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회사 속에 어느 정도 녹아든 사람은 열정을 잃어 간다. 생애 첫 회사에 입사하고 패기롭던 신입과는 점점 멀어져 간다. 능력 있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모르는 척, 못하는 척, 내 일이 아니면 굳이 나서지 않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 간다. 우리는 열심히 하는 동료에게 오히려 되물어 본다. "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해요?" "조금 천천히 해요. 너무 열심히 하면 일만 많아지고 더 안 좋아요." 그리곤 항상 열심히 하는 동료를 이상한 사람인 마냥 처다 본다. 왜 일을 사서 할까? 굳이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다 상사가 일 하나 줄 때면 이런 생각과 함께 빤히 상사의 얼굴을 처다 본다. '제가 해요?'
대학 시절, 주변에서 워커 홀릭이라고 말할 정도로 난 학업뿐만 아니라 수많은 대외 활동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공 조별과제를 할 때면 모두를 업어 갔고 밤 12시가 다 되도록 술을 마셔도 새벽까지 전공책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대외활동으로 봉사동아리 회장과 해비타트 동아리 연합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에 따른 성적과 성취감이라는 보상이 확실히 돌아왔고 나에게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견고할 줄 알았던 나의 일상이, 열정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구와 탐구엔 전혀 흥미가 없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학원 원서를 쓰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연구실에 들어와 있었다. 들어간 연구실의 교수님은 때마침 연구년이셨고 연구실엔 그 흔한 석사 한 명 없이 나 혼자였다. 선배나 박사가 없다 보니 혼자 연구실을 새롭게 구성하고 과제를 따와야 했다. 앞으로 2년 간 고생길이 너무나 명확히 보였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되담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늘 그래 왔듯이 마음을 다잡고 열정으로 대학원 1학기를 시작했다.
2년간 생활한 연구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고 아주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기본적으로 출퇴근 시간은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였고 국책 연구과제뿐만 아니라 개인 연구까지 많을 때는 6가지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항상 아침 8시까지 연구실에 출근했고 논문과 연구를 쉼 없이 몰아치다 밤 10시가 다 되어 퇴근했다. 주말도 예외는 없었다. 연구실이나 집 근처 카페에서 논문과 연구는 계속됐다. 퇴근 후 매일 밤 알코올과 함께 했고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한 나머지 학교 운동장을 미친 듯이 달린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연구실에 찾아왔다.
나보다 2학기 선배로 현재 파트타임으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제약회사에서 일하며 대학원을 다녔지만 일을 그만두고 연구실에 들어오기 위해 왔다고 했다. 선배는 나와 아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선배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 출근하고 저녁 시간이 되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선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좀 대충 해. 어차피 졸업장은 다 똑같아." 물론 처음엔 선배의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나 자신의 평소 모습을 유지하고 스스로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함께 참여하는 과제에서 맡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저 시간만 때우려는 모습에 수 없이 부딧치고 싸우며 서로의 의견에 마찰을 빚었다. 난 이 선배가 과연 졸업은 할 수 있을지, 졸업 후에 석사라는 학위에 걸맞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역시 졸업시험, 졸업 논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졸업까지 남은 시간 동안 절대 졸업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배는 4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졸업해 버렸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르고 반대로 노력하지 않으면 보상 또한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배는 아무 문제없이 졸업을 했고 그 모습을 1년간 지켜보며 내 견고한 생각과 열정이 흔들렸다.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혼란은 나를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제 논문 수정을 다 끝내도 교수님께 확인받기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고 미루며 농땡이를 피웠다. 항상 집중하고 필기하며 듣던 대학원 수업도 그저 출석만 할 뿐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열심히 했다고 스스로 타협했다. 이 모습이 이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행동이 올바른 길일까? 조금은 무식하고 바보 같지만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 속이고 타협하지만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맞을까? 2년 간의 대학원을 마치고 지금은 제약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혼란스럽다.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능력으로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때면 여전히 주변에선 조용히 속삭인다. '열심히 하면 일만 많아진다.' '무능력해 보일 수 있지만 야근하는 것보단 낫다.' 속삭임은 나를 혼돈 속으로 밀어버린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혼돈 속에서 무한히 헤엄치다 빠져나오길 반복한다.
난 지금 두 갈래 길에 놓여 있다. 그리고 길은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그 선배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사회가 나를 이런 방향으로 밀어버린 걸까?" "넌 지금 뭐가 문제야?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니?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아니면 이 사회가 문제다.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 타협하고 현재에 안주하며 안락함 속에 살고 싶니?"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나 자신과 수 없이 부딧치고 싸워야 하겠지만 이 과정이 길의 이정표가 되어 날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 어떤 길을 가든 길의 끝자락엔 답을 찾을 것이다. 그 답이 무엇이든지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