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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야 한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서평

by 책 읽는 라푼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서평

"아랍인이 유태인을 이스라엘로 보내는 최초의 일이구나"


그렇다. 이 이야기는 아랍인이 유태인을 이스라엘로 보내는 최초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랍인과 유태인의 사랑이야기이자 여든여덟 살 노인과 열넷 아이의 우정이야기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뒤엉키고 연대하는, 그리고 결국은 사무치게 사랑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사랑이야기에는 종교 갈등, 이민자 문제, 노인 빈곤, 사회 해체, 계층 간의 갈등, 복지 사각지대까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아픈 이면이 녹아들어 있다.


나는 사랑이야기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를 좋아한다. 180cm 이하는 남자로도 보지 않는다던 여자가 가장 키 작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연하만 만나겠다던 남자가 누나에게 목을 매고, 특정 직업은 피하려던 남자가 결국은 그 직업을 가진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마는 그런 이야기들을. 정치적 대척점에 있는 남녀가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친구가 되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 이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해 내고, 가슴을 드러내며 교태를 부리는 여자와 페미니스트가 손을 잡고 우정을 나누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는 솔로>와 <더 커뮤니티>의 이야기다.


사랑은 그런 거니까. 꼭 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형제간의 사랑, 친구 간의 우정, 부모 자식 간의 정. 사람과 사람사이의 모든 갈등과 그 갈등을 넘어서는 온기와 사랑을, 사랑한다.


당신의 모하메드는 여기 있어요. 내가 유태인으로 키운 거지요. 뭐 그래봤자 바 미츠바를 치른 것하고, 항상 코셰를 먹은 것 정도니까 안심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사랑이 담긴 책이라 할 수 있다. 구별 짓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상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가, 이민자가 많은 프랑스에서는 '종교'가 곧잘 도화선이 된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형체도 없는 무형의 이념과 사상, 믿음 때문에 서로 많이도 미워하고 할퀴고, 찢어오지 않았던가. 뭐 그래봤자 조금 다른 성인식을 치른 것이고, 조금 다른 음식을 먹는 것뿐인데. 결국 인간은 모두 자연의 법칙 앞에 무릎 꿇고 마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유세프 카디르 씨는 모하메드가 모세가 되었다는 사실에 심장을 쥐고 죽어버렸지만, 로자 아줌마에게 모하메드는 그냥 모하메드일 뿐이었다. 로자 아줌마에게 종교는 삶 그 자체였고, 가장 두려운 순간에도 그를 쉴 수 있게 해주는 안식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모가 모세라는 이름을 쓰건, 관심을 끌겠다고 온바닥에 똥을 싸대건, 갑자기 호르몬을 맞아 가슴을 달고 나타나건, 느닷없이 힌두교도가 되었다고 하건 사랑할 것이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으니까

.

자장가를 들을 만큼 어렸던 적이 내겐 없었고, 언제나 머릿속에 다른 걱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


