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스트럴 심라온

by 심지훈

중세 유럽에서 여러 지방을 떠돌면서 시를 읊던 시인을 일러 ‘민스트럴(minstrel)’이라고 했다. 우리말로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다. 음유시인이 민스터럴의 중국어 번역어일지, 일본어 번역어일지는 따져 볼 일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군중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감칠맛나게 전하는 전기수(傳奇叟)라는 직업이 있었다. 전기수를 달리 강독사(講讀師)라 불렀다.


글쓰기의 근간이 시심(詩心)라 간파하고 사는 이는 드물다. 사회적으로 문해력 논란이 한창이지만, 먹고사는 문제와 글을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문제와 사이에는 큰 장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돈 버는 것과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공부를 잘했으면 하고, 그 바람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학원으로, 과외수업으로 일찌감치 내몰린다. 이 사실은 구문이다.


요즘은 5세면 기본 4~5개(예체능 포함)의 학원을 다닌다. 이것이 정상인지 심도 있는 고민을 하는 부모를 나는 여지껏 만나본 일이 없고, 사회적 논의로 이끌어보겠다는 공기(公器)의 기운도 나는 느껴본 일이 없다. 이건 흡사 태풍에 자빠진 수확 직전의 처참한 벼들이요, 기울어도 너무 기운 운동장 모습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우리 라온이는 또래와 달리 태권도장만 다닌다. 그리고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숙제에 주안을 두고, 엄마가 조금 학습을 도와준다.


라온이 담임선생의 경우, 교사 30년차로 다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아침 20분 독서’를 강조했다. 오전 8시 30분 입실, 수업 10분 전인 8시 50분까지 독서. 여기에 집에서 부모님 도움을 받아 하루 3권씩 책 읽고 독서기록장 작성을 병행했다.


1년간 80권을 읽고 기록하는 걸 목표로, 12월에는 다독왕을 선발할 거란 고지도 했다. 방학 때도 꾸준히 할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오늘 라온이 담임선생은 여느 날처럼 알림장에 아이들 하루일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올리면서 이 점도 같이 고지했다.


“12월에 다독상 수상자 명단을 조사할 예정이오니 아직 80권 도달이 안된 친구들은 11월말까지 80권이 도달될 수 있도록 꾸준한 독서 및 독서기록장 작성을 부탁드립니다. 추후 독서기록장 권수가 적은 아이들에게만 개별 톡을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2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아직 80권에 도달하지 않은 아이가 여럿이라는 얘기고, 다른 하나는 담임선생이 미달자에게 개별적으로 톡을 넣을 만큼 이 사안을 중요하게 본다는 얘기다.


초등1학년 선생님들한테 물어보면, 초등학교 1학년 모범생의 범례를 알 수 있다. 1학기 땐 대소변을 가릴 것, 점심을 시간 내에 먹을 것, 젓가락질을 할 것, 책상을 깨끗하게 쓸 것.


이 기본이 지켜지면 선생의 그다음 요구는 학생이 아니라 부모를 향한다. 학원을 되도록 많이 보내라거나 숙제를 제대로 하도록 하라가 아니라 ‘선생의 알림장을 성실하게 읽어줄 것’이다. 초등1학년 땐 아이의 학습부진으로 생기는 문제보다 학부모가 챙겨줘야 할 소소한 것들을 빠뜨려 생기는 문제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하교 후 엄마가 추천해준 동화책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를 읽어주고 기록장을 써보라고 했다. 다양한 동물들이 사랑의 출처를 달리하는 내용이라 라온이에게 “네 생각을 적어 보라”는 미션을 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적고는 아빠에게 큰소리로 읽어줬다.


“나는 사랑이 눈에서 오는 것 같아요. 아빠를 생각하면 아빠를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아빠를 사랑해요. 또 엄마랑 동생이랑도 눈에서 오는 것 같아요.”


독서(독서기록장) 120권(기록장 120회)만의 쾌거는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밝힐 뿐 아니라 바른 글씨로 적고 큰소리로 읽어줄 수도 있게 됐다는 점이다.


나는 라온이에게 말했다.


“너는 음류시인이다! 하산토록 하여라!”


물론 라온이의 시적 감각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다.


여섯 살 봄날 따스한 오후, 벚꽃 질 때 공원 벤치에서 라온이가 홀연 한 말,


“어, 벚꽃이 하늘에서 내려오네.”


일곱 살 때, 초저녁 한빛탑 음악분수를 감상하다 저 멀리서 반짝이는 신세계백화점 네온사인을 보고는,


“백화점도 춤을 춘다.(물이 춤추니까.)”


고모 쉰 번째 생일에 고모가 케이크를 잘라 한 조각 들어내자,


“어, 케이크가 소풍가네.”


지난 8월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소고기 반찬을 챙겨주자,


“어, 내 밥으로 자꾸자꾸 소고기가 날아오네.”


라고 했다.


나는 훌륭한 민스트럴은 부모와의 풍부한 교감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다. 이때의 교감은 사랑일 것이다. 아이들은 돈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극진한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그래야 옳게 바르게 굳세게 쭉쭉 잘 큰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그 사실을 우리 라온이는 제 눈으로 확인하는 걸 넘어 확신하고 있다. 참으로 놀랍고 기쁜 일이다.

keyword
이전 16화근거리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