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0일부터 8.3일까지 보름 동안 남해군 일기입니다.
7.20.(토) 맑음
칠월 장마 끝자락, 세 식구는 남해로 향했다. 지난 12월 준비해 둔 반년의 기다림. 여느 여행처럼 역시나 설렌 마음에 새벽잠을 설쳤다. 다섯 시 반 비몽사몽 덜 깬 채 밖을 바라봤다. 이번 주 내내 흐린 날씨는 어제 잠깐 맑더니 오늘과 내일 폭우가 예보되었다. 아파트 텃밭으로 가 고추와 수박 덩굴 위에 지지대 심고 비 가림을 덮어 당분간 못할 돌봄을 미리 했다. 집에 돌아오니 벌써 일어난 아내가 아이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부초밥과 커피, 어제 따 둔 호박, 깻잎 등 채소를 다 꾸렸을 즈음 아이 곁으로 가 얼굴을 쓰다듬었다. 수동 알람인 셈. 곧 일어난 아이와 금방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암사동 다른 텃밭에는 가을 당근 씨앗을 심어두었다. ‘후’ 작은 입김에도 날아갈 정도로 얇고 가벼운 탓에 한바탕 폭우에 휩쓸릴까 걱정되어 부직포를 덮었다. 아내는 여행 출발하는 아침까지 작물에 정신 팔린 나를 절레절레 머리 흔들며 바라보았다. 다만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는 눈치.
※ 사 년 차 도시농부 텃밭은 집 근처 세 군데를 하고 있었다. 합하면 여덟 평가량으로 작지만 모두 떨어져 있다.
고속도로에 올라서 한 시간, 안성을 지나자 간간이 내리던 비가 굵어졌다. 청주에서 무주 지경까지는 폭우로 바뀌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 일기가 변한 건지, 지형에 따라 다른 기후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래로 갈수록 맑아지는 건 분명했다. 산청 휴게소에 이르러 잦아들더니 멀리 보이는 남쪽 하늘 끝자락은 흰 구름 사이 파란빛이었다.
남해군은 두 개 큰 섬과 작은 유인도 셋, 일흔여섯 개 무인도로 이루어졌다. 경남 하동군에 연결된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는 가장 큰 남해도, 삼천포에 붙은 창선삼천포대교는 다음으로 큰 창선도로 이어진다. 창선도는 남해도의 1/5 수준.(삼천포에서 들어갈 때 징검다리를 이루는 초양도, 늑도 두 섬은 남해군이 아닌 삼천포와 함께 사천시를 이룬다.) 그렇게 육지와 이어진 여러 다리 덕에 뭍이 된 남해는 호둣속 닮은 모습으로 긴 해안선에 바다를 감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육칠백 미터 내외 낮은 산이나 대개 섬 산들이 그렇듯 짧은 구간 경사가 가팔라 오르기 만만치 않다.
남해에서 가장 큰 마을 남해읍을 지나 번듯한 이차로는 넓은 외길 차로로 줄어들었다. 오르락내리락 리아스식 해안을 한참 지나 십여 년 전 아내와 처음 간 다랭이 마을에 이르렀다.
지난 시간만큼 그때와 사뭇 달랐다. 많이 줄어든 논은 더 이상 삶을 유지하기 위한 경작 목적이 아닌 듯했고 일부는 밭이 되었다. 작은 촌락은 수십 채 빽빽한 해안가 마을로 커져 많은 수가 민박과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뒷산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수직에 가까운 시냇물은 여전했다. 맑고 세찬 물줄기는 곁에 따라 난 산책로 가까이 흘러 한여름 더위를 덜어 주었다. 마을 안쪽 길을 따라 들어가니 가장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여느 시골 마을마다 하나씩은 간직한 전설 품은 암수 바위 앞으로 파란 남해바다가 마주했다.
마을에는 축대가 많았다. 삼사십 평 단위 켜켜이 쌓아 올려진 계단모양 논을 앞에 두고 안반데기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작은 도구와 인력만으로 세대를 거쳐 좁은 경사면을 조금씩 넓혀갔다. 물론 이제는 사진과 기억으로만 남았으나 자취는 농부들의 집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다만 조금만 큰비가 오면 땅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이 쓸려나갈 듯한 비좁은 땅, 물과 다른 필요한 것은 어떻게든 채워놓는다지만 부족한 흙은 어떻게 할까? 오랜 장마에 파인 농토를 보며 든 생각이었다.
돌아오는 가파른 오르막길, 아이는 저만치 뒤 쳐졌고, 목이 말랐던 아내는 한참 앞으로 갔다. 언덕 위 가게에서 물 한 병을 사 나눠 먹으며 쉬는 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얼굴에서 비가 내려.” 좀체 땀 흘리지 않는 사람에게도 여간 버티기 힘든 날, 먹구름과 강한 햇살이 번갈아 점령한 하늘 때문에 유달리 무더웠다. 참 살기 어려운 땅이다.
한적한 바닷가 구불구불한 길 운전을 아내에게 맡겼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을 때 옆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저 아래 남해바다에 비친 윤슬이었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은 윗세오름을 내려와 한가로이 저녁 먹던 제주에 이어 두 번째였다. 진한 회색, 습기 가득한 먹구름 낀 하늘은 바다를 만나 경계가 불분명했다. 경험 많은 화가가 한두 번 부드럽게 붓질한 것마냥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뒤이어 나온 구름 사이를 통해 바다로 내리쬔 햇볕과 함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