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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달리기 Jun 09. 2022

사람이 너무 좋고 사람이 너무 싫습니다

반경 5미터에서 파이팅하고 있는 키키에게

안녕하세요, 키키님.     


저번 편지를 시작할 때 분명 시험 기간을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는데 말이죠. 저는 왜 다시 시험 기간에 와있는 걸까요? 희망은 종강에서 온다는데 지금 저는 희망의 문턱에서 괴로워하는 일개 대학생이군요. 어서 모든 일을 해치워버리고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렇게 쓰자마자 머릿속으로 질문들이 와락 밀려오네요. 새로 시작한 작업들은 원활히 굴러가고 계신지,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는 날은 얼마나 되시는지, 안온한 나날 중 못 견디게 속상했던 순간은 없었는지. 마치 당신이 맞은편에 앉아계신 것처럼 이것저것 다 궁금해집니다.     


편지란 참 신기하죠. 마음만 먹으면 몇 초 만에 모든 걸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인데, 편지는 그 시간을 부러 빙 둘러 가잖아요. 하지만 문장을 썼다 지우는 시간이 쌓일수록 편지를 받을 상대는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아요. 말을 어렵게 고르며 상대를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서겠죠. 그러고 보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말하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소통할 수 있어서 멀어지는 건지도요.     


이번 편지는 유독 말을 고르며 망설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사하의 반경 5미터에는 무엇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할지 정리가 되질 않았거든요. 어쩌면 무서웠나 봐요. 저의 시선이 실은 군색하기 짝이 없다는 걸 들킬까 봐서요. 하지만 군색할지언정 장황한 가짜 말고 단순한 진짜를 답하고 싶었는데, 단순해지는데도 능력이 필요하더군요. 지금까지도 답을 궁리하느라 생각이 너저분합니다.     


그럼에도 편지라면 어설픔도 무기라고 하셨으니, 그 말을 믿고 차분차분 써내려 보겠습니다.     


저번 편지에서 키키님은 “자신이 밟힌 방법과 그 횟수에 따라 각자 다른 시선을 갖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죠. 그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습니다. 지금 싸우는 사람들은 모두 밟힌 후 다시 일어서려는 존재들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나 밟힌 기억이 있다고 모두 싸우게 되지는 않습니다. 밟힌 기억으로 다른 사람을 밟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 사람들은 저를 정말로 속상하게 만들어요. 노동자를 공격하는 노동자들, 복지를 혐오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빈자들, 무상급식과 난민과 장애인시설을 ‘반대’하는 아주 평범한 형편의 사람들. 살기 힘든 사람이 살기 힘든 사람을 배척할 때 저는 외로워집니다. 연대라는 말이 다 우습게 느껴지죠.     


그럴 때일수록 나의 반경 5미터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키키님의 말씀이 무색하게도, 최근의 저는 제 반경 5미터를 미워했던 것 같습니다. 혐오로 힘을 얻은 정당이 지지받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페스티벌이 열리고, SPC 불매를 ‘조장’하는 노동조합에 경고하는 집회를 노동조합이 주최하는 상황이 못 견디게 외로워서요. 외로움이 증식되자 반경 5미터에 닿는 모든 사람들이 무척이나 미웠습니다.     


하지만 어제 저의 반경 5미터에는 조금 다른 마음이 들어섰어요. 지금 저의 학교에는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임금 440원 인상’을 요구하는 교내 노동자분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며칠 전 보고서 과제를 위해 노동자분들을 인터뷰하다가 알게 되었죠. 어제가 ‘연서명 전달식’이라 저도 참여해보았습니다. 아쉽게도 노동자분들을 뵙지는 못했지만 거의 매일 시위 현장에 방문하며 연대하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선한 에너지로 무장한 듯한 그들은 멀뚱멀뚱 서있는 게 전부인 저를 매우 환대해주었습니다. ‘학생들의 연대가 힘이 많이 돼요’라던 노동자분의 말씀이 이해가 되던 순간이었죠.     


짧은 전달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서 키키님의 ‘관찰’을 저도 한 번 시도해보았습니다. 후미진 골목 구석으로 걸어가는 비둘기가 제일 먼저 보였는데요. 저도 모르게 ‘파이팅’이라고 중얼거렸어요. 비둘기 파이팅, 이렇게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묘하게 기분이 밝아지는 거 있죠. 효과가 있잖아! 생각하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파이팅을 붙여봤습니다.     


가로등 파이팅

쓰레기 파이팅

민들레 파이팅

노동자 파이팅

예수님 파이팅

...     


그렇게 파이팅을 남발하며 반경 5미터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시 쳐다봤어요. 궁금해지더라고요. 저 사람들의 반경 5미터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생활과 돈이 있겠죠. 욕망과 꿈이 있겠죠. 싸움과 싸움이 있겠죠. 밟힌 기억과 밟은 기억이 있겠죠. 삶이 있겠죠. 그리고 제가 있겠죠. 미운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그들의 반경 5미터에는 제가 있겠죠.     


문득 그 사실이 퍽 괜찮게 느껴졌습니다. 반경 5미터는 무한히 커질 수 있다는 당신의 말씀처럼, 제가 저의 자리에서 파이팅하다 보면 언젠가는 상상도 못 했던 사람과 만나 함께 파이팅 할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파이팅하자. 각박한 세상에서 힘든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지 말고 밥 챙겨 먹고 산책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뉴스도 보고 옆 사람을 껴안아보기도 하면서 파이팅하자. 파이팅하자. 그런 생각을 되는 대로 해보았습니다.     


이 대책 없이 어설픈 생각들을 정리해 답변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제 반경 5미터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밉고 가엾고 구차하고 놀랍고 안쓰럽고 존경스러운 무더기의 사람들이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하고 사람에게 밟히고 사람을 밟고 사람 때문에 멈추고 사람 덕분에 일어서고 사람에게 화내고 사람에게 감동하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면서.


그렇게 넓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넓어지고 넓어지고 넓어져서 지구 끝까지 닿을 때까지 아주 파이팅해 보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떠신지요. 사람이 너무 좋고 사람이 너무 싫을 때 어떻게 파이팅하시나요. 무엇이 당신을 외롭게 하고 넓어지게 하나요. 어떤 밟힘의 기억이 있고,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나요. 듣고 싶습니다.


어설픔이 지나친 편지를 보내게 되어 민망할 따름이네요. 장황한 가짜를 써버렸을까 봐 무서워지지만 키키님은 어떤 어설픔에도 말할 여백을 찾아내실 거라 믿고 스리슬쩍 물러나겠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편지를 보내는 지금은 막 쏟아지던 비가 그쳤습니다. 오늘은 추천해주신 피아노곡을 들으며 산책해보려고요. 그럼 키키님도 평안한 오후 보내시기를.


2022.06.09. 사하 보냄.     


P.S 드라마 추천 감사합니다. 보고 있으니 맛있는 커피가 먹고 싶어 지네요. 만나는 날 좋은 카페에 가봅시다!




참고 기사

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5881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2060900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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