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디자인' 두 단어를 생각하면 어떤 단어가 생각이 날까? 중고등학교 때 배운 미술 교과서? 지난주에 봤던 DDP 전시회? 내가 보기엔 미술과 디자인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거 같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 핸드폰, 눈앞에 있는 옷장, 옷장 속에 있는 옷들, 그리고 볼펜. 이 모든 것들이 모두 미술이고 디자인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모든 물건을 살 때 고려하는 1순위에 해당하고 심지어 디자인만을 보고 물건을 사기도 한다. 근데 막상 이걸 공부하려고 하면 뭐부터 시작해야 하지?
20대 초반, 공대에 다니던 나는 갑자기 미술과 디자인 공부하고 싶었다. 갑자기 미술과 디자인이 하고 싶었던 이유는 뭘까? 어릴 때부터 무식하게 공부만 해오던 삶에 지첬던 걸까?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2016년도에 연재한 '정썸머' 작가님의 '에스키스'라는 다음 웹툰에서 나온 문구가 하나 있다. '차가운데도 그 물속에서 놀고 싶다면 감수하고 거기서 놀면 되는 거야.' 나는 '에스키스' 주인공인 '정시인'과 '한소라'처럼 차가운 물속에서 놀고 싶었다.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주변에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고 말하는 것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창피하고 두려웠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부족하고 놀림거리가 되지 않을까? 나중에 내가 한 작업물을 보고 평가하고 나를 내려다보지 않을까? 이러한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겁부터 났다. 수많은 시간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뭐든 하려면 몸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부딪쳐 봐야지. 그런데 내가 빠진 착각은 말 그대로 정말 착각일 뿐, 나의 물음에 돌아온 건 진지한 조언과 응원이었다.
건축, 디자인,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건축을 하는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 좀 잘할 것 같아. 내가 과제하다가 너한테 가끔 물어보잖아. 근데 그때마다 니가 말하는 아이디어가 꽤 괜찮거든. 한 번 해봐."
그리고 디자인하는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면 되지 못할게 뭐가 있어. 디자인은 비전공자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굳이 전공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림도 잘 못 그려도 디자인할 수 있어. 그림은 너보다 내가 더 못 그릴걸?"
마지막으로 미술 하는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좋지! 근데 공부할 거면 디자인보다는 미술을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미술 전공한 사람이 디자인하는 사람은 많은데 디자인 전공이 미술 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고. 미술 공부를 하고 나면 나중에 디자인도 할 수 있으니까. 어때?"
조언은 모두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어 그 온기가 따뜻했다. 그 따뜻함은 차디 찬 세상의 온도를 조금 높여 주었고 나는 용기 내어 발을 담글 수 있었다.
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하며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나의 작업물을 '디자인'으로 나를 '디자이너'라고 표현해 주었을 때이다. 대학교 건축 봉사 동아리의 엽서를 디자인하고 제작하던 때, 특별한 목적은 없었고 연말 송년회에 엽서를 만들어 후배와 선배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 엽서는 총 4개의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하나는 동아리 로고, 2개는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팝아트를 이용해 만들었다. 대학생 동아리 치고 로고가 나름 매력이 있었다. 빨간 하트 안에 검은색으로 그려진 나뭇잎과 사람의 형상 그리고 동아리 이름인 알파벳 4개가 모여 봉사 동아리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히 표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엽서에 넣기에 아주 잘 어울렸고 클래식했다. 2개의 타이포그래피는 4개의 알파벳을 4:3 사이즈 엽서에 빈 공간 없이 배치하는 작업이었다. 개인적으로 타이포그래피를 굉장히 좋아한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글자가 주는 완벽한 비율, 색과 모양에 따라 느껴지는 색다른 느낌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어려운 작업이지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다면 거기에서 오는 성취감 또한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팝아트는 매력적이고 장난기 넘치는 작업이었다. 봉사로 시작했지만 술로 끝나는 유머스러움은 우리 동아리를 아주 잘 표현해 주었다. 봉사자의 마음을 담은 버스를 타고 떠난 봉사 현장과 그곳에서 흘리는 우리의 땀방울 그리고 마지막 친구들과 즐기는 술 한 잔을 사진과 그림을 적절히 섞어 재미있게 표현했다.
사건은 완성된 엽서 디자인을 업체에 생산하도록 맡길 때 발생했다. 엽서를 생산하기에 앞서 생산 일정과 결과물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업체 관계자에게 전화 한 통화가 왔다. 담당자는 나에게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
디자이너님, 요청하신 엽서 디자인을 프린트했을 때 색상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어요.
'디자이너', '디자인'. 두 단어는 내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차오르는 느낌을 주었다. 몇 개월 동안 작업했던 디자인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보상받은 것 같았다. 나에게 정말 큰 감동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두 단어는 앞으로 나가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있었다. 두 단어는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면 고개를 들어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 앞으로 평생 함께 할 거대한 내력을 얻었다.
미술과 디자인을 시작한 지 2년 후 나는 해오던 공부를 그만두었다. '정시인'처럼 얼음처럼 차디찬 물속에 아주 잠깐 발을 담갔지만 차가운 물은 나의 의지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고 또다시 겁먹은 나는 용기를 잃어버렸다. 얕아진 의지와 잃어버린 용기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후회를 남겼고 앞으로 평생 내 한편에 응어리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실패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일이다. 실패를 경험했고 후회를 남겼지만 2년 간의 경험과 기억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생각을 넓혀 주었다. 2년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더 많은 의지와 용기를 가졌다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