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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선 Feb 14. 2023

대학원생 슈퍼 을(乙)이 찾은 곳   

석사 3학기 동안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조교를 하고, 과외를 하고, 틈틈이 운동을 하며 

학업, 수입, 운동의 나름대로 균형 잡힌 생활을 했다.


그 삼각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논문이었다.

그렇다. 학사와 석사를 나누는 가장 큰 차이점은 논문이다.

물론 학사 졸업 논문을 쓰기도 했고

UBC에 원서를 넣으면서도 autism에 대한 소논문을 작성하긴 했었다. 


하지만 석사 논문은 조금 달랐다.

합리적인 사고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문 수준 이상의 영역이었다.

해당 영역에 보탬이 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가당치도 않은 중압감을 혼자 느끼며 주제를 잡는데 갈팡질팡했다.


게다가 졸업해야 하는 7명의 사람들 중 단 2명 만을 졸업시켰다는 

결국은 다른 지도교수와 다시 석사를 시작했다는 

졸업 논문을 쓰다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원형탈모 약을 먹었다는 

흉흉한 소문들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캐나다 유학도 중도 포기하고 돌아온 마당에 

졸업 논문을 제때 못써서 한 학기를 더 등록해야 하는 상황은 정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 논문에 집중해야겠다.

고시생들을 위한 열람실은 신청자격이 안되어서 사용을 못했지만

일반 열람실을 고시생 열람실처럼 사용했다.

제일 먼저 가서 자리를 맡았고, 가장 늦게 나왔다.

엉덩이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양(Quantity)을 늘리는 것은 원하는 결과(Quality)에 선행한다."는 믿음대로

논문은 나름대로 진도가 나갔다. 


하지만 열심히였던 것과는 무관하게 나의 논문 초고는 번번이 비루했다.

일단 초고를 지도교수님이나 선배들에게 보여주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보기 좋게 편집에 공을 들였고 

보는 사람의 눈의 피로도를 줄이기 위해 백색이 아닌 미색 종이에 인쇄를 맡기고

색지로 표시를 하고 포스트잇에 질문들을 꼼꼼히 적어서

파일본은 메일로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첨부하여 보냈고

하드카피는 늘 이고 지고 다녔다.


메일의 수신확인은 읽지 않음으로 남겨지는 경우가 많았고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종종 10분 전에 취소되고 기약 없이 미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아쉬운 건 내 쪽이었으므로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다.

늘 준비된 상태로 기다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화가 난다기보다 무기력했다. 

자꾸만 눈치를 보게 되었다. 


가뭄에 콩 나듯 그런 자리가 마련된다고 할지라도

'응, 이거 아니야'라는 피드백이 전부였다.  

과연 보긴 한 건지 궁금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동기들끼리 모이면 학업적인 토론을 하기보다 누군가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때는 그 상황이 특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취업을 준비하고 입사를 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는 물론

연예 상황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인간세상에서 아주 흔하디 흔한 

소위 '갑을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을이 겪는 증상으로는 우울감, 식욕저하, 불면 등의 우울증상과 

호흡곤란이나 심계항진, 몸 전체의 통증 또는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느낌의 신체 증상이 동반된다. 

(출처: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중 "화병"에 대한 설명)


갑을상황을 처음 배운 곳이 사제지간이 살아있는 학교라는 점이 아이러니했지만,

개인적인 문제라기 보단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윗기수부터 내려오던 소문들은 똑같이 재현되었고

각기 다른 학교를 다니는 대학원생들이 공통적인 증상을 호소한 것이리리라.

 

동기 중 한 명은 일주일에 하루 상담을 시작했고 약을 처방받았다.

또 다른 한 명은 한 학기 늦추기로 마음을 먹으니 일단은 편하다고 좋아했다.


나는 상담실을 열 용기도, 늦출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요가원"을 검색했다.


그렇게 8년 만에 다시 요가를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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