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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안 Apr 20. 2024

4월 이야기





집 안으로 봄을 들여 왔다



단지 내 나무에 오종종한 나뭇잎들이 매달렸다. 새파란 여름 나무도 좋지만, 이렇게 첫 고개를 드는 4월의 연두색 나뭇잎이 참 예쁘다. 그래서 요즘은 거리를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어제는 싱그러운 연두빛 풍경을 지나 수영을 다녀왔는데도 기분이 그저 그랬다. 아침수영 후 샤워까지 끝냈으면서 기분이 애매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럴 때면 '오늘 왜 우울하지?' 체크리스트를 살펴봐야 한다.








음. 집에 가서 곧 식사할 예정이고, 수영하며 움직였고, 샤워해서 청결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그저 그런 기분의 답은 하나.

꽤 오래 아무 글도 안 썼기 때문이다.



요즘 유난히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꽃차 티백을 냉침해 종일 신선한 차를 마시기도 딱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가만 생각하니 이것은 아무것도 창작하지 않는 생활 끝에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자구책 같다. 물론 스스로를 대접하는 느낌이 크고, 먹을 때 즐거워서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멘털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를 잘 대접해라’라고들 한다. 그 자기 대접이 운동이나 꾸밈인 사람도, 좋아하는 취미인 사람도 있다. 지금의 나는 요리를 해서 스스로에게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할 줄 아는 요리를 한 가지 더 추가(+1)하는 기쁨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제일 좋아하는 창작을 안 했었다. 옳다, 이제는 무언가 쓸 때다.



간단한 어플 일기장이나 스케줄러 기록, 브런치 글쓰기까지 아무 곳에도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쓰지 못했다는 말에 더 가깝겠다. 물론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느슨하게 잡아도 3월 말부터 지금까지 한 달간 정말 바쁘게 봄꽃 구경하며 다녔다. 다녀오면 잠깐 쉬고 다음날 다시 놀러 나가는 일상을 반복했다.

사실 이번 브런치는 2024년 4월을 기념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렇게까지 어딜 가서 어떻게 놀지만 궁리하며 보낸 시간이 지금껏 없었으니까. 인생에서 가장 팔자 늘어진 봄을 기념하며 순간을 떠올려 본다.












매화만 피고 벚꽃은 아직이었던 3월 말, 용인 호암미술관 전시를 다녀왔다. 전시도 전시지만 호암미술관을 둘러싼 전통 정원 희원의 봄을 만끽하고 싶어 찾았는데 벚꽃은 아직이었다. 작년 김환기 회고전 <한 점 하늘>에 다녀온 이후 희원의 봄을 기다려 왔는데 살짝 빨랐던 걸까? 하지만 통창 시원한 미술관 2층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호수 근처의 한적한 야외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고 앉아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봄바람을 느꼈다.



전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도 미술관의 명성만큼이나 좋았다. 주제는 불교 예술과 관련된 여성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여성, 작품을 후원했던 여성,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되고팠던 여성 등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렇게 송곳처럼 예리한 주제 하나를 잡아 파고드는 전시가 점점 더 좋아진다. 확실히 작품이 기억에 더 잘 남는다. 작가 회고전이나 어떤 미술 사조에 대한 전반적 내용을 다루는 전시도 좋은데 그러면 결국 포스터에 있던 그 작품만 남는 경우가 많아서. 주제가 명확한 전시는 각자 취향 따라 뇌리에 남는 작품이 생긴다.



아름다운 여성이라 해 봐야 결국 죽고 나면 썩어질 뿐이라는 이치를 준엄하게 설파하고자 시체의 부패 과정을 세세히 그린 '구상도'가 가장 인상적이다.





아름답지 않은 모습 저렇게까지 그려서라도 미(美)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려던 노력은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움에 천착하는지 깨닫게 한다. '돈에 관심 없다'라고 외치면서 구독자에게 강의 팔기 바쁜 성공학 강사 같기도 하고. 이 그림 반대편에도 시체 부패 과정을 그린 비슷한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 같은데 누구에게 소구할 목적이었는지 궁금하다. 아름다운 여성에게만 매혹되는 남성? 아름다워지고자 꾸밈에만 인생을 쏟는 여성? 이 그림들은 누구의 마음을 고치고 싶었을까.








자기로 만들어 매끈하게 빛나던 백자 보살상, 유럽에까지 유명세를 떨쳐 수출된 중국의 성모와 아기 예수 백자상도 기억에 남는다. 세트메뉴 좋아하는 한국인답게 고려부터 아미타여래+지장보살+관음보살로 이루어진 부처님 3종세트를 만들어 과거와 현세, 미래의 행복을 한 번에 기원한 것도 재미있었다.

