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주변의 사사로운 것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로 크나큰 축복이고, 지나온 날의 아픔과 슬픔도 지금의 나를 이루는 한 조각임을 깨닫는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삶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예사롭지 않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기적의 연속이다. 때로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고민하면서 살아도 의미 있는 여정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급히 도움을 청해왔다. 시골집 낡은 시멘트벽과 쓰러진 벽돌담을 허물고 새로이 돌담을 쌓으려는데 일손이 필요하단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지인이 일판을 벌인 이유가 충분히 수긍이 갔다. 시골 골목길에는 우악스럽고 거무튀튀한 시멘트벽보다는 돌담이 제격이다. 하지만 세상사 마음먹은 대로 술술 풀리지 않는 법이다. 일판이 생각보다 커지고 품이 많이 들어갈 듯 보였다. 난감하고 미안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지인을 다독이며 호기롭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일단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쓸 만한 돌을 골라 가져와야 했다. 처음에는 매끄럽고 반듯한 돌을 찾아다녔다. 그래야 돌담을 멋지게 쌓아올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름다운 돌들은 보기에만 근사하지, 정작 돌을 쌓아 올려보니 아무리 반듯한 돌도 포개는 순간 틈새가 벌어졌다. 초보자가 쌓다보니 솜씨도 엉망인 터라 돌담은 삐뚤빼뚤 볼품없어졌다. 돌담을 제대로 쌓으려면 평범하고 못생기고 삐뚤어진 돌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다시 오랜 시간 발품을 들여 산과 들을 헤맸다. 차츰 마음에 드는 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돌을 화물차 짐칸에 실어 나르고 돌을 하나하나 골라서 쌓아가다 보니 허리 어깨 손목이 뻑적지근 쑤셨다. 하지만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돌담을 보는 즐거움이 고단함을 훌쩍 넘어섰다. 각양각색 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돌담은 비로소 튼튼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제 모습을 갖춘다. 반듯한 돌들이 제자리를 못 찾고 있다면, 못난 돌을 위아래로 살짝 끼워주면 금방 가지런히 보기 좋은 돌담이 만들어진다. 비록 보잘것없고 하찮은 돌이라도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쓰임새가 있고, 각자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비올라, 오보에, 플루트, 피콜로, 바순,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 트롬본, 트럼펫, 호른, 튜바, 트라이앵글, 탬버린, 벨, 하모니카, 팀파니는 저마다 내는 소리가 다르다. 이 악기는 지휘자의 손짓에 맞춰 화음을 쌓아올린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특정 악기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서로를 위해, 서로가 믿고 도와줘야 비로소 연주가 완성된다. 어떤 악기가 스스로 돋보이려고 툭 뛰어나오는 순간 화음은 엉망이 된다.
악보에 따라 연주 내내 겨우 한두 번 소리를 내고 무대를 내려오는 악기도 있다. 그렇다고 서운해하거나 실망할 필요 없다. 그 소박한 소리가 모여야 음악이 완성된다. 악보에 따라 특정 악기가 독주하는 경우도 있다. 독주는 악기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는다. 악기가 독주를 시작하면 다른 악기들은 움직임을 멈춘다. 나머지 악기들의 침묵을 배경으로, 독주는 황홀한 빛을 흩뿌린다. 오케스트라에서 악기의 침묵은 연주의 연장이다.
유능한 작곡가는 악기의 쓰임새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라는 영화가 있다. 이른바 서부시대가 저물어가던 시기, 아버지를 죽인 악당에게 복수하려는 총잡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이다. 이 작품은 최고의 서부극 10위. 최고의 영화 50위에 들어가는 웨스턴 무비 역사의 백미다. 영화도 인상 깊지만, 주인공이 등장할 때 울려퍼지던 하모니카 독주 음악 <Man with a Harmonica>이 전해주는 전율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작곡자 엔니오 모리꼬네는 평소 가볍고 경쾌한 소리를 내는 악기로 여겨지던 하모니카를 투박하고 야성적인 악기로 변모시켰다. 고독한 총잡이 주인공의 등장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아무리 조연급으로 취급받던 악기라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멋진 쓰임새를 갖는다.
그러니 하찮은 존재감으로 오늘도 하루를 버티고 있는 우리 모두여, 기뻐하자. 비록 현재가 암담하고 절망스럽다고 해도 즐거이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