를 것 같은데, 상대방의 눈이 먼다고 치면 너 또한 사고로든 다른 무엇으로든 적어도 한 눈 정도는 멀게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체인 월넛 프레첼로 마음을 얻은 사람이 자신에게 비상적인 집착을 보이자 다시 그에게 마지팬 부두인형을 써 위해를 가하려는 여성에게 마법사는 무거운 경고를 건넨다. 상대방의 눈을 멀게 만들면 너도 합당한 대가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 이것은 마법사 본인의 경험이자 자책이기도 하다. '사소한 인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그의 실수로 인해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상에는 결코 사소한 인간도 사소한 사건도 없음을 잊었던 것이다. 마법사조차도 자신의 마법이 만들어낼 날갯짓과 결과 감히 통제하지 못할진대 하물며 한낱 미물인 인간은 말해 무엇할까.


‘긍정이나 부정, 자기가 바라는 변화가 어느 쪽이든 간에 이것은 물질계와 비물질계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법의 이용 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모든 마법은 자기에게 그 대가가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분만 가입하시기 바랍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나? 어릴 적 보고 마음에 깊이 품게 된 그림이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품에 안은 채 그의 등 뒤로 무시무시한 칼을 내리꽂는 그림. 그런데 그 칼은 너무도 길어서 원수의 심장을 관통해 결국 칼을 든 본인의 심장까지 관통해 버린다. 

그 이미지를 다시 찾아보려고 열심히 검색해 봤는데, 결국 찾지 못해서 매우 아쉽다ㅠㅠ


그리고 그 이미지와 함께 늘 마음에 품고 사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과 바람을 듣 우주의 어떤 '초월적 힘(?)'은 주어나 목적어는 듣지 못한다고. 그래서 'A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게 해 달라'고 빌면 그 초월적 힘은 A라는 간접목적어 무시한 채, 그 소원을 비는 주체에게 그 일이 일어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Secret>이라는 책에서 읽은 것인데, 어릴 적 영어공부하겠다고 깝죽대며 원서로 읽은 거고,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정확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음 주의...


다소 허무맹랑한 저주(?) 같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악의를 품을 때마다  이야기가 번뜩 떠올라 나쁜 마음을 풀어놓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은 후로는 정말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진심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잠깐 그런 마음이 들었다가도 바로 속으로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지금 한 생각 취소!! 퉤 퉤 퉤!"라고 외친다. 혹시나 정말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 봐 무서워서. 그랬더니 정말로, 살면서 내게 불행한 일이나 나쁜 일이 찾아오는 경우가 잘 없었다. 복 타고난 운명인지 저 이야기대로 초월적 힘이 나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내내 그 믿음을 성경처럼 따르고 있다.


달콤한 과자를 구워 내는 그의 표정은 조금도 달콤하지 않았고, 맛이나 향기로 치자면 오히려 스파이스 향신료의 매운맛에 가까워 보였다. 이걸 먹는 손님들의 행복한 표정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라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파티시에들은 주어진 대본이라도 외듯 한결같이 말했다. 하지만 그가 손님들에게 주는 것은 등을 기대고 안주해도 좋은 행복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자기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부딪칠 것. 운 좋으면 해결될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일시적으로 숨겨 준 건 그래도 단골손님이었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없어. 지금 숨으면 앞으로 다른 일이 생겨도 몸을 피하려고만 할걸.


<위저드베이커리> 속 이야기들은 점장이 구워내는 빵이나 과자들과 달리 전혀 달콤하지 않다. 점장은 손님을 호통치며 혼내고, 상처받은 주인공에게도 따뜻한 위로 한마디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신데렐라에게 호박마차를 만들어주고, 인어공주에게 두 다리를 선물하는 다른 동화 속 요정이나 마법사들과는 딴판이다. 마법의 힘을 써 주인공을 구해주기는커녕 허튼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고통 가득한 집으로 돌아가라 말한다. 그 대신 그는 끊임없이 주인공에게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상기시킨다. 모든 행동과 선택에는 책임과 대가가 따른다는 것, 때로는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 그냥 거기 있어서 일어나 버린 - 불행조차도 스스로 감당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동학대, 성범죄, 가정폭력, 부모의 자살, 강간, 살인, 방화 등 청소년에게 권하기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소재들을 가득 품고 있음에도 이 책이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들이 맞이할 세상은 동화 같은 이야기들과는 거리가 많이 머니까. 아무리 바라고 바라본들 마법 같은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릴 적 꿈꿔왔던 공주님이나 왕자님은 될 수도 없고, 우리 앞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때로는 사무치게 억울한 상황도, 죽고 싶을 만큼 슬픈 일도 생기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스스로 책임지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지금껏 잘 견뎌 왔다. 앞으로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타임 리와인더를 쓰지 못하게 한 불의의 사고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안다. 누군가가 씹다 뱉어 버린 껌 같은 삶이라도 나는 그걸 견디어 그 속에 얼마 남지 않은 단물까지 집요하게 뽑을 것이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주인공이 '타임 리와인더'의 사용에 성공한 모습(Y의 경우)과 끝내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지 못한 모습(N의 경우)을 나누어 보여준다. 타임 리와인더에 성공한 주인공은 기시감 - 혹은 우주의 어떤 힘이 보내는 메시지 - 덕분에 배 선생과 인연을 맺는 일을 피하게 되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구속되고 할머니의 원망과 함께 외로움이 그의 곁을 지다. 반면 N의 경우, 주인공은 끔찍한 시련을 이겨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흉터 위로 단단하지만 고운 새살이 돋아나듯 말 더듬도 조금씩 나아지고 가게에서 번따도 당하는ㅎㅎ 꽤나 괜찮은 청년이 되었다.