확실히 미시사가 재미있다니까. 불상 제작 후원의 대가로 소원을 적어 불상 안에 채워 넣는 복장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남편이 갤럭시 스마트폰을 자랑하며 연신 스마트렌즈로 글씨를 해석했는데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직책과 사람 이름은 확실했다. 나도 질세라 한의사의 위엄을 보이겠다며 쌩눈으로 글을 해석했는데 어라, 몇몇 글자가 좀 읽히잖아? 새삼 뿌듯했다. 그리고 여기에 소원을 적은 사람들의 다른 삶도 궁금해진다. 부처가 될 수 없는 성별의 한계를 슬퍼하며 금으로 쓴 불경을 남긴 귀부인도 기억난다. 그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원하던 건 이루었나요? 비단에 글씨 쓴 덕택에 지금 제가 이런 구경을 다 해 보네요.






광교산 형제봉 정상



그러고선 봄맞이 광교산 산행을 했다. 유튜브에서 2시간컷이라고 했는데 3시간 40분 정도 걸렸다. 산행은 아침에 시작하자는 결론. 산행 이후 경기대 근처, 미드센추리 무드의 힙한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얼큰하게 들이켰다. 땀이 마르면서 몸이 소금으로 버석해져 아쉽게도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행궁동 거리를 걸으며 목련을 구경하기도 했다. 따사로움과 더위 사이의 날씨에 삼삼오오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커플들이 한껏 차려입고 데이트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니, 몇 살이나 먹었다고 20대 커플을 보며 흐뭇해하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인생 다 산 척하는 나이가 30대라더니. 정신 고쳐 잡고 나야말로 밖에 다닐 때 의관을 정제하기로 마음먹는다.

모두 인파가 엄청나서 소위 '핫플'에는 엉덩이를 붙여볼 수도 없었다. 여기는 목련뷰 핫플레이스, 카페 정지영커피로스터즈 장안문점의 건너편이다.






그러고선 봄밤의 호젓한 정취를 느끼며 전통주를 마시러 갔다.

차 마실 때 쓸 차판을 사고 싶은데 실제로 잘 쓸지 애매해서 마셔 보러 갔던 곳이다. (그리고 차판은 사지 않기로 했다.) 자사호가 예뻐서 검색해 보았는데 24만 원대라 기함했다. 밤에는 전통주를 판매한다.




알딸딸하기 직전의 기분 좋은 상태로 밤벚꽃을 보는 기분이 참 좋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놀러 갈 때 폴더폰 쓰면 사진이 망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봄꽃 구경 시 아이폰을 지참하기로 한다.



수원을 흐르는 여러 물줄기를 따라 여기저기 벚꽃을 구경 다녔다.








그리고 살짝 이색 조합(?)으로 경주 벚꽃놀이를 떠났다. 지난 가족모임에서 술김에 호기롭게 질러 시어머니와 시누이, 그리고 나 셋이 벚꽃구경을 떠난 것이다. (나만 특이하다고 생각한 줄 알았는데, 에어비앤비에 쓴 시누이의 방명록으로 우리 모두 특이한 조합이라 생각했음을 알게 됐다)

태초의 아싸라서 음악 들으며 점점 빨리 걷는 게 취미인 나와는 달리, 시댁 식구들은 사교적이고 붙임성이 좋다. 아무래도 남편과 함께하면 나는 조용히 있으니 이번 여행에서는 대화 많이 하고 사진도 많이 찍자 싶었다. 해서 결론은 즐거웠다.



벚꽃이 절정인 경주는 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꽃다발 같았다.

그리고 스위스 여행 이후 한동안 끊었던 '포토존에서 줄 서서 사진 찍기'를 수행하며 관광지에서도 가장 유명한 포토존에서만 사진을 찍었다. 글쎄 인생네컷도 찍었는데 정말 잘 나왔다. 앞으로 한 번씩 찍어야지. 몰랐는데, 안압지가 이름을 동궁과 월지로 바꾼 지 오래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동궁과 월지의 밤







숙소에서 예쁜 일몰도 보고








여행지의 밤에서 라라랜드를 보며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듯한 기분 좋은 낯섦도 느끼고








선선함 속 따뜻함이 섞여드는 아침 바람을 맞으며 요거트로 식사도 했다.

이렇게 꽃을 즐기니까 뭔가 옛 중국 시인 된 느낌.






