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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역사로서 근대화

서평: <The Great American Mission>

by 무순 Mar 19. 2025

이 글은 아래 책에 대한 서평이다

: David Ekbladh. (2011). The Great American Mission: Modernization and the Construction of an American World Ord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     


철 지난 이데올로기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윤석열의 지난 12‧3 계엄은 이 같은 갈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 뉴라이트 인사의 독립기념관장 취임 및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취임 등 최근의 논쟁적 사건들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계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을지라도) 이미 극우 이데올로기의 상승 조류를 쉽게 체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뉴라이트적 역사 인식을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뉴라이트 사상의 중심에 ‘근대’를 놓으면, 어떤 논리적 일관성이 생기는 듯 보인다(그것이 옳은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요컨대, 뉴라이트들은 근대(화)를 모든 사유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식민 지배, 독재와 억압, 수탈과 착취와 같은 다른 가치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근대화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부차적 가치로 전락시킨다. 


 예를 들어, 한 보수당 국회의원의 발언은 이 같은 근대()중심 사고를 잘 드러낸다. 이 국회의원은 보수 성향 문화예술인 단체 ‘문화자유행동’의 창립 행사에 참석해, “한국의 좌파는 반근대화세력이고 이들의 성격은 전근대적 집단주의, 즉 종족주의”이며, “세종과 이순신을 위대한 조상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는 근대국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자일 수 있냐”라고 발언하였다.1) 그의 발언에서 우파, 근대, 자유민주주의는 분명하게 동일시된다. 이렇듯 근대는 극우적 사유의 중심에 견고히 자리 잡은 듯 보인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동안 근대화란 주제 자체가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소위 한강의 기적 앞에서 근대는 언제나 맹목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목표였을 뿐 근대화 그 자체의 정당화를 누구라도 요구한 적 있었던가? 근대화의 문제에 목격할 때조차 우리는 지체된 정신의 근대화를 탓하지는 않았던가? 근대화의 선봉대들이 다시 전투에 나서기 시작한 지금 그들의 세계관을 해부하기 위한 정신적 설계도가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2.     


Great American Mission(이하 Mission)은 소위 자유주의적 근대화/개발의 역사를 다룬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20세기 동안 미국이 이데올로기적 라이벌들에 맞서 어떻게 근대화를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당연히 미국인 행위자들을 주로 추적한다. 그러나 20세기 동안 미국인 행위자들은 전 세계를 누비며, 자신(미국)의 이미지대로 세계를 주조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Mission이 미국 행위자들에 주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단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요컨대, 근대화는 단순히 미국이란 한 국가의 프로젝트였을 뿐 아니라 전 지구적 프로젝트였다. 말하자면, 근대화라는 개념은 20세기의 전 지구를 관통하는 하나의 지적 흐름이다. 그러나 관념은 단순히 실행되지 않는다. 관념은 이야기되고, 옮겨지고, 담겨야 한다. Mission은 그 번역의 과정을 추적한다.


 근대화가 일국적 프로젝트가 아닌 글로벌 프로젝트였다면, 국내/국제적 맥락을 구분하는 일은 큰 유용성이 없을 것이다. 행위자들은 언제나 국내/국제를 오가면서, 풍성한 대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개발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미국의 프로젝트를 정당화(또는 위협)할 뿐 아니라 새로운 근대화 공식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국사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중요한 지류가 된다. 


 개념, 생각, 구상들은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실제로 발 없이 세계 곳곳을 누릴 수는 없다. 주요 행위자들은 실제로 그 관념들을 전 세계로 옮긴다. 그러나 행위자 못지않게 관념들이 담긴 ‘대상’들도 중요하다. 교과서, 학교, 도서관, 주택, 도로, 특히 댐 등은 그 자체로 근대화 관념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고, 강화하고, 선전한다. 말하자면, 인공물(기술)은 이데올로기적이다. Mission은 특히 TVA(Tennessee Valley Authority)와 댐에 주목함으로써, 발 없는 근대화가 어떻게 전 세계를 누빌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역사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의 ‘렌즈’를 통해 현실을 보고, 지각하고, 이해한다. 따라서 어떤 렌즈인가가 중요하다. 최근 들어, 국내/국제, 국가/민간, 관념/물질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렌즈가 그 어느 때보다 흐려지고 있다. Mission은 독자들에게 새로울 뿐 아니라 광범위한 지구적 망원경을 선물한다.    


