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공포, 스릴러, 코믹, 로맨스 장르와 상관없이 모든 드라마, 영화와 같은 미디어에 빠짐없이 나오는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연애, 사랑이다. 전쟁 속에도 사랑은 피어난다는 말이 있듯이 미디어 속 배우들은 비현실적인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한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감정은 피어난다. 우리는 누군갈 좋아하고 사랑하며 때로는 갈등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거듭하며 나에게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연애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간다. 아마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절한 시기에 연애를 하고 이러한 경험과 과정을 통해 올바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물론 난 아니지만.
21살, 내가 처음 연애를 한 나이이다. 또래에 비해 조금은 늦은 시작이었지만 그 나이에 맞는 풋풋한 연애를 했다. 벚꽃은 모두 여름의 향기가 조금씩 올라오던 5월, 연애를 시작했다. 우린 서로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서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돈이 없던 대학생이기에 엄청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멀리 여행을 가진 못해도 재미있었다. 한강에서 돗자리를 펴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마시는 맥주 한 캔, 서로의 집 근처에서 보내는 시간, 늦은 밤 손을 잡고 거닐던 공원, 그것 만으로 충분했다.
과거의 연애와 지금의 연애는 많이 달랐다. 21살, 22살의 연애는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만났다.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만난 수많은 친구들 중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친구가 한 명씩 있었다. 흔히 드라마에서 말하는 머리 위에 종이 울린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끌림이 있었다. 끌림은 처음 본 순간부터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친구에게 갑자기 생기기도 했다. 끌림을 따라서 나의 행동과 말 그리고 상대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젔다. 그 사람 성격이 어떤지,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외모는 내 취향에 적절한지, 이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
지금의 연애는 20대와 아주 많이 다르다. 물론 여전히 이름 모를 끌림은 나에게 중요한 기준이다. 단지 끌림 외에 수많은 기준이 생겼을 뿐이다. 이제 나와 잘 맞는 사람, 성격, 선호하는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생겼다. 전공과 직업은 무엇인지, 가치관은 어떤지, 말하는 태도, 자세, 습관까지 아주 세세하고 많은 것들을 고려한다. 거기다 이 사람과 만나게 되면 어떤 연애를 하고 그 과정이 즐거울지, 갈등이 많아 험난할지 어느 정도 예상해 버린다. 내가 섣불리 해버린 예상은 내 눈을 가려버린다. 만나서 가질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 보단 겪게 될 고통과 감정 소비를 더 생각하고 걱정하며 만남을 주저한다.
다른 사람들은 연애를 어떻게 할까? 다들 하는 연애인데 왜 난 아직 못하고 있을까?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노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음.. 그 부분에 있어선 충분히 인정한다. 난 연애를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해 동호회 활동을 하거나 소개팅을 하기 위해 애걸복걸하지 않는다. 변명일 수 있겠지만 연애를 목적으로 동호회에 참여하는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고, 소개팅을 요구하고 구걸하는 것이 친구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했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난 지금 연애를 얼마나 많이 간절히 하고 싶을까? 혼자 지내는 자유로운 생활과 연애를 하며 얻는 즐거움 사이에 어떤 삶이 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까? 어쩌면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인 삶은 너무나 평온하다. 감정 소비에 굉장히 취약한 나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습관적으로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다. 그렇다 보니 친구들은 나에게 감정이 없고 삐걱거리는 로봇이란 말을 자주 한다. 깡통 로봇이 되더라도 이 습관은 결코 고칠 수 없을 것이다. 감정 소비에 취약하다는 건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감정에 아주 많은 피로를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애가 아닌 소개팅을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가벼운 감정의 변화가 나에게 큰 피로를 가져온다. 2주에 걸쳐 소개팅 2번을 연속으로 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소개팅을 끝내고 소개팅이란 것에 아주 질려버렸고 남은 소개팅까지 끝난 날엔 속으로 '아.. 드디어 숙제가 끝났다!'라고 소리첬다. 그리고 일주일 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은 꽤 즐겁다. 소비되는 감성과 시간 없이 모든 것을 나에게 투자할 수 있고 모든 일상이 내 예상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고 싶은 것들을 원할 때 언제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글을 쓰고, 요가를 하고, 카페에 가서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혼자 있는 삶이 어려가지 측면에서 나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째서 항상 연애를 갈망할까? 지금의 삶을 만족하고 연애를 하며 소비되는 감정이 너무나 싫지만 그래도 여전히 연애를 원할까? 사람 보는 눈은 점점 까다로워지고 피로해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선 마음 가는 데로 이름 모를 끌림을 따라가고 싶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정소민과 이민기가 바닷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이민기가 바다 앞에 앉아 있는 정소민에게 뛰어가는 장면과 함께 정현종 시선집 중 '방문객'이란 시가 나온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어쩌면 아직 한 사람의 일생을 받아들일, 내 일생을 가져다줄 용기가, 준비가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