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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Oct 08. 2024

아멜리 노통브(2): 언어적 수행자



소설《갈증》에는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날부터 골고다 언덕에 올라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예수가 화자가 등장한다. 이런 설정과 관점만으로도 이미 이 소설할 몫을 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갈증에 대한 해석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볼 가치는 있다.


전지적 존재와 불완전한 인간 사이의 그 어디쯤에서 '체화'된 예수는 인간의 으로 신의 뜻을 헤아린다. 마치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애써 헤아려 보려는 듯이. 여기서도 아멜리 노통브는 여러 감정들(특히, 경멸)을 다루는 일에 몰두한다. 어떤 감정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분노보다는 놀라움을 먼저 느낀다. 때론 억누를 수 없는 감정도 있으며 잠들어 있는 마귀와도 같아 깨우지 않는 편이 현명한 감정도 있다.    


빌라도의 명에 따라 십자가형이 하루 미뤄지면서 기다리 예수의 슬픔과 외로움은 두려움이 된다. 아멜리 노통브의 이전 소설에서 세네 살의 화자가 몰이해에 매몰된, 하지만 성장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이었다면 예수, 그러니까 신의 모습을 닮은 자를 화자로 삼은 것은 (여전한) 몰이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인간은 육신의 이런저런 결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당연한 일 아닌가. 집이 없는 건축가가 설계한 집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에만 훌륭한 솜씨를 발휘한다. 아버지는 한 번도 육신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그분이 육신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경의로울 정도로 일을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갈증》, 17



아멜리 노통브의 갈증론에서 핵심은 육신이 가진 완벽한 한계성이다. 갈증은 사랑과 죽음과 같은 대열에 놓이며 육신의 완벽한 한계에서 가능해진다. 사랑이란 에너지. 즉,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성질을 갖는다. 약한 정신은 몸에서 쉽게 분리를 시도하면서 재앙을 일으킨다. 사랑은 선택하지 않으며 선별하지 않는다. 사랑은 눈멀지 않고 통찰력을 준다. 갈증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도 사실상 아멜리 노통브는 사랑에 대해 가장 오래 생각하고 관찰한 작가다.



우리 둘만 이라 함은 내 아버지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육신이 없다. 그 순간 마들렌과 내가 경험하는 절대적인 사랑은 음악이 악기에서 분출되듯 육신에서 솟아난다. 그토록 강력한 진실들은 오로지 갈증을 겪거나, 사랑을 느끼거나, 죽어 갈 때만 깨우치게 된다. 그런데 이 세 활동 모두 육신을 필요로 한다. 물론 영혼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충분할 수 없다. 갈증》, 89



아멜리 노통브는 묻는다. 배고픈 사람에겐 포만감이, 피로한 사람에겐 휴식이, 고통스러운 사람에겐 위안이 있지만 갈증이 있는 사람에겐 무엇이 있나? 프랑스어에는 해갈(解渴)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던진 언어유희적 질문이긴 하지만 갈증이란 '해소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화자 예수는 신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하고 연인 마들렌의 남자이기도 하다.


고통은 관계성에서 생긴다. 화자 예수는 고통을 덜기 위해 받아들인다. 삶의 의미는 고통을 겪지 않는 데 있다고 말한다. 육신의 갈증이여, 사랑과 죽음이여. 십자가에 못 박힐 운명의 예수는 자기 자신에게 애정을 닮은 우정을 느낀다. 사랑은 과하다. 언제든 증오로 뒤바뀔 준비를 한다.    



갈증이 사랑으로 이르는 것에 어떻게 놀랄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것, 그것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마 갈증만큼 실망을 안겨 주는 경우가 드문 감각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타는 듯한 목구멍은 물을 황홀경으로 상상하고, 오아시스는 사막을 가로질러야 도달할 수 있다. 사막을 건넌 후에 물을 마시는 사람은 절대 <에게, 별것 아니네>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게 될 여자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는 일은 두 사람이 맛보게 될 희열이 적어도 기대하는 만큼은 될 거라고 암시하는 것과 같다.

갈증》, 95



아멜리 노통브는 급기야 자기 자신을 반으로 접는다. 데칼코마니처럼, 거울처럼 칼 같이 반으로 접는다. 예수를 인간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신앙인보다는) 종교인들의 질타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실상 소설 속 논리는 꽤 종교적이다. 신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 그러니까, 신의 뜻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기 위해 -  '인간으로 우회하여 다시 신에게로' 날아가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내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멜리 노통브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다.



이 상황 속에서 나는 이면(裏面)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네가 견뎌 내지 못할 것을 그에게 강요하지 마라. 그가 너에게 잘못 행동해도 그의 처벌을 요구하지 마라. 그냥 너그럽게 넘어가라. 이면의 예시. 나는 이 참혹한 고통을 나에게 과할 정도로 나 자신을 증오한다. 나의 벌은 너희가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다. 갈증》, 103



언어적 수행자로서 갈증을 탐구하는 일은 끝을 모르는 일이다. 아니, 끝이 없음을 알고 시작하는 일이다. 우리는 현존하는 한계를 품고 기꺼이 갈증을 수용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저렇게 감정을 톺아보던 시절을 거쳐 비교적 최근작인 갈증》에서 아멜리 노통브는 언어적 수행의 경지를 보여준다. 성서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해서 삶은 오독으로 가득하지만 아멜리 노통브는 한 생애에 걸친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의 답을 찾아가는 듯하다. 그렇게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우리 자신을 탐구하기 위한 일생의 목표를 달성한다.



이런 헛된 몽상가 같으니, 너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일을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니? 그렇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해야만 한다. 왜 나는 그럴 수 없을까?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용서를 막는 것은 바로 생각이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나를 용서해야 한다. 그것은 내 행위에 대한 공포심이 아니라, 오로지 내 결정에 달려 있다. 나는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결정해야 한다. 갈증》,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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