      

3.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런 의미에서 Mission은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을 테지만, 나에게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라기보다 ‘자유주의적 개발’이란 주인공(행위자)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처럼 읽힌다. Mission은 자유주의적 개발의 탄생부터 몰락, 그리고 부활의 조짐까지 최소 100년에 걸친 개발의 일생을 서술한다. 


 개발/근대화의 서사시는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다. 특히 Mission은 필리핀의 ‘국가 건설’에서 개발의 출현을 목도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의 필리핀 ‘국가 건설’은 물질적 번영을 강조하는 기술 지향 프로젝트였다. 둘째, 기술적 변화는 필리핀 전(全)사회의 변형을 요구한다고 가정되었다. 셋째, 민간 그룹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렇듯 필리핀의 재건은 (이후 식별될) 근대화의 핵심 요소들을 여럿 갖춘 듯 보였다. 그러나 재건이 근대화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 영양소는 아직 부족했다. 예를 들어, 사회 변형을 위한 사회과학적 아이디어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냉전 시대와 같은 안보적 명령(imperative)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대외원조를 위한 상설 기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첫 번째 요소는 20세기 초에 등장 중이었고, 그들은 곧 중국으로 향했다.


 록펠러, 카네기와 같은 많은 재단이 전간기 동안 설립되었다. 사회과학에 영감을 받은 이들은 그 이론들을 실험할 장소로서 중국을 선택하였다. 미국 정부의 정권 교체로 대외원조의 기조가 흔들릴 때조차 민간단체들은 변함없이 기존 개념들을 밀어붙였다. Mission은 어떻게 중국의 문제들이 ‘저개발’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었는지 보여주며, 또한 필리핀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에서 나타난 요소들이 어떻게 중국에까지 이어졌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온갖 희망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의 화마는 그토록 큰 기대를 단숨에 휩쓸었다.


 수많은 프로그램이 중국에서 실행되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여전히 결핍에 시달렸다. 그들은 수많은 프로그램의 잡탕을 하나의 통합 프로젝트로 포괄하고 싶어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놀랍게도 고향, 특히 미국 남부에서 그 모델을 발견한다. 그 모델이란 바로 자유주의 개발의 페르소나 TVA였다. 


 당대 자유주의자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 같은 라이벌 이데올로기들은 그들만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듯 보였고, 반면 자유주의는 대공황의 여파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유주의는 비효율을 낳는 듯 보였고, 권위주의적 체제의 (대규모) 계획은 그 비효율을 능숙하게 관리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자유주의자들에게도 계획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에게 계획은 또 다른 의혹을 불러왔다. 요컨대, 계획은 결국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자유주의자들은 계획과 자유주의의 양립 가능성을 긴급하게 찾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미국 남부의 실험, 즉 TVA에 주목했다. TVA는 성공적인 계획 개발처럼 보였지만, 무엇보다 새롭지 않았다. TVA는 필리핀과 중국 같은 전(前)근대적 사회의 개발에서 가정된 전제들과 동일한 토대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TVA는 한 가지 측면에서 크게 달랐다. 요컨대, TVA는 “풀뿌리(grassroot)”를 강조했다. TVA의 풀뿌리 민주주의적 관념은 어떻게 자유주의적 개발이 전근대 사회를 ‘자유주의적 근대’로 이끌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여겨졌다. TVA는 자유주의적 개발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Mission은 자유주의적 개발의 쉬운 상징이 되어 전 세계를 누빈 TVA의 여행담을 읽어준다.


