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해바다

by 류재준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서 해맞이 명소를 찾아다닌다. 365일 똑같은 해가 뜨고 지고를 반복하지만, 사람들은 첫날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새해 첫날은 힘겨운 과거와 결별하고 희망 가득한 미래를 맞이하는 상징적인 날이기 때문이다. 나도 무등산이나 여수 향일암 같은 곳을 찾아가 새해 소원을 빌곤 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이런저런 고민거리가 생기면, 나는 가끔 집 근처 무각사 옆 오월루에 올라가서 일출을 맞이한다. 새벽 어둠을 걷어내고 밝게 빛을 뿌리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거운 마음속 한결 가벼워진다. 짙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빛은 삶의 에너지이다.


젊어서는 동해 일출을 보고, 나이 들면 서해 일몰을 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는 동해 일출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진취적인 기상을 얻고, 중년과 노인은 서해의 지는 해를 보며 옛일을 그리워하고 정리하라는 뜻이렷다. 좀 투박하기는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우주 질서를 인생에 빗댄 금언이니 새겨듣고 볼 일이다. 말이 나왔으니, 나이가 들수록 일몰과 석양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사는 아파트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산자락으로 노을이 걸릴 때마다 나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힌다. 가끔 해 질 녘 시골집 가는 길에 서산으로 기우는 해와 정면으로 마주할 때가 있다. 하루의 마지막 불꽃을 내뿜어 대기를 붉게 물들이는 해는 사뭇 장렬하고 압도적이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으로 사물을 감싼다. 완숙한 기품과 절제의 미덕을 갖춘 절대자 앞에서 나는 기꺼이 몸과 마음을 낮춘다.


나는 사실 젊은 시절에 동해바다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처음으로 동해바다를 본 건 2013년 3월 초쯤이었다. 그때 어린 아들과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았다. 강원도는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새벽 찬바람이 살을 후벼팠지만, 동해바다에 떠오르던 태양은 벅찬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감정에 북받치고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되었다. 붉은빛이 하늘과 땅을 이글이글 달구고, 바다는 생명이 탄생하기 전 원시의 불덩이처럼 불타올랐다. 거대한 파도가 엄청나게 울부짖으며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이 거침없이 밀려왔다. 물러났다가 밀려오는 거친 파도는 티끌만 한 중년의 지나온 어지러운 발자취와 감정의 편린을 대번에 씻어주었다. 내가 이 장관을 왜 이제야 마주했을까.


일상에 지쳐가고 희망이 희미해질 때면 동해바다가 새삼 그리웠다. 답답한 빌딩숲에 갇혀 답답해질 때면 맥동하던 일출이 생각났다. 직장생활의 고단함과 매너리즘은 습관처럼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새로이 다잡고 견디어 보지만 며칠을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고 결국은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온다.


나는 떠나기로 했다. 거기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광주공항에서 강원도 양양국제공항까지 가는 비행기편이 생겼다. 자동차로 간다면 6시간 이상 걸리겠지만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9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대부분 티켓이 예약된 터라, 일정을 앞당겨서 겨우 예약할 수 있었다.


