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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Oct 07. 2024

아멜리 노통브(1): 사랑과 슬픔의 해부학



아멜리 노통브 Amélie Nothomb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벨기에 작가다. 처음 책 <적의 화장법>을 덮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 아멜리 노통브는커녕 그의 아류에 해당하는 작가조차 만난 적이 없다. 특유의 잔인함과 유머는 현대 프랑스 문학에 그랬듯 내 마음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두 살 때부터 3년간 일본 고베에 살았고 이후 중국, 미국, 방글라데시, 버마,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모국어와 모어가 모두 풍부해 글을 쓰기엔 최적의 조건 아닐까.


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사랑의 파괴적 본질이라든지, 내면의 모순과 열정이라든지, 주인공이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갖은 실수 끝에 완전한 무능의 경지에 떨어지는 과정 같은 것들을 해부학적으로 묘사한다. 소설 속에서 사랑도 슬픔도 '만질 수 있는 것'이 된다.



모든 소설은 가족사라고 했던가. 이 소설은 가족 중에서도 주로 여자들(엄마와 딸) 사이의 일그러진 관계, 그들의 연민, 고통, 사랑, 질투와 멸시, 그로 인한 파국을 그린다. 잠시 등장하는 의사를 제외하고 남자들(아빠와 아들)은 여자들의 마음을 잘 읽지 못한다. 그래서 무기력하고 존재감이 없다.

-《너의 심장을 쳐라'옮긴이의 말' 중에서 -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누가 알 수 있을까. 아멜리의 가족사가 얼마나 담겼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아멜리 노통브에겐 감정이라는 언어를 분해하고 해독하고 받아들이는 언어적 수행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너의 심장을 쳐라》의 서두를 장식하는 마리. 자신에 대한 타인의 질투와 시샘이 증오에 가까워질수록 쾌감을 느끼는 여성이다. 결혼 이후 딸 디안을 낳으면서 엄마 마리는 질투를 느낀다. 남편 올리비에의 이름을 따서 올리비아로 짓자는 마리에게 남편은 여신의 이름을 따 디안이라고 짓는다. 이러한 이름 짓기는 이 소설에서 '디안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처럼 읽힌다. 아들 니콜라(마리는 아들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와 막내딸 셀레나(마리는 셀레나에게 과잉 애정을 퍼붓는다.)가 태어나면서 자신에게만 엄마가 보이는 질투와 견제의 대우를 해독하는 과정을 거친다. 올리비아(!)라는 계약직 교수를 만나 정교수로 만드는 2년 간의 헌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디안에게 올리비아는 자신의 딸 마리엘까지 떠맡긴다.


디안이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정성 있는 애정을 보이는 성격이고, 마리엘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투사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헌신은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긴 한다. 이 서사에서 개연성은 디안은 '엄마의 딸'도 '올리비아의 호구'도 아닌 디안 자신이 되는 과정에서 생긴다.



그러니까 모든 생명의 의미이자 존재 이유는 그것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고, 그토록 많은 시련을 견뎌 내고, 계속 숨을 쉬려고 애쓰며, 그리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바로 사랑을 알기 위해서였다.

너의 심장을 쳐라》, 34



디안은 질투를 탐구한다. 질투란 엄마 마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있는 것, 질투의 순기능으로는 아빠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 했다는 것 등등.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만큼, 엄마의 질투를 이해할 수 없는 만큼 디안은 엄마에 대해 분노한다. 이해하려고 할수록 구렁에 빠져 공허해진다. 아들인 니콜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딸인 셀레나에게는 지나친 사랑을 퍼붓는다. 놀라울 정도로 아버지와 아들은 둔감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어떤 수상함도 느끼지 못하니까. '분노 - 균형 - (다시) 구렁'의 굴레를 거듭하 디안은 불의의 교통사고 당하는데 '육체 영혼을 헤아려 마음의 상처를 정확히 짚어 고통에서 구원하는' 의사에게 감명을 받아 자신도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성인이 된 디안은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모두가 선망하는 엘리자베스에게 환심을 사지 못해 (사랑보다는) 분노와 투쟁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려고 한다. 어쩌면 사랑의 자매는 질투가 아닐까 싶을 만큼. 엄마 마리는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일관한다. (이건 전 세계 엄마들의 공통점인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분석할 기회를 갖지 못한 마리는 뒤틀린 자기도취에 빠져있고 운명에 대한 무책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애정하는 동료가 아닌 '마리엘의 엄마' 올리비아가 자신에 삶에서 등장했을 때 '자신의 엄마'인 마리가 겹쳐진다. 엄마의 이미지는 반복된다. 달라진 건 디안이 더 이상 수동적인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 디안은 어느새 성숙한 애정의 주체로 성장했다. '무지한 엄마'의 질투는 괴물 같은 올리비아의 경멸 앞에서 비교적 순한 맛이다. 마리엘이 끝내 죽이고 마는 엄마 올리비아는 디안(혹은 작가)의 마음속 증오와 경멸 사이의 싸움에서 증오가 겨우 살아남았음을 뜻하는 것 아닐까. 적어도 증오는 뒤를 돌면 애정을 담보로 하고 있으니까.


이 소설에는 다양한 유형의 딸들이 등장한다. 엄마를 이해하려는 딸, 엄마를 떠나는 딸, 엄마를 살해하는 딸. 이들은 다른 사람 같았다가 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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