 TVA와 함께 마침내 자유주의적 개발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과의 대결에서 자유주의적 근대화라는 무기로 대항했고, 그 모범은 TVA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새로운 냉전의 시작은 여전히 근대화를 이데올로기적 무기, 전략 또는 명령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 트루먼은 새로운 “포인트 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많은 역사가는 포인트 포를 자유주의적 근대화의 기원으로 내세웠지만, 그럼에도 포인트 포는 지금까지 이야기된 핵심 가정들을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규모의 측면에서 포인트 포는 달랐다. “포인트 포”를 통해 마침내 상설 원조 기구가 탄생하였고, 미국 원조 정책의 새로운 공식을 만들었다.


 자유주의적 개발 또는 이제 근대화라 불리게 된 프로젝트는 드디어 성인이 되었지만, 사회 초년생의 티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아시아를 비롯한 소위 제3세계의 부흥은 사회를 완전히 변형하는 근대화 또는 개발 프로젝트로 여겨졌다(유럽의 원조는 단순히 기존 역량의 복원으로 여겨졌다). 그중에서도 전후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무대는 동아시아, 특히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곧 공산당에 함락되었고, 무대는 이제 대만과 남한으로 옮겨진다. 근대화는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Mission은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남한의 근대화가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경제권에 남한을 연결하고 싶어 했지만, 그러한 지향은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수용되기 어려웠다. 미국에 가장 곤혹스러운 사실은 남한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단순히 남한의 일이 아니라 미국이 선전하는 자유주의적 개발 그 자체의 정당성을 위협한다는 사실이었다. 끊임없는 투자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근대화는 계속해서 저점을 맴돌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젠하워와 공화당 정부의 출현은 미국 원조 정책에 위기를 불러왔다. 공화당 정부는 남한과 같은 끝이 없는 원조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Mission이 말하듯이, 아이젠하워는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그 늪에서 발을 뺀다면, 그것은 소련과의 근대화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개발 원조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봉쇄하기 위한 결정적 전장이었다. 그렇지만 Mission은 또 다른 행위자, 즉 민간 행위자들에 집중한다. 그들은 정부의 원조 정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이를 위해 자유주의적 근대화를 더욱 세련되게 정교화해야 했다. Mission은 근대화론이 바로 이 과정에서 탄생하였으며, 그 요소들은 이미 과거로부터 전조되었음을 보여준다.


 개발/근대화의 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남한의 경제성장은 자유주의적 근대화에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자유주의자들은 소위 개발도상국에서 미국식 모델이 성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증명과 새로운 공식을 발견했다. 즉, “풀뿌리”라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정권이 제3세계의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새로운 공식화가 이뤄졌다. 물론 이 같은 공식화를 뒷받침한 것은 소위 개발된 국가와 개발도상국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편협한 정당화였다.


 마침내 자유주의적 근대화는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 새로운 공식은 베트남전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테네시강에서 이룬 일들을 메콩강에서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개발의 명령은 이전과 같았고, 그 요소들도 동일했다. Mission은 베트남전의 광폭한 유혈 투쟁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부터 개발이 핵심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미국은 패배했고, 더불어 근대화의 몰락도 시작되었다.


 Mission이 지적하듯, 베트남전의 대실패가 근대화 정책에 치명적인 공격을 입혔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60년대 이후 개발과 환경의 부정적 관계에 관한 증거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적 근대화는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존슨 행정부의 국방장관으로서 베트남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전향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개발이 의심받기 시작한 시대에 UN, 특히 맥나마라가 신임 총재로 부임한 세계은행은 핵심적인 원조 기구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위기를 맞이한 개발은 살아남기 위해 그 모습을 바꿔야 했다. 새로운 개발은 이제 ‘지속가능한’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모호한 국가적 성장(즉, 양적 지표)이 아닌 절대적 빈곤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개발과 근대화는 이제 분리되기 시작했고, 자유주의적 개발은 지속가능한 개발로 그 모습을 탈바꿈하였다. 자유주의적 개발 또는 근대화는 이렇게 모습을 감추는 듯했지만, Mission은 9‧11 이후 근대화의 망령이 그 육신을 되찾고 있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전쟁(테러와의 전쟁) 속에서 개발은 또다시 임무를 부여받았다.          



4.     


