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
어떤 소설은 읽자마자 감상문을 적어내야만 자신의 진의에 가장 가깝게 표현되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소설은 오래된 모래성처럼, 밀려드는 사건과 시간에 휩쓸려 그 서사의 기억이 마침내 허물어져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적어낼 수 있는 감상문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한 감상문은 마치 폐허의 잔해로부터 과거의 찬란함을 회상하듯, 흐릿해진 기억 속에 남겨진 소설의 문장과 단어, 등장했던 이름들로부터 서사를 추적하여 역으로 사유를 구축함으로써, 소설을 읽은 당시의 '나' 그리고 현재 이 글을 써 내려가는 '나'로부터 발생한 생각의 차이, 즉 동질이상(同質異像)적인 모순의 변증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내가 꾸준히 관심을 들이는 주제를 다룬 소설이어야 하는데,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과거와 현재의 내가 끊임없이 희구하는 ‘돌연한 여행’을 주제로 다룬 소설로서, 뒤늦은 감상문을 쓰기에 매우 적절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
자아의 자기 유지
칸트가 규정한 ‘자아’는 마치 초상화 된 그림처럼 고정되고 실체화된 형태가 아닌, 내적 정신이 외부와 마찰되고 활동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규정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 본다면, 자아가 온전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예측/반복되는 일상적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과한 자극을 줄이는 방식으로 자기 유지를 안정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일상이 매일 잠자리와 직업이 바뀌고, 만나는 사람과 사건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라면, 온전한 자아를 구축하여 자기 유지를 이어갈 수 있을까? 분명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일상이라는 정돈된 활동의 비호 속에서 자아는 안정된 자기 유지를 이어가고, 이러한 흐름의 결과로서 우리 몸 안의 수많은 잉여 감각들은 겨울잠을 자듯 사지와 장기 곳곳에 침잠되어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든다.
하지만 감각은 곧 경험의 다른 언어다. 이 책에서의 문장처럼 우리 안의 경험되지 못한 ‘나머지’들은 언젠간 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육신 안에서 언제부턴가 잊힌 감각들을 깨워, 그것들로부터 그동안 경험되지 못한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삶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과장해서 말해볼 수도 있으며, 또한 자신 안에 몇 안되는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론으로서 제안된 여행은 그 자체로 극적이기 때문에, 비로소 침잠된 감각들은 깨어나고, 나를 구속하던 의무로부터 떨어져 나가며, 성실함으로부터 유리시킨다.
틈
나는 나를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여행은 일상을 물리치고, 비로소 깨어난 감각들을 통하여 그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자극을 선사한다. 그로 인해 드나들 수 없었던 자신의 이면에 균열을 내어 그 벌어진 틈으로부터 자신의 이면을 조망함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여행의 과정이 돌연할수록 '틈'을 통해 볼 수 있는 해상도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판타지
여행은 일상이 될 수 없는 경위를 가졌기 때문에, 개인으로 하여금 판타지가 될 수 있으며, 우리는 여행을 통해 일상으로부터 떠나가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에게 한걸음 다가가는 진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착지를 떠나는 방식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정착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는 일상을 방치한 채, 돌연 낯선 이의 언어에 이끌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의 무책임함으로 인해 일편의 삶은 혼란을 겪지만, 그레고리우스에게 그것은 자신의 내면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여행은 그런 무책임함에서 조차 자기 합리화를 도출해 내고, 일상은 그렇게 여행이라는 판타지로 인해 판타지처럼 무너진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무책임함으로부터 안식을 얻고, 의무로부터 무사히 피신될 수 있다면 이러한 배임을 온전히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반증적 희망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각자의 ‘희망’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의지로서 공고히 존재하고, 종국에는 희망을 이루어 내는 것이 삶의 의미를 연장하는 진일보적 모멘텀 되겠지만, 어쩌면 어떤 ‘희망(판타지)’은 단지 그것을 이루기 위함이 아닌, 오직 간직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희망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정착지로부터 멀리 떠나려는 욕망이 강할수록, 오히려 현실에 머물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는 여행지로부터 다시 돌아와 떠나기 전보다 더욱 안정된 삶을 소유하길 원한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떠나고자 하는 희망은, 어쩌면 정착하고자 하는 마음의 메아리로서 끝내 간직되어야만 하는 반증의 희망이다.
수감
어쩌면 ‘삶의 근거’는, 자신에게 선고된 생의 실체를 인정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수감된 삶의 바깥에 놓여있을지도 모른다.
여행은 행여 그럴지도 모를 불안함의 발로에서부터 입각한 욕망이거나,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삼은 일종의 핑계로서 끝내 떠나야만 할, 어쩌면 선고되지 않은 징역살이다.
여독, 그리고 인생
소설 속 야간열차는 우리의 육신이고, 열차 안에 타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는 육신 속의 ‘나’(영혼)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야간열차로 빗대어진 육신 속에 거주하는 나(영혼)는, 사람들이 ‘나’(육신)라고 칭하는 그것과는 별개로, 또 다른 ‘나’로서 육신과는 엄연히 구별되며, 존재론적으로도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손에 넣게 된 매력적인 책의 저자인 ‘프라두’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따라 마치 또 다른 육신, 즉 프라두라는 야간열차에 환승하여 타고 있는 것처럼 프라두의 삶과 자신을 동일시 하듯 추적하지만… 타 지역으로의, 그리고 타인으로의 여행이 점점 길어질수록 불안감도 점차 커져간다.
여행은 여행일 뿐, 결국 여행이라는 언어 속에 담지된 메타포는 귀향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순간 선천적으로 매표된 단 한 장의 승차권만을 가졌다는 이유로, 우리는 결국 타인의 삶에 승차할 수 없으며, 허락된 것은 고작 다음 환승역까지 동행 정도일 것이다.
어떤 이의 말처럼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지만, 결국 혼자 죽어야만 하는 것”처럼 프라두의 언어를 따라 자신의 정착지를 박차고 따라나선 그레고리우스 앞에 남겨진 것은 결국, 익숙했던 삶으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삶의 보수성’으로부터 기인된 귀소적 불안, 그리고 익숙한 정착지로 되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대한 그리움이 남겨져 있었다. 이것을 여독이라 발음해도 괜찮을까?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라는 야간열차가 운행하고 있는 고유한 ‘행로’일 것이며, 그 종착역에서 내릴 사람 역시 오직 자신만이 될 것이다.
여행을 마친 그레고리우스는 '삶이란 결국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인식을 넘어설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결국 칸트가 자아를 “고정되고 실체화된 형태가 아닌, 내적 정신이 외부와 활동하는 상태”로 정의했던 것처럼, 프라두가 정의한 인생 역시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라고…
삶은 한 사람의 개별자가 꾸는 하나의 '기나긴 상상'이며, 언젠가 자신이 사체에 다다를 순간에 조차 그 상상은 계속되다 허물어지는 줄도 모른 채 허물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