비참한 모모의 상황에 가슴이 아파 나는 몇 번이나 잠옷 소매를 얼룩지게 만들어야 했다. 모모가 쉬페르를 보내고 받은 오백 프랑을 하수구에 처넣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를 따라 송아지처럼 울기도 했다. 모모는 최근에 내가 접한 그 어떤 책이나 영화 속 인물보다도 불쌍한 아이였다. 창녀인 엄마, 엄마를 죽인 정신질환자 아빠,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보모. 주거환경과 위생상태, 갖가지 위험요소와 온갖 범죄에의 노출은 말해 무엇하랴. 고작 열네 살 난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비참하고 처참하고 정말이지 끔찍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결국 모모를 살린 것은 '사랑'이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할 수 있어서, 하밀 할아버지와 롤라 아줌마, 카츠 선생님과 왈룸바 씨를 사랑할 수 있어서, 그의 친구 아르튀르를 사랑할 수 있어서 살아낼 수 있었다.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모모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아마 그 아이의 능력이었으리라. 그래서 책을 덮고 난 후 나는 모모에 대한 걱정과 슬픔으로 마음 아파할 이유가 없었다. 그 아이는 분명, 나딘 아줌마와 라몽 아저씨를, 그리고 금발의 동생들을, 그에게 밀려온 새로운 삶을 끝내 사랑하게 되었을 테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있는 각종 문제들은 모두 '사랑'이 부족해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불행해지고,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미움과 허무만이 남아 스스로를 파괴해 버리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 녹아있는 종교 갈등, 이민자 문제, 노인 빈곤, 사회 해체, 계층 간 갈등, 복지 사각지대까지도. 모두가 조금 더 '사랑한다면' 너무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일 것이다. 물론 그 '조금 더'가 참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나는 사랑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소 유치할지라도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끝맺음되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모모는 결국 행복해졌을까? 로자 아줌마를 자주 그리워하고,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에 때때로 짓눌리고, 속한 세계가 오래도록 달랐었던 금발의 아이들을 보며 이따금씩 울컥하겠지만. 그래도 모모는 사랑할 것이니 결국 이겨낼 것이고, 끝내는 행복해질 것이다. 모모의 '사랑하는 능력'이 오래도록 빛을 발하기를. 그리고 지금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많은 아이들이 '사람'과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부디 잃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KakaoTalk_20250326_003850597.jpg 2025년 2월 27일, 서른여섯 번째 책당모의♥


[발제문] by LYK2

1. 벨빌 거리에는 소외된 존재들이 모여 삽니다. 늙은 창녀이자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로자 아줌마, 창녀의 자식으로 원치 않게 태어났거나 양육이 불가능해서 맡겨진 여러 아이들, 아랍인, 흑인, 회 교도, 유태인 등 인종과 종교가 주류와 다른 이방인들, 창녀와 포주와 날품팔이 등 하층민들 – 이 들은 사회보장시스템이나 빈민구제제도, 교육과 의료 등 사회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여 최소한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로자 아줌마에게 경찰과 병원은 공포의 대상일 뿐이고, 아이들은 빈민구제소에 가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비참한 삶 속에서도 모모는 사랑할 존재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모모는 병들고 추한 로자 아줌마를 사랑하였고,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성별을 바꿀 용기와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씨를 지닌 롤라 아줌마를 존경하였고, 그저 낡고 망가진 우산일 뿐인 아르튀르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로자 아줌마를 살리기 위해 왈룸바는 북과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었고, 늙고 병든 삼층 남자는 그녀에게 꽃을 보내 주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사랑해야 한다’로 맺어지듯,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및 불완전성으로 인한 문제를 각 개인의 연대로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삶의 질곡 앞에 사랑과 유대감은 큰 힘이 되어주지만, 그것에 기대기엔 개 인이 대처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겁습니다. ‘사랑’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일까요?


2. 모모는 사랑과 관심에 목마른 소년이지만, 나딘을 처음 만났을 때와 집에 초대받아 대화를 나누었을 때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미소를 지어 주었지만 오히려 상처를 받고 뛰쳐나옵니다. 아마도 자 신에게 주어지는 온정이 동정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과 동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타인에게 애정을 베푸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을까요?


3. 로자 아줌마는 나치에 끌려갔던 기억 때문에 항상 공포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 그녀는 지하실에 자신만의 장소인 ‘유태인의 동굴’을 꾸려 놓고 더럽고 허름한 공간일지라도 그곳에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모모가 그녀를 ‘유태인의 동굴’에 데리고 가서 임종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모두를 경악시켰지만, 그것은 병원을 두려워한 로자 아줌마에게는 안식을 줄 수 있는 모모만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영역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주변 사례를 공유해 주세요.


4. 로자 아줌마는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기를 극렬히 거부합니다. 모모는 그런 그녀를 대변하며 카츠 선생님에게 자기결정권에 대하여 항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낙태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아 억지로 태어나게 된 창녀의 아이들, 안락사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아 마지막 순간까지 공포에 떨었던 로자 아줌마, 타고난 성별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매일 호르몬을 맞지만 불로뉴 숲에서 매춘을 하며 고단한 생을 살아가는 롤라 아줌마를 생각해 보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점을 꼬집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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