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못 버리는 친구가 있다. 지인이 키우던 고슴도치에서 빠진 가시도 소중히 간직한다. 화재경보기가 울렸을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돈도, 핸드폰도 아닌 인형들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물 받은 꼬질꼬질한 곰 인형이 다른 아이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3년간 슬퍼했다. 다 먹은 쿠키 통은 생일 때 받은 편지, 친구들과 찍은 필름 사진들로 가득하고 책장은 건축, 역사, 소설, 과학, 동화책 등 온갖 책들로 포화상태다. 심지어 신발장까지 종이 에게 양보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교 졸업작품을 만들 때까지 그렸던 스케치들이 빼곡히 차 있다. 책상 위에는 만년필과 잉크, 펜촉, 파스텔, 붓펜 등을 색깔별로 갖춰놓았다. 침대맡에는 이글즈, 존덴버, 드림시어터, 쳇 베이커, 비틀즈, 콜드플레이 등 장르 불문의 LP와 카세트테이프가 전시되어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버릴 수 없어 혼잡스럽지만, 물건들 나름대로 자리를 찾아 발붙이고 있다.
이런 친구가 이사 간다. 그것도 독일로. 건축을 사랑하고 물건을 소중히 대하는 친구가 택한 독일행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독일은 통일 이후 문화재 보호 사업을 활발히 진행했는데, 동독 지역에 붕괴 위험에 처한 유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1442년 건축된 베를린 성은 1702년 바로크 양식으로 확장되었다. 1881년부터 독일 제국의 황궁으로 쓰이고 1차 세계대전 이후 황궁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고, 대중을 위한 공연도 열렸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폭격으로 훼손됐으나 기본 골격은 완전했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에서 철거 결정을 내린 후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이 들어섰다. 1973년, 같은 자리에 현대적 양식의 공화국궁전을 건축했으나 통일 후 다량의 석면이 검출되어 철거했다.
베를린 성 복원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바로크 건물의 미학적 가치, 지역 및 민족의 정체성, 문화적 전통 등을 고려해 복원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결정됐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수백 년 전 지어진 건물을 복원한다는 이유로 그 당시 기술에만 집착하는 것은 멍청한 생각 아닌가요?” 복원 작업을 총괄하는 훔볼트포럼의 말이다. 공청회 과정에서 과거 기술과 자재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10여 년에 걸친 논의 끝에 21세기에 맞는 방식으로 복원하기로 했다.
친구는 헤진 인형들에게 새 천을 덧대어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오래된 건물도 부수지 않고 고쳐 쓸 방법을 배우러 독일로 간다. 치워도 치워도 나타나는 물건들은 죽여도 죽여도 살아나는 바퀴벌레 같았다. 이민 가방과 캐리어 하나에 모든 것을 담기엔 귀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짐 싸는 것을 도와주다 ‘유학이고 뭐고 못 해 먹겠다! 다 때려치워!’라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싸워도 고쳐 쓰던 우리의 애정 어린 지난날들이 생각나 꾹 참는 하루다.
베를린 성 관련 정보 출처
https://library.fes.de/pdf-files/bueros/seoul/12653.pdf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18/20131218002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