그리고 정취가 느껴지는 지금까지의 자연과 달리

대자본의 힘으로 빼곡하게 '꽂아 넣은' 봄꽃을 볼 수 있는 공간,








에버랜드로.

마침 산리오 캐릭터와 함께 꽃밭을 꾸며 평일임에도 정말 사람이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테마파크에 꽃을 왜 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놀이공원은 놀이기구 타러 찾는 곳으로만 생각했다. 꽃밭을 왜 그렇게 크게 꾸미지? 누가 꽃구경하러 에버랜드를 가나?







저요




3월 말 희원 방문에서 불발된, 산등성이에 몽글몽글 핀 벚꽃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즈음 꽃구경이 한계에 임박하여 기다렸던 만큼의 감탄이 나오지 않아 아쉬울 따름. 동물원도 신기했고 오랜만에 타는 놀이기구도 어지럽고 재미있었다.

밤 아홉 시를 넘기고 어른들은 체력이 쭉쭉 떨어지는데, 아이들의 생생한 웃음소리가 에버랜드를 채웠다. 인생에서 손꼽히게 신나는 밤을 보내는 중인 아이들.

한의학적으로 아이를 '순양지체'라고 한다. 순수한 양기의 결정체라는 뜻이다. 웃고 뛰는 아이들을 보면 그 말이 새삼 되새겨진다. 양기가 피어나는 봄, 순양지체의 아이들.



너무 많이 놀러 다녔나? 아직 한 발 더 남았다.

결혼식 와 주신 친척 어른들께 인사드릴 겸, 다음 주 기일인 할아버지 묘소 찾아뵐 겸.

친정 가족과 확장된 친정 식구까지 모두 모여 남쪽으로 떠났다.






태종대




꽃구경이 시들해질 즈음 마주친 태종대. 온 바다가 반짝이는 햇살로 넘실거렸다. 아직 너무 덥지 않아 신선하게 착 붙는 공기도 좋았다.

벚꽃을 한창 보다가 언뜻 유채꽃이 떠올라 제주도까지 그리움이 미쳤는데, 바다가 보고팠구나 싶었다. 함덕서우봉 해변의 유채꽃들이 참 예뻤는데.

자갈치시장에서 야무지게 식사하며 날씨가 다 한 여행을 마치고,

나약해지면 안 된다 다잡으며 힘차게 아침 수영까지 다녀와서,



나는 몸살에 걸렸다.











인생에서 이렇게 젊고 건강한 상태로, 이렇게 큰 걱정 없이, 이렇게 유유자적한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힘껏 즐기기로 했다.

어제는 몸을 약간 회복해 수원시에서 4월 말까지 무료 프로모션하는 야외 방탈출 프로그램, <수원역>에 참여했다. 갑갑한 실내보다 이렇게 밖을 걸으면서 문제를 푸니 훨씬 즐거웠다. 프로그램 자체의 품질도 준수하여 남은 4개의 프로그램도 도전할 예정이다. 정말 신박한 홍보 겸 액티비티 프로그램이다. 어떤 공무원이 아이디어를 내고 누가 승인해서 이렇게까지 만들었을까. 확실히 세상은 점점 변하고 있다.



아, 생각해 보니 그간 글을 못 쓴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삼체문제 때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삼체'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이름이 좀 특이하다 하며 시작한 넷플릭스 <삼체>. 홀린 듯이 며칠 만에 다 보고 유튜브 리뷰를 찾다 갈증이 들어 e-book을 냅다 결제했다. 듄은 차마 다 못 읽을 것 같은데 삼체는 도전할 만해 보였다.








지금은 2권까지 읽고, 마지막 3권을 막 시작한 참이다.

2권까지 읽은 나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소설 2권까지 본 감상은 1번, 드라마 시즌1을 다 본 후의 감상은 2번이었다. 5월 초반까지는 삼체 3권과 함께 흘러가지 않을까.



<삼체>를 읽으니 세상사가 작아 보인다던 오바마 전 대통령의 평이 널리 회자된다. 우리의 우주는 우리에게는 정말 크지만, 실제로 아주 작을 수도 있다. 우리의 우주가 누군가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라는 이야기는 현재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어쩌겠나, 아무리 작아도 여기가 나의 가장 큰 세계인 것을. 그래서 점점 스피노자가 종말이 오든 말든 심겠다던 사과나무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 세상이 어떻든 내 세상을 돌리는 것은 나의 몫이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에서도 느꼈던 지점이다. 삼체까지 모두 읽고 함께 감상문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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