사실 처음 책을 덮었을 때는 N의 경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내 인생영화 중 하나인 <인사이드 아웃>의 메시지처럼, 슬픔과 눈물이 있어야만 웃음과 행복 가치가 있는 거니까. 고통을 이겨낸 'N의 경우' 속 주인공이 더 멋지게 느껴졌다. 하지만 Y의 경우라고 해서 그에게 상처가 없을까. 자신의 아픔은 자신에게 있어서만 절댓값이라는 주인공의 깨달음처럼, 상처의 경중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Y의 경우'로 쓰인 이야기가 조금 더 짧았을 뿐, Y의 경우에도 주인공은 또 다른 시련들을 이겨내고, 어린 시절 상처 극, 결국 멋진 청년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는 그럴만한 이 있는 소년이었으니.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치 있는 법이야. 한때의 상처를 의탁했던 장소를 굳이 되짚어가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아직도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를 믿는 녀석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더욱 빨리 달린다. 추억이라니. 환상이라니. 그 모든 것은 내게 있어서는 줄곧 현재였으며 현실이었다. 마법이라는 것 또한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을 뿐 꿈속의 망중한이 아니었다.


이 소설은 동화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재료들로 빚어낸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다. 주인공은 여느 동화처럼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우연히 엄청난 힘을 가진 마법사를 만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위저드베이커리는 주인공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애초에 마법 같은 건 없었을지도. 마법사로 보이는 점장은 그저 주인공에게 어깨 한 칸을 내어주었던 괜찮은 '어른' 그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아이를 떠올리는 한 편, 내가 가르쳤던 소년원의 아이들도 함께 떠올렸다. 괜찮은 어른 한 명, 그 하나를 가지지 못한 아이들. 저드 베이커리 속 점장과 파랑새를 끝내 만나지 못한 수많은 주인공들. 그런 아이들을 위해 진짜 위저드 베이커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해보았다. 산타를 믿을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따뜻한, 조금 더 꿈꿔볼 만한 동화가 필요한 아이들 많으니까.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릴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얼마 전 나의 부주의로 딸의 이마에 꽤 깊은 상처가 생겼다. 피가 멈추지 않아 급히 병원에 다녀왔고, 아직도 이마에는 작은 흉이 남아있다. 언젠간 새살이 돋아날 것을 알면서도 그 흉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손톱만 한 흉에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살면서 아이가 맞이 무수히 많은 상처와 고통들은 어 마음으로 지켜보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이의 앞길에 펼쳐질 모든 불행을 하나하나 걷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모든 비를 대신 맞아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나의 아이가 더 단단하게 자라기를, 본인의 선택을 사랑하고 책임질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라본다. 시련 앞에서 슬퍼하고 좌절하다 때로는 더 나빠지지도 하겠지만, 어떤 선택, 어떤 결정, 어떤 모습을 하건 간에 결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어른으로.


2024년 5월 30일, 스물일곱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LYK

1. 배 선생은 분노조절 장애 혹은 극도로 예민하고 집착스러운 인물로 묘사됩니다. 우리 모두 예민해지거나 분노하게 되는 경험들이 있을 텐데요. 분노를 참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면 같이 공유해 보아요.


2. 가장 와닿거나 재미있었던 챕터가 무엇인가요? 가장 영감을 받았던 부분을 골라보고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3.'나'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점장'은 '나'가 머물 장소도 제공해 주고, 몽마에 시달리다가 겨우 깨어난 '나'를 심적으로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살면서 나에게 '점장' 같은 존재가 있었는지 떠올려보고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나를 위로해 줬었는지 이야기해 보자.


4. 타임리와인더 부분에는 머랭모양의 시간여행과자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각자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언제인지 또 왜 그때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지 이야기 나눠보자.


5.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있나요? 있다면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6. 책의 마지막에는 타임리와인더를 사용해서 배 선생과 만나기 전 시간의 경우, 타임리와인더를 사용하지 못해서 그대로 미래가 흘러버린 시간의 경우 2가지를 서술하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책의 주인공이라면 어떤 순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은지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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