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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LS Aug 05. 2022

글쓰기 괴롭다

  무더운 여름밤, 바닥에 앉아 비스듬히 소파에 기대어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생각한다.


  ‘글쓰기 괴롭다.’


  글쓰기 모임의 가입하여 2주마다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한두 번이 아니다. 재작년부터 한 기수도 빠짐 없이 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내 생활의 루틴이 된 모임이다. 내 돈 주고 내가 가입한 글쓰기 모임인데 이토록 괴로울 일인가. 왜 매번 2주라는 시간은 한참 남은듯 보였으면서 정신 차려보면 지금 당장 자판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인 걸까. 내일이면 마감이고, 오늘의 시간도 끝자락에 다다랐는데 나의 메모장에도, 한글에도, 글쓰기 플랫폼에도 제출할 글은 단 한 글자도 적히지 않았다. 주제부터 글감까지 어느 것 하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막막하다. 이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가족들은 옆에서 쿨쿨 자고 있고, 나는 선풍기 앞에서 더운 몸과 머리를 식힐 따름이다.

  어른이 된 나에게 글을 쓰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다.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는 어른들의 강요로 글을 썼었다. 학교 숙제로 일기나 주장하는 글쓰기, 독후감 등 수많은 글을 썼지만 말 그대로 숙제처럼 여겨져 의미 없는 의무로 했던 일들이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사회적 약속으로 정해진 논문이나 보고서 등을 제외하고서는 글쓰기를 자발적으로 하지 않았으니 현재의 글쓰기는 나에게 누군가가 강요한 일도, 의무도 아니다. 글을 쓰는 것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주변 환경에도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많았어도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 필수불가결하게 종종 직장에서 글을 써야 하는 경우에도 어떤 주제나 의미를 지닌 글이라기보다는 보고나 평가의 목적을 지닌 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글을 썼다. 비문학과 문학으로 장르를 굳이 구분해보자면 문학이 주를 차지했다. 20대의 나는 쓰려면 조용히 일기장에 쓸 것이지 일기는 쓰지도 않는 인간이 SNS에 다시는 공개하고 싶지 않은, 소설이었다면 차라리 덜 수치스러울 수필을 쓰고는 했다. 뭐가 그리 애달팠는지 쥐어짜면 억지 울음이 꺼이꺼이 나올 것 같은 글들이었다.

  ‘스스로 글을 썼다’의 의미가 분홍 구두를 신고 주체할 수 없이 춤을 춰야 했던 동화 속 주인공처럼 미친 듯이 글을 썼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취미였다. 게다가 취미로 글쓰기만 한 것도 아니다. 취미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취미 방랑을 많이 했었다. 그렇게 성인으로서 자유를 누리던 나는 다른 여러 가지 취미도 즐기고, 친구들도 만나고, 때로는 뭉그적거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와중에 글쓰기도 일상의 작은 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뿐이다. 가끔씩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때면 글로 써서 해소했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편지를 써 마음을 담아주었다. 일기는 쓰지 않았지만 우연히 만난 인상 깊은 일상은 짤막하게라도 SNS에 글로 남겼다. 그렇게 서른이 될 즈음, 숱한 취미들을 돌고 돌아 글쓰기에 정착했다. 무엇 하나 끈덕지게 하지 못하고 금방 싫증을 내는 나였기에 글쓰기를 취미로 한 2년 반은 나름대로는 길다고 느껴진다. 2년 반, 짜릿한 맛이 아니라 뭉근한 맛으로 글쓰기가 내 곁에 있었던 시간이자 내가 글쓰기 곁에 있던 시간.

  글쓰기에 흥미를 느끼는 지점과 ‘글쓰기 괴롭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또 자판을 두드리고야 말게 만드는 지점은 맞닿아 있다. 하나는 사람들의 피드백이다. 글쓰기 모임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칭찬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고, 누구에게도 듣기 싫은 조언을 돈까지 내고 들으면서도 그 조언 덕에 발전해나가는 것 같아 의지를 다지게 된다. 취미를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결과물을 내보이며 ‘맞아요’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린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참 잘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만큼 설렘을 주고, ‘틀렸어요’라는 말은 어떤 말보다도 긴장되지만 어떻게든 소화해내고 싶게 만든다.

  또 다른 하나는 글쓰기를 통해 내가 나를 정리해나간다. 평소 생각이 쳇바퀴를 돌아 정리를 못 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다. 한 문장을 쓰면서 그 다음 문장의 내용이 무엇일지 나도 모르는 상태일 때 글을 쓰면 심연에서 사실 내가 하고 있었던 생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고, 정리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산파법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깨우치게끔 했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글은 내 생각의 산파이다. 나의 많고 허술했던 생각의 구슬이 꿰어져 나름의 보배가 되고, 작품이 되어주는 글. 내가 의지하는 글. 이러한 마음이 내가 글을 쓰게 만들고, 잘 쓰고 싶게 만들고, 쓰기 괴롭게 만든다.

  글은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하고 이렇게나 힘을 준다. 오늘도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얼마간 괴로워했고, 길지 않은 시간 글을 쓰면서도 자학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글의 끝이 보이는 이 순간, 정말 단순한 표현이지만 기분이 좋아진다. 글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자니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나왔던 대사가 떠오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글이 내 삶을 망치고 있지도, 내 삶이 구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수렁에 빠진 것도 아니기에 이 문장이 나의 상황에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나를 적잖이 괴롭히고, 충분히 뿌듯하게 한다는 ‘이중적인 관계’라는 점에서는 유사해 보인다. 

  나는 당분간 이 괴로움 속에 더 머물러 있을 예정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스스로 기다리고 기대하는 나의 글이기에 내가 당장 무엇을 글로 써야 할지 몰라 괴로워한들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 어른이 된 나의 숙제다. 나는 다음 마감에도 압박을 느낄 것이고, 글쓰기를 자처한 자로서 오롯이 내 탓만 해야 할 것이다. 마냥 즐길 수 있지 않다는 데서 글쓰기가 나의 운명은 아닐 수 있겠다. 다만, 글쓰기만이 현재의 나를 분명하게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글쓰기가 나의 인생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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