토요일 아침 8시30분에 광주공항을 출발하여 9시 40분쯤 양양공항에 도착했다. 2002년에 개항된 양양국제공항은 거대한 산 아래에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행히 날씨는 흐리지 않고 적당하게 맑은 편이었다. 나는 공항을 빠져나와 곧장 주문진항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리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해변에 도착하니 동해바다가 드넓은 품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파도가 잔잔했다. 가슴이 뻥 뚫리고 머리가 상쾌해졌다.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해변을 산책했다. 갈매기 몇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면서 끼익끼익 울었다. 근처 횟집에 들러서 늦은 점심을 먹은 다음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면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바라보는 그 바다가 내 근심걱정을 고스란히 안아주는 듯 넓은 아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느릿느릿 묵호항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문진항보다 관광객들이 많았다. 잘 꾸며진 관광지 같은 느낌이었다. 묵호항 뒤편 언덕에 세워진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에 오르니 투명유리로 만들어진 산책로가 반겨주었다. 발아래 까마득히 보이는 바다 풍광이 아찔하면서도 묘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래로 내려와 해변을 따라 설치된 해랑전망대를 찬찬히 걸었다. 적당한 바람과 파도소리에 취한 나는 어느 순간 바다 위를 걷는 듯 무중력 상태에 빠졌다. 뭔가 고요하면서도 들뜬 기분! 다시 카페에 들러서 커피를 한 잔 마시는 동안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섬 해변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짐을 풀었다. 한섬해수욕장에는 캠핑족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고기를 굽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당신들도 도시의 장막을 가까스로 탈출했을 테니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시라. 다만 오늘 그대들 축제의 잔존물을 깨끗이 치워주기를……. 어둠을 몰고 오는 바람이 조금 드세지면서 포말이 근사하게 반짝였다. 이런 황홀경이라니! 넋을 놓고 모래밭을 걷던 나는 문득 물컹거리는 발바닥 감촉에 기겁했다. 파도에 밀려온 해초가 모래밭에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해초 썩은 냄새가 제법 비릿하게 나는 것도 같았다. 감흥이 확 깨지며 눈이 번쩍 뜨였다. 현실은 늘 꽃길만 펼쳐지는 게 아니다.


모래밭에서 얼른 빠져나와 주변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드문드문 가로등만 희미하고 한적해서 걷기에 좋았다. 산책로 일부 구간은 군 철책선을 따라 이어졌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날카롭고 차가운 쇠그물 덕분에 나는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고 추암해변에 다다랐다.


추암해변은 동해에서도 맑은 물빛과 멋진 해변 풍광으로 이름난 명소이다. 텔레비전 시작과 끝을 알리는 애국가의 해돋이 장면이 바로 추암해변 촛대바위를 배경으로 찍은 영상이다. 촛대바위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이른바 관광명소에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진을 찍고 시끌벅적 떠드는 이유를 통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왜 그러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그들은 대부분 꽃다운 청춘을 지나온 분들이다. 젊은 시절에는 혼자 여행해도 멋지게 빛나지만, 나이가 들면 어지간히 몰려다니지 않으면 왠지 쓸쓸해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짐짓 더 큰 소리로 떠들고 웃는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왁자지껄 몰려다니는 관광객을 만나거든 잠깐 시간을 내어 사진기사를 자청해주시라.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촛대바위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 역시나 쓸쓸하고 청승맞아 보였다. 나는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해안가를 걸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5시 30분쯤 바닷가로 나갔다. 일출 시간은 6시 8분쯤. 그런데 날씨가 흐릿하고 바람이 거셌다. 아쉽지만 이런 날씨면 일출 보기는 글렀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다렸지만 끝내 먹구름에 가려서 해가 뜨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비는 내리고 바람은 불고, 숙소로 돌아갈까 하다가 멈추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 탓이었다. 일출이 아니고도 동해바다는 수많은 방법으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신발을 벗고 해안가로 밀려오는 파도와 술래잡기를 했다. 물장구를 치고 바닷물을 손으로 움켜쥐고 촉감을 느꼈다.


내 손을 빠져나간 바닷물은 저 멀리 태평양과 인도양까지 여행하다가, 또 어느 날에는 비가 되어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내가 밟은 모래는 더 잘게 깎이고 쪼개져 티끌로 남아 바다와 육지와 대기를 여행하다가, 어느 날에는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에 섞여 내 몸 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아찔할 만큼 위대한 자연의 흐름과 순환 앞에 나는 얼마나 작고 나약하고 부질없는 존재인가. 위대한 자연의 섭리로 빚어진 나는 또 얼마나 기특하고 아름다운 존재인가. 그러니 더더욱 이 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강아지처럼 어린아이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날이 밝아질수록 해안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을 거다. 얼른 숙소로 돌아왔다. 1박 2일 동해바다 여행은 이것으로 끝이다. 일기예보에서 태풍이 경상도 쪽으로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문득 태풍이 강원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비행기가 뜨지 못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가 얼른 지웠다. 강원도민들의 거센 비판을 받을 망상이다.


다시 돌아온 광주는 동해바다와 달리 무더운 한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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