근대화는 일종의 정치적 프로젝트이다.2) 요컨대, 이데올로기를 담지한다. 물론 정치적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근대화/개발의 지향점이 반드시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얼마나 자주 근대화/개발 그 자체에 질문을 던져보았을까? 그동안 우리는 지나치게 자주 근대화/개발을 필연적 목적으로 여겨오지는 않았나?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근대화를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는 선험적 영역에 숨겨 왔던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그 정치적 속성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그것들을 다시 정당한 질문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Mission은 그 시작점을 제공한다.


 Mission은 근대화라는 정치 프로젝트를 국내외로 전파하기 위해 애쓴 수많은 행위자와 집단을 보여준다. 이 같은 논의는 물론 흥미롭지만, 오히려 나는 수많은 인공물에 주목하게 된다. Mission에서도 자주 언급되듯, 수많은 기술 인공물의 스펙터클은 사람들을 어떻게 매료시켰을까? 그리고 어떻게 개발의 관념 그 자체를 정당화시켰을까? 무엇보다 그 인공물들은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을까? 예를 들어, TVA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인공물은 때때로 인간 행위자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관념을 전파하는 통로가 된다. Mission도 물론 그러한 통로에 주목하지만, 그 내부를 상세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또한 Mission은 국내/국제의 경계가 실제로 매우 모호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계 저 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국내 담론에 영향을 미치며, 국내 담론이 다시 세계 저 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Mission은 한국의 근대화가 결코 세계사적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물론 미국사도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국내외의 구분이란 자의적이고 인공적인 경계일 뿐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강대국의 영향력이 약소국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투박한 논리가 아니라 반대로 약소국이 강대국의 운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지류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듯, 수많은 역사(더 정확하게는 수많은 행위자)이 하나의 거대한 역사를 형성한다.


 물론 Mission은 미국을 중심으로, 그리고 미국인 행위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며, 따라서 수혜국 행위자들의 구체성은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물론 Mission은 이들을 단순히 수동적인 행위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화의 역사적 세밀화를 원하는 이들에게 Mission은 지나치게 투박한 스케치만을 제공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Mission은 자유주의적 개발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동아줄로 전 세계의 TVA을 하나로 묶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TVA이 정말로 동일한 혈통을 보유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된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 촌수는 얼마나 가까운가? 요컨대, 그토록 많은 아카이브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Mission은 굵직한 윤곽선만을 그릴 뿐 너무 많은 여백을 독자에게 남겨둔다. 그러나 한 명의 저자에게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바라겠는가? 적어도, Mission은 불 꺼진 통로에서 우리가 출구를 찾을 수 있도록 깜빡이는 비상등을 이곳저곳에 설치해 두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충분히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과거일 뿐 아니라 현재를 밝히는 역사이다. 저자의 의도가 어떠했든, 나는 21세기 한국의 독자로서 이 책을 읽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일지라도 Mission은 우리의 시공간에서 어떤 걸림돌도 없이 부드럽게 읽힌다. 아마도 개발/근대화란 저거너트(Juggernaut)가 우리 사회에서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수레를 멈춰야 하는가, 아니면 늦춰야 하는가? 혹은 더욱 가속해야 하는가? 선택과 결정은 어렵지만, 그 설계를 알지 못한다면, 애초에 개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40여 년 만에 계엄령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2024년을 마무리한 대한민국은 이제 전 국민적 갈등으로 2025년을 시작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내전의 선봉에 선 극렬 보수층은 어리둥절하게도 (그리고 Mission의 독자들에게는 놀랍지 않게도) 태극기뿐만 아니라 성조기를 힘차게 흔들며 자유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이 기이한 혼잡 속에서 Mission은 미국과 남한, 과거와 현재,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자유주의와 근대화의 이음새 없는 연결망을 보여준다. Mission은 단지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역사이다.



1) MBC 뉴스, “'이순신·세종' 광화문 동상까지 비판‥김기현 축사한 '문화우파' 행사”, 2023-09-13.

2) 필립 맥마이클. (2013). 거대한 역설: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 조효제 옮김.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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