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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선 Feb 13. 2023

한도; 일정한 정도 또는 한정된 정도

귀국 후 온갖 병원과 한의원을 돌아다녔다.

두 달 넘게 기다려 받은 대학병원 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8 체질 한의원에서 체질 진단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 리스트를 받았다. 

또 다른 한의원에는 이불 바늘보다 두꺼운 침으로 코 안쪽과 발가락 사이사이에서 피를 철철 뽑아냈다. 

어느 의사 선생님은 내 몸에 피가 부족하다고 했다.

각기 다른 진단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평가 속에서 점점 무기력해졌다.

병원을 돌아다닐수록 나는 병명 없는 '환자'가 되어갔다. 


그리고 나는 백수였다.

어렵게 들어간 UBC 대학원 과정은 끝내 졸업하지 못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는 _____입니다."라로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면

"나는 환자입니다."말고는 딱히 완성할 수 있는 문장이 없었다.


'환자'를 대신할 가장 익숙한 정체성은 다시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모교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익숙하던 정문은 사라졌고, 캠퍼스복합단지가 들어섰다.

중앙도서관 열람실 일부의 기능이 옮겨졌고, 스타벅스랑 편의점 등이 입주했다. 

땅 아래로 파고들어 간 형태의 이 건물은 

지하라는 태생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다시 익숙한 환경으로 돌아와서인지

밥과 반찬으로 구성된 정상적인 음식을 주식으로 먹게 되서인지

병원을 전전하는 것 말고 수업을 듣는 일과가 생겨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학기가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은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어느 날 커피를 사서 강의를 들으러 가다가 

우연히 한쪽 코너에 있는 피트니스센터를 보게 되었다.

새 기구들과 한쪽 벽에는 암벽등반을 할 수 있는 섹션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니야, 고개를 돌렸다.


그다음 날은 입구에 붙어 있는 사용료와 등록 절차를 확인했다.

일주일 뒤 실내용 운동화를 챙겨서 학교에 갔다.


다시 움직이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극단으로 내달릴까 봐 무서웠다. 

나는 적당히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면 할수록 더더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지난 2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절제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하나를 덜 하는 것이 하나를 더 하는 것보다 힘든 사람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 제한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3일 이상은 절대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트레이드밀은 최소 40분이라는 하한선을 갖고 있었다. 이제는 최대 40분까지라는 상한선을 두었다.

3일 중 하체, 상체, 복부를 교대로 하고 하루에 오직 딱 한 동작만 하기로 약속했다.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어긴다면 피트니스센트 이용권리를 박탈하겠노라 스스로에게 엄포를 놓았다.


횟수와 세트를 채우려고 해치우듯이 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한 동작만 할 수 있었으므로, 저 사람이 머신을 언제까지 차지할 것인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하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 

자연히 타깃으로 한 부분 말고 그 주변의 움직임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초코파이를 박스로 갖고 있는 사람은 초코파이 하나를 먹지만

단 하나의 초코파이만 가진 사람은 코팅된 초코와 그 아래 포슬한 빵, 말랑한 마시멜로우를 하나하나 

느끼게 되는 것처럼


가령, 크런치를 하면서 예전에는 복직근, 하복부냐 상복부냐 이 정도만 신경 썼었는데

이제는 허리 뒷면과 바닥의 관계, 날개뼈의 움직임, 대퇴사두근이나 내전근의 반응 등

몸 전체를 꼼꼼히 보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데드리프트를 할 때 증량이 아니라 힙힌지를 집중해서 꼼꼼히 찾았다고나 할까.

무리하지 않고 기분 좋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밌었다.


영어를 못한다는 콤플렉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외국에서 생활한 친구들이 부러웠던 마음들

나에게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고 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시작한 유학생활을 끝내지 못한 것을

꽤 오랜 시간 '참패'라고 기록했었다.


하지만 그 실패의 경험을 통해 '무리'가 어떤 감각인지를 배웠다.

진실로 느끼는 기쁨 없이

순간순간 주어지는 보상과 인정을 따라서 

숨을 참았다 몰아쉬며

허덕거리며 가는 느낌 

그럴수록 더 매몰차게 몰아세우는 마음까지


이제는 움직임, 일, 관계에서도 무리하지 않는 한도를 잘 찾으려고 한다.

일정한 정도, 한정된 정도로 나를 지킨다.

상황이나 컨디션에 따라서 넘치고 부족함이 있지만 그 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세, 네 번째 손가락 마지막 마디와 

손바닥에 잡힌 딱딱한 굳은살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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